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을 받은 이상 싸워야 하는 게 군인이다.
그 ‘군인’의 카테고리 안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기에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결국 나는 뒤늦게 도착한 내 중대를 이끌고 여단의 후속 부대로서 적진을 향해 진군할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터널을 손전등에 의지한 채 전진하다가 빛이 새어나오는 천장을 발견, 그곳을 통해 터널 밖으로 나오자 적들의 보급 기지가 펼쳐졌다.
여러 보급 물자들이 쌓여 있는 거대한 창고 같은 곳이었는데, 창고를 지키던 왕국 병사들은 모두 총알을 몸에 박은 채 싸늘한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먼저 돌입한 여단 병사들의 작품으로 보였다.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중대의 간부들과 병사들이 차례차례 올라온다.
“이런. 화려하게도 축제를 벌였군요.”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멕캘 중위였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인 다음 활짝 열려 있는 창고의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어두침침한 조명의 빛이 아니라 광활한 햇빛이 사방을 환히 밝힌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자 창고 안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기지를 지키고 있던 연합군의 병사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제국군 병사들의 시체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불시의 습격이라고는 해도 이렇게나 실력의 차이가 날 줄이야.
왕국군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노골적으로 혀를 차고 있으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쾅!’ 하고 포격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도심에 포격세례가 떨어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무차별 포격은 아니었다.
민간에는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적의 군사기지들만 집중적으로 타격하고 있었으니까.
현 제국이 전시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다만 제국의 병사들까지 전시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보급기지의 열린 문 너머로 제국의 병사들의 왕국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있는 게 보인다.
몇 건물들에서는 창문이 깨지며 왕국의 병사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시가전인데도 거의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적들을 제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제국의 정예라 불리는 마도기동군이라 이건가…….’
내심 감탄하고 있을 무렵 연갈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가 내 옆에서 멈춰 선다.
프리엔이었다.
“참혹한 광경이네요.”
웬일로 얘가 옳은 소리를 하는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들도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짐승과 손을 잡으면 똑같이 짐승이 된다는 것을 어찌 몰랐을까요?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들의 과오는 슬프기 그지없네요.”
그래. 네가 옳은 말을 할 리가 없지.
프리엔을 마뜩잖게 바라보고 있으니 이번엔 멕캘 중위가 입을 열었다.
“작전의 개요를 듣고 낙승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리도 압도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죄책감마저 드는군요. 마치 어린애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멕캘 중위의 농담에 글렌디 중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완벽한 비유십니다! 그보다 적의 보급 경로를 역이용해 침투할 생각을 하다니, 중대장님은 정말 전장을 몇 수는 앞서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하하하! 겸손함까지 갖추셨으니 제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그보다 이제 여단의 병사들과 합류하는 겁니까?”
미친 건가? 지금 저 포화가 넘실거리는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서 싸우겠다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싶어서 돌아봤더니 기대감으로 가득 차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글렌디 중사뿐만 아니라 다른 간부들과 병사들 또한 당장이라도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다는 얼굴이었다.
시종일관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루시가 정상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전쟁광들 같으니라고…….’
소름이 돋을 정도다.
다들 전투를 원하는 것 같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들의 요청을 들어줄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우리는 해안으로 간다.”
해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프리엔이 말문을 열었다.
“다니엘 대위님? 아군의 양동 공격으로 인해 적들은 모두 전선 혹은 도시의 중심부에 몰려 있지 않나요? 해안쪽은 지금 시민들의 대피 행렬이 이어지고 있을 텐데요.”
“……설마 시민들을 공격하자는 겁니까?”
날 뭘로 보기에 저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걸까.
해안으로 가자는 건 단순히 그곳에 있는 적들의 수가 가장 적을거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어차피 전투를 피할 수 없다면 교전이 가장 적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물론 이걸 설명했다가는 이 비상식적인 전쟁광들에게 무슨 비난을 들을지 몰랐으니 대충 넘어가기로 하였다.
“계획이 있으니 군소리 말고 따라오도록 해라.”
사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계획’이라는 게 부대원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의 단어라서 내뱉은 것이다.
예상대로 프리엔을 비롯한 간부들은 알겠다는 의미로 내게 경례를 척 올렸다.
‘좋아.’
그럼 이제 전쟁은 여단의 병사들에게 맡겨놓고 나는 해안가에서 바다나 보며 시간을 때우면 그만이었다.
