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에드리아.
백작 칼레드라의 서재.
“이쪽입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에드리아의 내무 대신인 소르텐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미로처럼 복잡한 서재를 이리저리 오가던 소르텐은 곧 열람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람실에 들어온 소르텐은 참으로 기이한 감상을 받았다.
서재의 삼층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최소한의 햇빛만이 내리쬐고 있었으니까.
정오임에도 어두컴컴한 서재를 둘러보던 소르텐은 곧 칼레드라 백작을 발견하였다.
그는 스탠딩 테이블 앞에서 지팡이를 짚은 채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뱀을 닮은 희고 가는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이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오한을 안겨준다.
칼레드라 드 노르테베르.
이름보다는 피의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그는 명실상부 에드리아의 실세였다.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고위 정치인들과 군 수뇌부들에게 뇌물을 먹여왔기 때문에, 한 번이라도 돈을 받은 이들은 칼레드라의 영향력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내무 대신 소르텐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무 대신이라는 자리 자체도 눈앞에 있는 칼레드라가 안배해 준 것이었으니까.
칼레드라는 소르텐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한기가 서려 있는 칼레드라의 말소리에 괜히 긴장감이 감돈다.
무의식적으로 목의 넥타이를 붙잡은 소르텐이 심호흡 끝에 입을 열었다.
“루시 에밀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하러 왔소.”
소르텐이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칼레드라는 소르텐의 말이 불쾌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걸 눈치챈 소르텐이 어색함 속에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루시 에밀리아가 적국에 너무 오래 체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걱정된다는 말이오. 혹여 변심한다면 연합국의 큰 손해가 아니겠소?”
여전히 칼레드라는 말이 없었다.
소르텐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루시 에밀리아가 경계가 삼엄한 제도를 벗어나 왕국의 노르디아에 있다고 들었소. 이참에 다니엘 슈타이너를 제거하고 복귀하라 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만.”
“…….”
“보시오. 다니엘 슈타이너는 내가 봐도 다방면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 있소. 지금은 겨우 소령에 불과하지만 그가 진급을 거듭해서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 거 같나?”
싹을 미리 제거하는 게 연합국에 이로울 거라는 소리였다.
소르텐의 이야기를 다 들은 칼레드라가 여상한 손길로 책을 덮었다.
칼레드라는 책의 겉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루시는 변심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와 제가 가진 유대감이 각별하다는 건 당신도 아실 텐데요. 그 아이는 저를 아버지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루시를 딸처럼 여기고 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르텐을 말을 잇지 못하였다.
칼레드라의 뱀과 같은 눈동자가 소르텐을 쏘아보았기 때문이다.
소르텐을 침묵시킨 칼레드라가 분노를 가라앉히고는 태연함을 되찾았다.
“……또한 다니엘 슈타이너는 제거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장은 그를 살려두는 것이 연합을 이롭게 만들 테니까 말입니다. 물론 다소 차질이 있기는 합니다.”
그의 활약은 칼레드라가 예상한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특히 노르디아 침공 작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것을 들었을 때 칼레드라는 물론이고 에드리아의 군 수뇌부 또한 경악을 표했다.
하지만 큰 줄기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암살은 최후의 방법입니다. 우선은 루시를 그 자의 곁에 두어 이점을 취해야겠지요.”
“……이점이라고 하면?”
“루시는 객관적으로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루시의 정체를 모르는 이상 이성적인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저희는 그걸 이용할 것입니다.”
미인계라도 명령할 속셈인가?
‘하긴…….’
역사적으로 위대한 지도자라 불리는 이들도 여자 문제로 고초를 겪은 사례가 적잖이 있었다.
“제아무리 이성적인 자라도 사랑이란 정신병에 걸리면 감정에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감정에 의존하게 된 자를 꼭두각시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다니엘 슈타이너를 감정적으로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유용한 장기 말에 불과하다.
곰곰이 생각하던 소르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렇다면 나는 귀공을 믿고…….”
소르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칼레드라가 손을 휘휘 저었다.
쓸데없는 말로 독서를 방해하지 말고 떠나라는 의미였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지만 감히 칼레드라에게 항의를 할 수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소르텐이 시종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소르텐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칼레드라는 책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니엘 슈타이너라…….”
