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후.
나는 도시 순찰을 명목으로 간부들과 병사들을 데리고 도시 외곽을 돌아다녔다.
굳이 도시 외곽을 순찰하는 이유? 주둔군이 상주해있는 중심부보다는 외곽 쪽이 시민들의 불평과 불만을 적나라하게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없다.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었지만 주둔군에 대한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가끔씩 나를 발견한 시민들 중 몇몇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갈 뿐이다.
‘음. 이거 아무래도…….’
주둔군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했다가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에 말을 삼가는 것으로 보였다.
아니면 임시 주둔군 사령관인 내가 순찰을 한다는 소문이 거리에 미리 퍼졌거나.
그게 아니라면 내가 행한 폭정에 반발하지 않는 것이 말이 안 됐으니까.
상황을 이해한 내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루시를 돌아보았다.
“부관. 주둔군에 대한 노르디아 시민들의 평가는 어떻지. 열흘간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나보다는 네가 현장을 많이 돌아다녔으니 잘 알 거라 생각하는데.”
루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불만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주둔군의 도시 점령을 용인하는 분위기입니다.”
“……용인한다고? 주둔군을?”
“예. 소령님의 적절한 조치로 인해 도시의 공공 서비스가 빠르게 복구된 것은 물론이고 마비된 행정체계 또한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범죄 발생률이 도시 점령 이전보다 낮아졌다는 보고가 들어온 바 있습니다.”
순찰을 강화하고 공공 서비스를 시급히 활성화시키라 명한 건 나였으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시민들이 주둔군을 용인하고 있다는 건 다른 문제였다.
본래 점령 초기에는 분노에 점철된 시민들이 많은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그리고 정상적인 도시라면 내가 책정한 세율과 강제 군역에 반발해야 할 텐데?’
혹시 내가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나? 관련해서 루시에게 질문을 던지려던 순간이었다.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제보다 일당이 더 줄었습니다!”
젊은 남자가 목청껏 외치는 소리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
감시탑 재건 현장 앞에서 중간 관리자로 보이는 이와 흑인 남성이 대치중이었다.
중간 관리자는 짜증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꼈다.
“이봐. 너를 써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 아니면 그 일당도 빼앗기고 싶어?”
“써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일당의 절반을 가져가시면 제 가족은 뭘 먹고 살라고……!”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정을 알고 싶었던 내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으면 초과로 근무를 뛰던가. 왜 나한테 지랄…….”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간 관리자가 발소리를 듣고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무장한 병사들과 군 간부들을 위시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급히 고개를 숙였다.
“사, 사령관님! 어,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누추하다 생각하지 않아. 내 고향은 이곳보다 더 열악했었으니까. 그보다 무슨 일이기에 노동자와 말싸움을 벌이고 있나?”
“아아. 그게 말입니다. 자꾸 저 녀석이 일당을 제대로 지급하라 난리이지 않습니까.”
중간 관리자가 남성을 흘겨보며 말하는 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일당을 제대로 지급하라고 주둔군이 널 중간 관리직에 임명한 걸 텐데. 대체 왜 일당을 온전히 지급하지 않는 거지? 이 자가 농땡이라도 피웠나?”
“예? 아니. 그건 아닙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왜 일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지.”
“사령관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 자는 흑인입니다.”
뭐?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는 통에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물었다.
“흑인이라서 일당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고?”
“예에. 그렇습니다. 애비가 노예 출신인 주제에 그 자식이 자유 시민 행세를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예로부터 왕국에서는 유색 인종은 3급 시민인 바…….”
내가 손을 들어 중간 관리자의 말을 제지하였다.
더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역겨운 소리를 잘도 하는군. 지금 제국의 군역을 지면서 왕국법을 들먹이는 것인가? 아니면, 신분과 인종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금한 황제 폐하를 능멸하려는 건가.”
중간 관리자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덜덜 떨던 중간 관리자는 급히 양손을 모았다.
“아닙니다!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저는, 저는 그저……!”
“더러운 입 다물어라. 너는 일당을 제대로 지급하라는 내 명령을 어긴 것에 모자라 황제 폐하께서 정한 지엄한 법률을 능멸하였다. 병사. 이 자를 포박해라.”
예! 힘차게 대답한 병사 두 명이 달려 나와 중간 관리자의 오금을 걷어찬다.
“커억!”
강제로 무릎을 꿇은 중간 관리자의 팔을 병사가 뒤로 꺾는다.
직후 포승줄을 꺼내 양 손목을 묶었다.
“사령관님! 크윽! 저는, 저는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중간 관리자가 애원하듯 외쳤지만 나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낮게 한숨을 내쉰 내가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흑인을 돌아보았다.
“너.”
정신을 차린 흑인이 급히 차렷 자세를 취한다.
자기도 포박을 당할 줄 알고 잔뜩 겁먹은 눈치였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저러고 있으니 평소에 얼마나 차별을 당했는지 알 만했다.
“지금부터 네가 이 구역의 중간 관리자다.”
“……예? 사, 사령관님. 제가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는 없습니다.”
“네가 누구기에?”
