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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5 - Chapter 45

보름 후.

평소처럼 사령부의 집무실로 출근한 나는 의자에 앉아 루시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검토하던 루시의 은백색 머리칼이 아래로 스르르 흘러내린다.

루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편으로 넘기고는 업무에 매진하였다.

업무를 처리할 때 나타나는 저 고도의 집중력을 보자면 훌륭한 부관이 따로 없었다.

루시가 평범한 부관이었다면 칭찬을 수시로 해줬겠지.

‘하지만 스파이다.’

언제 나를 암살할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루시였다.

그래서 한동안 고민을 많이 했었다.

왕국의 연구실을 털어서 나온 연구 일지를 상부에 보고할지 말지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고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당 일지를 토대로 루시가 스파이라는 걸 주장한다고 해도 증거가 없다.

그런고로 루시 입장에서는 동명이인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루시라는 이름이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드문 것도 아니었으니까.

사건이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가게 된다면 정작 위험해지는 건 나였다.

루시 입장에서는 다니엘 슈타이너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분명 참사가 일어나겠지…….’

그러니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루시 프로젝트’에 대해서 나만 알고 있는 게 옳았다.

생각을 정리한 내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루시가 서류를 검토하다 말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루시의 붉은 눈을 마주한 채 말했다.

“본부에서 주둔지 사령관을 보내겠다고 연락이 왔던데. 언제 도착하는지 알 수 있겠나?”

“아. 최소한의 호위 인원들과 함께 어제 출발하였다고 하니 일주일 정도 걸릴 겁니다.”

“최소한의 호위 인원들이라 하면?”

“일개 대대급입니다. 이마저도 본부에서 줄인 겁니다. 첨언하자면 주둔지 사령관께서 장기적인 점령을 위해서는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요청했으나 본부에서 기각했다고 합니다.”

대대급 인원들이 출발했는데도 일주일이면 노르디아에 도착한다라.

병사 전원을 수송차량에 탑승시킨 후 급속 행군을 시킨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의문이 들었지만 본부의 결정이니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이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내가 말문을 열었다.

“전선의 상황은 어떤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연전연승입니다. 현재 제국이 왕국의 영토 절반 이상을 점령하였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왕국은 이미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과연. 이대로 가면 황제 폐하의 생각대로 겨울이 오기 전에 왕국을 무너트릴 수 있겠군.”

“그렇습니다. 다만 왕국은 현재 결사항전을 준비하는 것인지 전선을 물리고 수도 방위에 모든 병력을 투입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제국군 또한 일종의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습니다.”

수도 방위에 전 병력을 투입했다니. 최후의 발악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하지만 제국군 입장에서도 고슴도치나 마찬가지인 왕국의 수도를 함락시키기는 껄끄러울 터.

출혈을 감수하기 싫은 제국군에서는 아마 왕국에게 강화 협상을 제안할 것이다.

최후 통첩이나 마찬가지인 강화 협상 제안에 왕국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게임에서는 제국의 제안을 무시하고 결사항전에 나섰던 걸로 아는데…….’

내가 의도치 않게 활약을 해버려서 상황이 많이 바뀐 탓에 어떤 결론이 날지 알 수 없었다.

물론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긴 하였다.

나는 본부에서 주둔지 사령관이 올라오면 인수인계를 해준 다음 제도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제도로 돌아가면 가장 먼저 술이나 한잔 해야겠군. 보급용 위스키가 아니라 제대로 된 걸로 말이야.’

제도에서 보낼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떠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 물러가라! 물러가라!

─ 아름다운 노르디아에 너 같은 오물은 필요하지 않다!

시민들의 함성과 외침에 어깨가 움찔 떨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창가로 다가갔다.

사령부 앞 대로에서 최소 수백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피켓을 들고 걸음을 옮기는 게 보인다.

‘……뭐지? 드디어 주둔군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건가?’

의아해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루시가 옆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특권층에 대한 시위군요. 조짐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일어날 줄은 몰랐습니다.”

“특권층이라면…… 설마 노르디아의 귀족들을 말하는 건가?”

“맞습니다. 소령님이 ‘유색 인종 차별 금지법’을 제정한 이후 시민들과 귀족들의 불화가 극에 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귀족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오늘 터진 모양입니다.”

루시의 말이 정말인 모양인지 시민들은 사령부를 지나치더니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법을 제정한지 보름만에 일이 터진단 말인가.

뒷짐을 진 채 미간을 찌푸리던 나는 문득 드는 생각에 주먹을 꾹 쥐었다.

‘이건 노르디아에서 내 고과를 낮출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머릿속의 주판을 굴린 내가 루시를 돌아보며 말했다.

“주둔군의 가용 인원들에게 명령해라. 시위대를 따라가라고 말이다.”

“……시위대를 말입니까?”

“그래. 시위를 관리하는 것도 주둔군의 역할이다. 혹여 시위 과정에서 폭력이 일어난다면 그걸 제지하라고 일러두어라. 제지하는 과정에서 무력을 행사해도 상관없다.”

루시는 내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주둔군에 바로 소령님의 명령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시가 뒤돌아서 걷는 것을 확인한 내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임시 주둔군 사령관 자리가 일주일 남은 시점에서 이런 기회가 올 줄이야.’

분노로 일어난 시위라면 분명 폭력이 동반될 것이다.