“전 병력은 즉시 나를 따라 해안으로 이동한다.”
본심을 숨긴 내가 침착하게 명령을 내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
“전선이…… 전선이 뚫렸다고 합니다!”
“도시 중앙군과도 연락 두절입니다!”
도주 중인 왕국군 철갑사단 사단장 라푸나이의 귀에 패전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리도 급진적으로 도시가 함락당할 줄은 몰랐다.
이를 꽉 깨문 라푸나이가 무전병을 노려보며 말했다.
“최대한 위치를 사수한 채 제국군의 공격에 버티라고 명해라.”
“하지만 그래서는 병력의 피해가…….”
“명령이다! 우리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야 또 한번의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병사들은 얼마든지 징집할 수 있지만 군 지도부가 몰살당하면 빈자리를 채우기 힘들다는 것이 라푸나이 소장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그 지론은 유사시에 자신이 전장에서 이탈하기 위해 형성된 일종의 방어기제와도 같았다.
콰앙─
포격으로 인해 지면이 흔들리면서 다리가 휘청거린다.
넘어질 뻔한 라푸나이는 가까스로 무게 중심을 되찾으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젠장!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한다는 말이냐!”
라푸나이가 닦달하자 옆에 있던 영관급 장교가 입을 열었다.
“골목길만 돌면 곧 접선 지점입니다! 대피선은 어선으로 위장을 해놓았기에 제국군의 공격에서 안전할 겁니다.”
장교의 침착한 설명에 라푸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시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시민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소리고, 어선으로 위장한 채 시민들의 피난 행렬에 합류한다면 손쉬운 도주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사단장님. 정말 대피하실 겁니까?”
지도부를 잃어버린 왕국군은 바람 앞의 촛불과 다름이 없었다.
장교는 그걸 염려해서 한 말이었지만 라푸나이는 화가 날 뿐이었다.
“포위를 당한 시점에서 우리는 이미 전쟁에서 졌다! 그나마 보급선이 살아 있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놈들은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들이닥쳤어!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승산은 없습니다만 결사항전을 각오하고…….”
“헛소리하지 마라! 패배할 전장에서 후퇴하지 않는 것은 바보 천지나 할 짓이다!”
라푸나이의 후퇴에 병사들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사단장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 장교는 입을 다물 뿐이었다.
장교를 한 번 노려본 라푸나이는 골목을 돌았고, 골목 너머로 펼쳐지는 해안선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대피선에 탑승할 수 있다.
드디어 살았다고 생각한 라푸나이와 그 일동들은 골목을 나서자마자 멈칫하고 말았다.
“어?”
검은색 군복을 입고 있는 제국군의 군대와 마주치고 만 것이다.
제국군 병사의 숫자는 약 200명.
그들을 위시하고 있는 제국군 장교의 가슴팍에는 국선장 금장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걸 본 라푸나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라푸나이가 호위를 목적으로 데려온 정예병의 숫자는 기껏해야 50명이 넘지 않는다.
숫자가 많아지면 적의 눈에 발각될 확률이 높아지는 걸 염려했던 탓이다.
어찌 되었든 이대로 전투에 돌입하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 자는 대체 어떻게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인가?
감청을 생각해서 통신도 주고받지 않은 라푸나이의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게 당연하였다.
중대를 거느리고 있는 다니엘의 마음속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철갑 사단의 군 수뇌부가 왜 여기에?’
단순히 전투 회피를 목적으로 해안가에 돌입한 다니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철컥─
일제히 소총을 들어 올린 제국군의 병사들이 철갑 사단의 군 수뇌부를 겨눈다.
글렌디 중사 또한 병사들과 함께 소총을 겨누면서 말했다.
“중대장님. 계획이라는 게 이걸 노린 거였습니까? 이제는 감탄을 넘어서 무서울 지경입니다.”
무서운 건 다니엘 또한 매한가지였다.
또 군공을 쌓게 될 거란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저 자들을 포박해라.”
멈칫하는 철갑 사단의 군 수뇌부들을 향해, 다니엘이 두 눈을 날카롭게 좁혔다.
“반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상관없다.”
다니엘의 싸늘한 말소리에 왕국군 병사들은 전의를 잃은 채 하나 둘 총을 떨어트렸다.
노르디아가 함락당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시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