다니엘의 명령을 들은 멕캘 중위는 병사들과 함께 적 수뇌부와 적병들을 포박하였다.
포박하는 도중에 몇몇 장교들이 심히 불쾌하단 표정으로 이를 꽉 깨물었지만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니엘이 앞서 ‘반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상관없다’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병사들의 목숨보다 자신들의 목숨이 중요하다 생각해서 피난 행렬에 이른 놈들이다.
목숨이 걸려있는 이상 순한 양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그리 왕국군의 군 수뇌부와 병사들을 모두 포박한 멕캘 중위는 무전병을 시켜 제국군 사단 사령부에 이 사실을 알리라고 명하였다.
무전병은 그렇게 하였고 사단 사령부 측에서는 알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위치 좌표를 말하면 즉시 그곳으로 호위 부대를 보내겠다는 말은 덤이었다.
모든 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멕캘 중위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사단 사령부에서는 아군과 왕국군을 향해 철갑 사단의 사단장을 생포했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퍼트릴 것이다.
그렇다면 아군의 사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고 적의 사기는 급속도로 하락한다.
사단장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일부 적군들은 제국군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려고 들 것이고, 그 과정에서 혼란과 공포가 초래될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미 제국군에 유리하게 조성된 전장에 종지부를 찍은 격이다.
‘이 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한 자는…….’
홀로 부두에 서서 해안선을 바라보고 있는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였다.
‘처음 봤을 때는 참모 본부의 샌님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두려울 정도로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 천재 참모였다.
멕캘 중위가 경외의 감정을 담아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에 글렌디 중사가 다가온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적의 보급경로를 찾아낸 것도 놀라운데 그걸 역이용하자고 제안하신데다 이번에는 적 수뇌부까지 사로잡다니요? 솔직히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피식 웃은 멕캘 중위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작전이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살아 있는 역사를 보는 걸지도 모르겠어.”
“……역사 말씀이십니까?”
“그래. 생각을 한 번 해보게. 우리가 겪은 노르디아 전투는 역사서에 기록되기에 충분한 전과이지 않나? 우리 같은 일반 간부들은 모르겠지만 중대장님의 이름은 당당히 실리겠지.”
하긴 이렇게나 많은 공훈을 세운 사람의 이름이 역사서에 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글렌디 중사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리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고양되는 것 같습니다. 장차 제국의 위인으로 칭송받을지도 모르는 사람 밑에서 활약한 거지 않습니까? 안줏거리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제국의 위인이라. 너무 나간 것 같았지만 미래의 다니엘이라면 위인의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였다.
“위인보다 더 어울리는 명칭이 있지요.”
그때, 글렌디 중사와 멕캘 중위의 사이로 프리엔이 들어온다.
다가온 줄도 몰랐던 글렌디와 멕캘이 흠칫하는 순간 프리엔이 입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 다니엘 대위님은 짐승만도 못한 연합국의 공격으로 인해 위태로워진 제국을 보우하라고 하느님께서 내려보내신 성자가 아닐까 싶어요.”
다니엘을 바라보며 두 눈을 게슴츠레 좁힌 프리엔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 대위님이라면 분명 연합국의 짐승들에게 불지옥을 보여주실 수 있겠지요. 그리하여 이 땅에는 오직 제국인들과 제국인들을 추종하는 자들만 남을 거랍니다.”
프리엔의 급진적인 사상에 멕캘과 글렌디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멕캘과 글렌디 또한 연합국의 멸망과 제국의 승리를 열렬히 원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지만, 제국인을 제외한 모두를 엄벌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보급대대와의 전투 때부터 느꼈지만 눈앞의 이 여자의 눈에는 어딘가 모르게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프리엔이 내보인 충성심을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치를 보던 글렌디가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보다 중대장님은 바다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요.”
글렌디의 말에 멕캘 중위가 시선을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적 수뇌부를 붙잡은 군공을 올렸으니 기뻐할 법도 한데, 다니엘은 어딘가 모르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만히 바다를 응시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어찌 천재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나. 그래도 감히 추측하자면 아마 전후에 처리해야 할 여러 사안들을 떠올리고 계시겠지.”
“과연. 중대장님이라면 그러고 계실 확률이 높을 것 같기는 합니다.”
글렌디와 멕캘이 선망의 눈길로 지켜보는 가운데, 바다 위를 떠다니는 갈매기 몇 마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고 싶네…….’
다니엘은 그저 목가적인 평화를 바랄 뿐이었다.
*
수뇌부가 도망을 치다가 붙잡혔다는 소식이 전장 전역에 퍼지기 시작하자 철갑 사단은 사기를 잃고 차례차례 백기를 들었다.
전투 의지를 상실한 적군들 덕분에 제국군은 손쉽게 노르디아에 입성, 도시의 주요 건물들을 점거한 후 왕국의 깃발을 내리고 제국의 깃발을 내걸었다.
