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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7 - Chapter 37

다음날 이른 아침.

군막의 입구를 통해 루시가 들어온다.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님. 긴히 드릴 말씀이…….”

루시는 군막 안으로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군막의 가장자리에서 야전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다니엘이 보였기 때문이다.

모포를 대충 덮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다른 병사들과 간부가 전초기지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할 때, 다니엘은 사단장의 호출로 인해 강제로 작전 지휘소로 끌려갔다가 돌아왔으니 피곤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다니엘 슈타이너는 무방비 상태라는 소리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루시가 다니엘을 향해 다가간다.

그러며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 다니엘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가 입고 있는 제복의 왼쪽 가슴에 부착된 국선장 금장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다니엘 슈타이너.’

최근 무서울 정도로 군공을 쌓고 있는 것이 바로 눈앞에 있는 남자였다.

덕분에 연합국 내부에서도 다니엘에 대한 관심이 차츰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연합국에서는 다니엘 슈타이너를 암살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그저 특별 감시 대상으로서 다니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라는 것이 루시가 연합국에게 부여받은 임무였다.

그러나 특별 감시 대상이 언제 암살 대상으로 바뀔지는 모를 일이었다.

만약 본국에서 다니엘을 암살하라고 명령한다면 루시는 기꺼이 따를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과연 망설임이 없을 수 있을까.

다니엘 슈타이너는 제국을 위해 헌신한다는 점을 빼면 평범하게 좋은 남자였다.

부관인 자신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거나 우산을 빌려주고, 취미를 공유하기 위해 디저트 가게에도 같이 가자고 권할 정도였으니까.

심지어 의사로 변장을 했던 날에는 보안국 경찰에게 의심을 받아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사전에 막아주기도 하였다.

다니엘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연합국의 은혜로부터 비롯된 스파이로서의 멍에를 미약하게나마 흔들리게 만든다.

‘만약…….’

연합국의 스파이와 제국군의 장교가 아니라 평범한 직업을 가진 남녀로서 만남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맥락 없는 상상을 이어가던 루시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쓸데없고 비생산적인 가정이었다.

연합국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한다면 스파이의 본질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면 안 될 일이다.

더구나 좋은 남자로 보이고 있다고 해도 다니엘 슈타이너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장교.

제국을 이롭게 만드는 이는 연합국의 적이자 루시가 가진 원한의 편린이었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루시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곧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혼자 궁상을 떨다니 미련한 짓이었다.

‘바보 같아.’

깊게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평소처럼 주어진 임무와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될 일이니까.

그러니 연합국에서 다른 명령이 내려오기 전까지는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의 충실한 부관’으로서 활동하면 그만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에 답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인 루시가 발길을 돌린다.

루시는 그대로 군막을 나가려다 말고 멈칫하였다.

다니엘의 몸을 덮고 있는 흐트러진 모포가 왜인지 모르게 거슬렸던 것이다.

결벽의 일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 망설이던 루시는 결국 몸을 숙여서 모포를 들었다.

이후 다니엘의 가슴팍까지 모포를 깔끔하고 반듯하게 덮어준 다음 가볍게 손을 턴다.

“편히 주무시길.”

속삭이듯 짧게 말한 루시가 몸을 돌려 군막을 나간다.

루시가 완전히 나간 후에야 다니엘은 스르르 눈을 떴다.

루시가 군막 내부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니엘이 상체를 확 일으켰다.

그러며 저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쉬었다.

‘……뭐였지?’

사실 다니엘은 조금 전부터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잠에서 깼는데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슬쩍 실눈을 떴더니 루시가 내려다보고 있어서 계속 자는 척을 한 것이다.

이유는 별 거 없다. 그냥 무서웠으니까!

‘나 살아 있는 거 맞지?’

손을 들어 목을 더듬은 다니엘은 상처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야전 침대에 앉은 채 얼마간 숨을 돌리던 다니엘의 신경이 곤두선다.

군막 근처에서 지프 차량 두 대가 정차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군홧발 소리가 우르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엔 뭔가 싶었던 찰나에 군막 안으로 병사 4명이 척척 들어오더니 양쪽으로 갈라선다.

그 직후 중후한 인상의 하인리히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군막 안으로 들어왔다.

“아. 일어나 있었군.”

흠칫 놀란 다니엘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렸다.

“여단장님! 이곳에는 무슨 일로……!”

허허 웃은 하인리히가 경례를 받아주면서 말했다.

“축하하네. 다니엘 대위.”

“……축하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의 예측이 또 한 번 맞아떨어졌어. 몇 시간 전에 수색대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네. 왕국군의 지하 터널을 발견했다고 말이야.”

순간 다니엘은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지하 터널을 발견했다고? 그것도 내가 의견을 말한 당일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 확률은 한없이 낮았다.

그 낮은 확률을 뚫고 왕국군은 실제로 지하 터널을 이용해 보급을 하고 있었고, 그걸 수색대대는 하룻밤만에 찾아내는 쾌거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어서 정신이 멍해지는 찰나에 하인리히가 손짓하였다.