그가 이룩한 업적들을 떠올리던 칼레드라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다니엘 슈타이너 외에도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
“곧 노르디아에 도착합니다.”
운전병의 말에 주둔지 사령관 자리를 발령받은 대령 에르빈이 침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에르빈의 부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각하. 무언가 편찮으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부관의 물음에 에르빈이 낮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한 번 물어보지. 주둔지 사령관 자리로 가는 것인데 마음이 편할 수 있을 것 같은가?”
“……하지만 참모 본부의 자료에 따르면 민생이 안정된 것으로 보이고 있지 않습니까?”
“참모 본부에 그 자료를 전달한 것이 누구일 것 같나?”
“그야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 아. 그렇군요.”
부관이 이해가 간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실적에 눈이 먼 장교가 통계 자료를 조작해서 본부에 보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다니엘 슈타이너가 과연 거짓 보고를 올렸을까?
부관이 의아해하는 와중에 대대 인원을 실은 군용 차량들이 노르디아에 질서정연하게 입장한다.
창밖에 노르디아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에르빈은 고개를 돌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임시 주둔지 사령관 자리에 앉은 것은 이제 겨우 한 달이다.’
한 달만에 민생을 안정시키고 주둔군에 대한 지지도를 확보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에르빈은 동부 전선 출신이다.
동부 전선에서 여러차례 진격과 후퇴를 겪으면서 수많은 지역을 점령하였고 또 빼앗겨보았다.
그 모든 점령지에서 주둔군에 호의적인 시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주둔군을 두려워하거나 경멸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는 소리다.
제아무리 제국의 영웅 소리를 듣는 다니엘 슈타이너라고 해도 이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러니 현재 노르디아의 시민들은 병력을 이끌고 도시로 들어오는 자신을 좋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최악의 경우 차에서 내리자마자 폭동이 발생할 수 있었기에 에르빈은 긴장을 유지하였다.
괜히 권총집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창밖을 살펴보고 있던 부관이 입을 열었다.
“각하? 시민들이 무언가를 던지고 있습니다.”
“오물을 던지는 것은 흔한 일이니 걱정하지 마라. 해당 인원들을 현장에서 제지했다가는 주둔군이 시민을 억압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 반응하지 않도록 유의해라.”
“예? 아아. 그게 아니라 꽃잎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응? 꽃잎을 던지고 있다고?
무슨 소린가 싶어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에르빈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부관의 말대로 노르디아의 시민들이 바구니에 담긴 꽃잎들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소가 만개한 얼굴들을 보니 주둔군을 열렬히 반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에르빈은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주둔군이 아니라 아군을 맞이하는 것 같은 모습이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끼이익─
에르빈을 태운 차량이 사령부 건물 앞에서 정차한다.
차에서 내린 에르빈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가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사령부 앞에 황제 폐하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급조한 동상인 모양인지 형태는 많이 조잡하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동상 앞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꽃을 한 송이씩 놓고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던 에르빈이 근처를 지나가는 꼬마를 붙잡고 물었다.
“얘야. 아저씨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저 동상은 누가 세운 거니?”
꼬마는 에르빈을 멀뚱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얼굴 새까만 아저씨가 세우자고 했어요. 어른들이 다 동의했고요. 원래 다니엘 슈타이너? 그 사람 동상 만들자고 했었는데 본인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황제 아저씨로 바꿨데요.”
그러니까…… 명령이 내려진 게 아니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은 후에 황제 폐하의 동상을 만들어서 이곳에 세워둔거라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있을 찰나에 사령부의 정문이 열린다.
“아! 에르빈 대령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장교용 방한 코트를 입은 채 간부 몇 명과 함께 다가오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에르빈은 일종의 존경심을 담아서 말을 건넸다.
“다니엘 소령? 내가 수많은 점령지를 돌아봤지만 이렇게나 주둔군을 환대해주는 적국 시민들은 처음일세.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에르빈의 앞에 선 다니엘은 동상을 한 번 돌아보고는 해탈한 듯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게…….”
다니엘의 미소에서 체념의 감정이 묻어나온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일이 왜 이렇게 흘러간 건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