제국의 노르디아 점령을 기정사실화 시킨 펠데라함 소장은 병참로 연결을 명령하고 철갑 사단의 주요 인물들을 본국으로 이송시켰다.
그 과정에서 나 또한 전후 처리로 인해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펠데라함이 일부 구역의 방어 지점 선별 작업, 치안 유지, 기밀 보호에 관련된 일들을 내게 일임했기 때문이다.
그리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무렵에 뜬금없이 하인리히가 나를 시청으로 호출하였다.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명령을 거스를 순 없는 입장이라 시청으로 향했다.
물론 말이 시청이지 지금은 주둔지 사령관이 집무를 보는 사령부 건물이나 마찬가지다.
사방에 제국의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원을 확인해야만 했으니까.
어딘가 모르게 스산한 분위기를 느끼며 건물의 계단을 오르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경례를 올린다.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통과하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삼층으로 올라갔다.
고딕 양식 느낌의 복도를 지나 주둔지 사령관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내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얼마 안 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허락을 받은 내가 문을 열어서 안으로 들어가니 하인리히와 그의 부관인 필립이 서 있었다.
집무실 안으로 걸음을 옮긴 내가 경례를 척 올렸다.
“여단장 각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경례를 받아준 하인리히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그래. 그동안 전후 처리에 바빠서 얼굴을 볼 기회가 잘 없었군. 자네가 큰 공훈을 올렸는데도 도외시하는 게 아닌가 싶어 죄책감을 느끼던 참이었네.”
열중쉬어 자세로 변경한 내가 당치도 않는다는 것처럼 말했다.
“군인은 단지 명령에 따를 뿐 성과에 대한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마음가짐이군. 그 겸손함을 다른 군인들도 본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제국의 기초 이념이 신상필벌이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하인리히가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귀관도 알다시피 나와 사단장님은 곧 이곳을 떠나 북부 최전선에 합류하게 되네. 점령을 완료했으니 노르디아에는 더는 볼 일이 없기 때문이지. 그렇게 되면 주둔지 사령관 자리는 공석이 되네. 알고 있나?”
“……예. 알고 있습니다만 그걸 왜 소관에게 말씀하시는 것인지?”
“귀관에게 말해주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겠나? 공석이 된 주둔지 사령관 자리를 자네가 지켜줬으면 좋겠기에 하는 말일세. 임시 주둔지 사령관으로서 말이야.”
식은땀이 흐른다.
“각하? 저는 참모 본부 직할 부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참모 본부의 명령을 따르는 일개 대위일 뿐이라고 어필하였지만 하인리히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걸 왜 모르겠는가? 당연히 참모 본부에서도 허가가 떨어졌네. 본부에서 주둔지 사령관을 임명하기 전까지 자네가 공석을 지키고 있으라고 말이야.”
아니. 무슨?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은 내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임시직이라고는 해도 주둔지 사령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대대급 인원을 통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관급 장교인 제가 대대급 인원을 통솔할 수는 없습니다. 주둔지를 관리할 기타 권한도 겨우 위관급 장교인 제게 부여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는데, 어쩐지 하인리히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간다.
“당연히 우리도 위관급 장교한테 주둔지 사령관 자리를 맡길 생각은 없네.”
뭐야. 질 나쁜 농담이었던 건가.
한숨을 돌린 내가 태연함을 되찾았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참모 본부로 돌아갈 채비를-”
“부관.”
하인리히의 말에 필립 대위가 상자를 들고 내게로 다가온다.
비단으로 만든 제국의 국기에 감싸져 있는 작은 상자였다.
응? 상자라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필립 대위님? 왜 존댓말을 쓰시는 겁니까?
불안함이 극에 달했을 순간에 필립 대위가 국기를 펼친 후 상자의 입구를 열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윤이 나는 소령 배지와 견장이었다.
설마하던 순간 하인리히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특진 축하하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 제국의 최연소 소령이 탄생하는 순간을 내 눈으로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네! 아! 그렇지. 내가 직접 달아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소령? 내가? 얼떨떨한 기분 속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인리히가 상자 안에서 소령 배지를 꺼내든다.
“영광으로 생각하도록 하게. 제도의 소식을 전해 듣기로 황제 폐하께서도 자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고 하니까.”
그리 말한 하인리히가 대위 배지를 빼고 소령 배지를 내 제복에 부착해주었다.
그 일련의 손놀림을 멍하니 바라보던 내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찔 떨었다.
참모 본부 소속 작전 참모.
2등급 보국훈장 국선장 보유자.
제 7 마도 기갑사단 사단장 의견에 따르면 피에 굶주린 늑대.
노르디아 침공 작전의 일등 공신.
제국 최연소 소령.
점령지 임시 주둔지 사령관.
그 모든 것들을 되돌아본 내 입꼬리가 경련하듯 미미하게 떨린다.
‘잠깐만. 이거…….’
아무리 봐도 전범 재판에서 사형당하기 딱 좋은 ‘제국군 지도부 핵심 인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