시민들의 폭력을 주둔군이 일방적으로 제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시민들은 주둔군은 아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국의 군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껏 쌓아온 주둔군에 대한 시민의 지지도가 나락을 갈 게 분명하다.

참모 본부는 순간의 판단 실수로 공든 탑을 무너트린 나를 좋게 보지 않겠지.

내게 기대를 걸었던 참모차장님께 깊은 실망을 안겨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나는 작전 지원에서 한 발 물러나며 편안하게 내지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다.

그곳에서 안전을 보장받은 채 제국 탈출에 대한 실마리를 찾으면 그만이었다.

‘완벽해.’

뒤늦게 올 주둔지 사령관이 고생을 좀 하겠지만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미리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본래 인생이란 순탄하지 않은 법입니다.’

사악한 미소를 지은 내가 여유롭게 시위대의 행렬을 내려다보았다.

*

계속해서 행진하던 시위대는 한 거대한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물러가라! 노르디아를 좀먹는 이 쓰레기 자식아!”

“당장 아버지를 풀어줘! 아버지가 너한테 진 빚은 이미 갚고도 남았어!”

“개자식! 네가 노르디아를 망치고 있었다는 걸 알기나 하냐!?”

저택의 주인인 타람토는 소란을 듣고 사병들과 함께 앞뜰로 나왔다가 경악하고 말았다.

언뜻 봐도 수백명이 넘는 시민들이 각자 피켓을 들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 중에는 평소 인종 차별을 금하자고 주장하던 몇몇 귀족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검은 군복을 입은 제국의 군인들이 시민들을 보호하듯 도열하고 있었으니 신경이 곤두서고 있었다.

“미치겠군! 저것들 왜 저러는 거야!?”

타람토의 말에 사병들 중 한 명이 말문을 열었다.

“그게, 주인님이 노예로 부리고 있는 인원들을 풀어달라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 노예?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일을 시키는 건데 무슨 노예!? 저 미친 작자들이 지금 내 사유재산을 내놓으라는 거냐? 강도나 다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타람토가 보기에 시민들은 자신의 재산을 앗아가려는 강도 집단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쟁 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급이라고는 해도 먹여주고 재워주는 자신은 정상적인 범주에 든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혜도 모르는 염병할 새끼들! 다 쏴버려! 몇 명이 죽으면 놀라서 바퀴벌레처럼 흩어지겠지!”

“예? 주인님, 하지만…….”

“입 닥치고 내 말대로 해!”

사병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시위대를 향해 총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다른 사병들 또한 시위대를 향해 엉거주춤 소총을 겨눈다.

“초, 총이다!”

“저 미친놈이 우릴 쏘려고……!”

덕분에 시위대는 놀라며 뒷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제국의 군인들을 통솔하고 있던 멕캘 중위가 확성기를 들어 올렸다.

─ 총을 내려놓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임시 주둔지 사령관이신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은 시위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덕분에 타람토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무어라 반박을 못 하고 있을 찰나에 멕캘 중위가 다시금 말했다.

─ 만약 귀하가 사령관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발포를 할 경우, 폭력에는 폭력으로 대응하라는 명령에 의거 귀하는 물론이고 귀하를 지키고 있는 사병들의 목숨 또한 보장할 수 없습니다.

멕캘 중위의 말을 들은 타람토가 침을 꿀꺽 삼켰다.

멕캘 중위의 말이 타람토에게는 ‘선을 넘으면 너희를 죽이겠다’로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군은 정녕 시민의 편을 들기로 했단 말인가.’

한참 동안 이를 꾹 깨물던 타람토는 별수 없이 백기를 들고 말았다.

“……총을 내리고 저 치들의 가족들을 내어줘라.”

“예? 정말입니까?”

“그래. 주둔군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다.”

우물쭈물하던 사병들은 일제히 총을 내려놓았다.

그들도 제국군과 싸우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위를 하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타람토가 물러난다! 이제 가족들을 볼 수 있어!”

“타람토 이 개자식아! 이제 알겠지! 주둔군은 시민의 편이다!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주둔군 만세!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 만세!”

피켓을 높게 들고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이 사방에 가득 퍼지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비밀결사 흑조의 수장인 함탈도 있었다.

‘타람토를 굴복시키다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타람토는 노르디아에서 가장 잘나가는 귀족이었다.

그가 부를 축적한 사업 수완이라면 유색 인종에게 돈을 빌려준 후 빚을 갚으라는 명목으로 저택이나 농장에 감금시켜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막대한 고리대금이라 빚을 갚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법 또한 유색 인종이 아니라 귀족인 타람토의 편을 들어주었기에 여태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임시 주둔지 사령관인 다니엘이 ‘인종 차별 금지법’을 제정하여 시민들에게 용기와 힘을 복돋아주었다.

거기에 자신은 시민들의 편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번 시위에 주둔군을 호위처럼 붙여주어 타람토의 무차별 총기 난사를 막아주었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정복자가 아니다.’

왕국의 압제에서 시민들을 구원하러 온 해방자였다.

시민들이 다니엘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광하고 있을 때, 함탈은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조용히 송신 버튼을 눌렀다.

“흑조의 모든 결사대원들은 들어라.”

잠시 뜸을 들인 함탈이 두 눈에 확신을 품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의 뜻에 함께한다.”

모두가 인정하는 노르디아의 영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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