흑인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저 사람의 말이 맞습니다. 제 아버지는 노예 출신이고, 저는 자유 시민이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노예의 아들입니다. 거기다 유색 인종이니 차별을 받는 것은 당연한…….”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이던 흑인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다넬입니다.”
“좋다. 다넬. 나는 네가 유색 인종이고 아버지가 노예였다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네가 성실히 일을 수행했는데도 일당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지. 나는 지금 그걸 바로잡으려고 하는 거다.”
내가 다넬의 어깨를 붙잡았다.
“명령이다. 너는 오늘부터 중간 관리자로서 노동자들을 감독하고 일당을 제대로 지급하도록 해라. 또한 네게 부당한 항의를 하는 자가 있으면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해라.”
내 말을 들은 다넬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려는 것인지 이를 꾹 깨물던 다넬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령관님!”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내가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멈칫하였다.
나를 바라보는 간부들이며 병사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으니까.
어딘가 모르게 소름이 돋아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돌아가지. 날이 춥군.”
내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간부들과 병사들이 뒤따른다.
최대한 무시하려고 했는데, 뒤에서 간부들의 속닥거림이 들려왔다.
“사령관님은 정말이지 흠잡을 곳이 없군요.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심이 이리도 높을 줄은 몰랐습니다.”
“괜히 황제 폐하께서 사령관님께 보국훈장을 수여하셨겠나? 군인의 모범이나 마찬가지인 분이시다. 곁에서 따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게.”
글렌디 중사와 멕캘 중위였다.
“과연 다니엘 소령님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성자나 마찬가지네요. 솔직히 다른 제국인이라면 신경도 안 쓰고 넘어갔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루시 소위님?”
“응. 그 점은 확실히…….”
이건 프리엔과 루시였다.
루시가 말을 받아주자 신이 난 것인지 프리엔을 양손을 모으며 말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인종차별주의자랑 연합국 국민이거든요. 둘 모두 짐승에 가깝다는 점에서 말이에요.”
……얘는 자기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언제 알아차릴까.
*
한편, 비밀 결사 흑조의 아지트.
평범한 잡화점으로 위장한 건물의 3층에는 문자를 송수신할 수 있는 텔렉스(Telex)와 무전기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결사대 인원들이 이리저리 오가며 업무를 보는 가운데, 그들의 수장인 함탈은 책상 앞에 앉아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도시를 점령한 점령군 수괴다. 당연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야. 하지만…….’
시민들이 주둔군을 용인하기 시작했다.
분노로 들끓던 마음들이 다니엘 슈타이너의 도시 계획을 듣고는 점차 사그라들고 만 것이다.
그건 함탈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니엘이 내놓는 정책들을 보고 있노라면 ‘꼭 제거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타국 군대의 수괴인 이상…….’
언제 가면을 벗고 도시의 시민들을 핍박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제거하는 것이 현명하다.
마음을 굳게 먹은 함탈이 서랍을 열어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리볼버의 약실을 열어 잔탄을 확인하던 순간 익숙한 발걸음이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정체를 확인하자 어제 평의회에 정보를 전해줬던 타르키였다.
급히 뛰어온 것인지 헐레벌떡이던 타르키가 겨우 숨을 고르고 말했다.
“함탈님! 주둔군 측에서 시민들을 향해 새롭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 무슨 명령?”
혹여 시민을 핍박하려 든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타르키가 말문을 열었다.
“앞으로 도시 내에서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을 행하면 제국법에 따라 처벌하겠답니다.”
리볼버의 약실을 닫은 함탈이 멈칫하였다.
“……인종 차별을 금하겠다고?”
“예. 듣기로 제국 군역을 돕는 현지 중간 관리자 중 한 명을 흑인으로 임명했다고도 합니다.”
타르키의 말을 들은 함탈은 저도 모르게 리볼버를 떨어트렸다.
‘말도 안 돼…….’
함탈은 지난 십 년간 노르디아 귀족 계층으로부터 내려오는 인종 차별을 없애고자 하였다.
애초에 인종 차별에 반발하여 창립한 것이 바로 이 비밀 결사 흑조였다.
하지만 함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거 정치인을 매수하여 시장 자리까지 올리는 것에 성공했었지만, 시장이 된 그는 흑조와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독선적인 행보를 이어갔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함탈은 좌절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 계속해서 싸워나갔다.
‘그럼에도 차도가 보이지 않았는데…….’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숙원을 다니엘 슈타이너가 이루어준 것이다.
미증유의 감정이 마음속에 가득 들어오며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미간을 찌푸린 채 거친 호흡을 내쉬던 함탈이 손을 들어 안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소식을 전해줘서 고맙네. 아무래도 다니엘 슈타이너가 어떤 인물인지 직접 확인해야 할 것만 같군.”
“……정체를 드러내시겠다는 겁니까?”
“아니. 그저 곁에서 지켜만 볼 것이다. 그가 보여준 정책들이 도시의 민심을 달래고자 함에서 나온 일시적인 기만인지 아닌지를 파악해야 하니까.”
일시적인 기만이라면 당연히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행보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후자일 경우 다니엘 슈타이너는 도시를 지배하러 온 정복자가 아니라…….’
도시를 왕국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려는 구원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