“일단 이야기는 가서 하도록 하지. 지금은 한시가 바쁘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이 제대로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상관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었기에 다니엘은 하인리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하인리히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적 보급대대가 발견된 곳으로부터 북측으로 18km 떨어져 있는 숲 속의 평지였다.

지프 차량에서 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마도기동군 여단의 병사들이었다.

군장을 제외한 모든 장비를 착용한 채로 나무들 사이에서 미동도 없이 도열해 있는 모습은 가히 철의 군대라 할만하였다.

그들이 뽐내는 위압감에 굳어 있으니 하인리히가 내 어깨를 붙잡는다.

“바로 저기네. 자네가 말한 왕국군의 지하 터널 말일세.”

시선을 돌려 하인리히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커다란 철제 문이 개방되어 있었다.

“정찰에 능한 수색병을 보내 확인했더니 저 지하 터널이 도시까지 연결되어 있다더군. 놀랍지 않나? 자네가 아니었다면 우린 저게 있었다는 것도 몰랐을 거야.”

하인리히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나는 얼떨떨할 뿐이었다.

무어라 반박이라도 하려고 입을 벙긋거린 순간 사단 사령부 쪽에서 ‘콰앙’하고 포격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작됐군.”

내 어깨에서 손을 뗀 하인리히가 여단의 병사들을 향해 외친다.

“나는 방금 승리의 여신이 진격하라 함성을 내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제군들 또한 귀가 있다면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인리히의 외침에 병사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돈다.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왕국군은 더러운 연합군의 손을 잡아 우리의 영토를 침공하고 수많은 전우들을 희롱하였다. 생각하라! 전우들이 내질러야 했던 비명을! 감내해야 했던 고통을! 버텨내야 했던 수치를!”

한 발 앞으로 나간 하인리히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친다.

“이제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배로 되돌려 줄 것이다! 전우의 피를 마셔 탐욕스럽게 부어오른 적들의 배를 터트려라! 진격하라, 제국의 정예들이여!”

여단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른다.

그와 동시에 차례차례 지하 터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열 종대를 이루며 터널 안으로 척척 들어가는 모습들은 가히 기계적이었다.

훈련이 잘 된 병사라는 방증이기도 하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내가 하인리히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양동 공격이군요. 전선에서 사단의 병력을 진군시키고 야포를 쏘는 것으로 적들의 시선을 붙잡아 놓은 다음 지하 터널을 이용해 도시를 직접적으로 타격하면…….”

“낙승이겠지. 전면전에 이르면 패배할 게 명확해서 여태 숨어지내던 놈들이니, 도시에 적군이 침투했다는 걸 깨달으면 공포심에 잡아먹혀 패닉에 이를 걸세.”

과연, 이것으로 도시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원하던 방향의 그림은 아니었지만 병사들이 돌입하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내가 참모라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참모를 적진 한복판에 보내지는 않을 테니까…….’

제국 탈출보다는 목숨 부지가 최우선인 게 당연하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다음 기회도 있는 법이니까.

내심 안도하며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으니 하인리히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병사들이 부러운 눈치인 모양이군? 자네처럼 제국에 헌신적인 장교라면 직접 적을 분쇄하고 싶을 테니까 말이야. 내 젊을 적에도 그런 투지가 넘쳐흘렸었지.”

전혀 아니었지만 맞장구를 치지 못할 건 없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참모로서 아군의 등 뒤편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아쉽지만 적을 공격하는 영광은 병사들에게 남겨둬야겠지요.”

“좋은 마음가짐이군.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굳이 뒤에서 방관할 필요는 없네. 아니, 방관할 수 없다는 게 맞겠군.”

잠깐만? 대화의 흐름이 이상한데.

내가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하인리히가 기뻐해도 좋다는 듯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사단장님께서 자네를 포함한 본부 직할 부대 전체에게 마도기동대를 도와 도시 습격에 가담하라 명령하였네.”

“……예? 하지만 제 중대가 참전해봤자 민폐가 될 뿐입니다.”

“사단장님도 처음에는 자네와 같은 생각이었지. 하지만 자네와 대화를 나눠보시고는 생각을 완전히 바꾸셨네. 나와 둘만 있을 때 사단장님께서 말씀하시더군. 자네는 피에 굶주린 늑대라고 말이야.”

멍하니 입이 벌어진다. 무슨 헛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해줄 테니 어디 한 번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 전해달라더군.”

“……저한테 하신 말씀이 맞으십니까?”

“그래. 사단장님께서 호의를 보이는 건 흔치 않으니 이번 기회에 자네를 증명하도록 하게.”

대체 나를 뭘로 보고 저런 황당한 소리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어쩔 수가 없었다.

짧게 침음을 흘린 내가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단장 각하. 그런데 정말 사단장님께서 저를 피에 굶주린 늑대라고 하셨단 말입니까?”

“응? 하하. 그 별명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군. 농담조이긴 했지만 틀림없이 그리 말씀하셨네.”

덕분에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인생이 실시간으로 꼬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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