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들을 이끌고 전초기지의 사단사령부에 도착한 다니엘은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의무대에 보내고 짐을 풀었다.
한숨을 돌린 다니엘은 몸에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장교용 보급 술(위스키)을 한 잔 하려고 하였으나 시기가 여의치 않았다.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님? 사단장님의 호출입니다.”
휴식을 취할 새도 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은 사단장 부관을 따라서 임시 작전 본부로 향했다.
외관은 멀쩡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복도에 돌 부스러기들이나 나뭇조각들이 방치된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언뜻 호텔을 연상시키는 참모 본부의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복도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하긴 원래 이곳에 있었던 왕국군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점거한 것이니…….’
청소가 덜 되었다고 불만을 표시할 순 없었다.
애초에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청결을 요구하는 것은 미친놈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임시 작전 본부에 몇 가지 감상을 남기며 걸음을 옮기던 다니엘은 삼층의 작전 지휘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관이 노크를 하며 다니엘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부관이 문을 열어주었고, 다니엘은 문 너머로 각탁의 상석에 앉아 있는 펠데라함 소장을 볼 수 있었다.
넓은 각탁이 작게 보일 정도로 큰 몸집을 가지고 있는 펠데라함이 굵은 눈썹을 치켜뜨며 다니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체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인데 각탁에는 펠데라함 이외에도 수많은 고위 장교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가장 계급이 낮은 장교가 소령이다.
그야말로 사단사령부 내부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두 모여 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괜히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눈이 마주친 하인리히가 슬며시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거북할 뿐이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지휘소 안으로 걸음을 옮긴 후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렸다.
“사단장 각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낮게 웃음을 흘린 펠데라함이 경례를 받아주었다.
“그래. 무전병의 보고가 정확한지 교차 검증을 하기 위해 불렀네. 보고에 따르면 자네가 적 보급대대를 공격하여 135명을 사살하고 192명을 포로로 잡았다던데. 사실인가?”
열중쉬어로 자세를 변경한 다니엘이 정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은 그만두게. 운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으니까 말이야. 그보다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 적의 보급 경로를 알아낸 바가 있나?”
보급 경로? 단순히 보급대대를 중간에 붙잡았을 뿐이지 그 경로까지는 알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각하. 경로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자네가 붙잡은 보급대대의 대대장을 심문하여 알아낼 가능성은?”
“대화를 나눠보니 심지가 굳은 인간입니다. 아마 강도 높은 고문을 한다고 해도 정보를 발설할 확률은 낮아 보입니다.”
다니엘의 대답에 곳곳에서 침음이 들려온다.
적의 보급 경로를 알아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판국에 다니엘의 대답은 실망을 안겨주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의 그 누구도 감히 다니엘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이룩한 공훈은 실망스러운 말 몇 마디로 가려질 수 없을 정도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솔직해서 마음에 드는군. 입만 산 다른 참모들보다 훨씬 나아.”
각탁의 인원들을 한 번 돌아본 펠데라함이 다시금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다니엘 대위. 자네가 예상하는 적의 보급 경로가 있다면 한 번 말해주게. 추측이라고 해도 상관없네. 모든 방향에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으니 말이야.”
좌중의 시선이 다니엘에게 집중된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다니엘은 생각했다.
‘잠깐만. 내가 여기서 헛소리를 하면…….’
단순히 사단장 한 명을 실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영관급 장교 모두에게 안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
그야말로 고과 평가를 나락으로 처박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던가?
이만한 기회는 없다. 심호흡을 한 다니엘이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었다.
“지하 터널…… 즉, 땅굴입니다.”
적의 보급 경로가 지하 터널이라는 소리에 지휘소가 술렁인다.
그들 중 연대장으로 보이는 대령이 한 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보게. 다니엘 대위. 농담이 지나친 것 아닌가? 자네가 보급대대를 공격한 지점부터 노르디아까지의 거리는 약 58km에 달하네. 그렇게나 긴 터널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지하 터널이 있을 수는 있어도 그 정도로 긴 터널이 형성되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베트남 군인들이 250k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을 만들어 냈다는 걸 알면 아마 까무러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베트남전을 겪어본 적 없는 이들에게 있어 초장거리 지하 터널이란 생소함을 넘어 미지의 영역이었다.
“상식적으로 58km에 달하는 지하 터널이 존재한다는 건 믿기 힘듭니다!”
“하지만 적들은 해상 지원도 항공 지원도 받지 않은 채로 물자를 수급하고 있네. 우리의 견고한 포위망을 뚫고 말이야! 지하 터널이라면 모두 설명이 가능해!”
“포위가 아무리 견고해도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곳을 통해 왕래하고 있다는 게 보다 현실적입니다.”
각탁의 장교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기 시작한다.
본의 아니게 싸움을 부추긴 다니엘은 멋쩍게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점차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펠데라함이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그만. 다니엘 대위의 말을 더 들어보도록 하지. 적의 보급 경로가 지하 터널이라고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없다. 하지만 지어내려면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었다.
“적들은 모두 경무장 상태였습니다. 마치 적을 조우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포위를 뚫고 보급을 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하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경무장을 하고 있는 적들은 모두 하나같이 휴대용 손전등을 착용하고 있더군요. 어두운 곳을 보다 빠르게 지나가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손전등을? 병사가 휴대용 손전등을 들고 다니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지만, 왕국군의 보급부대 기본 복장에는 휴대용 손전등이 들어가지 않는다.
“음.”
의아함이 들었던 펠데라함이 각탁을 툭툭 두드리자 다니엘이 말했다.
“만약 적들이 지하 터널을 이용해 보급을 한 게 맞다면 지금 즉시 수색 작전을 명령하셔야 합니다. 이건 명백한 호기(好機)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보급대대를 제압한 후 부대를 살펴본 결과, 그들에게는 무전기가 있었지만 배터리를 모두 빼놓은 상태였습니다. 아마 감청을 피하고자 한 행동으로 보입니다.”
제국 정보부에서 왕국군의 통신을 장악한 것은 이곳에 있는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왕국군의 암호문 또한 완벽하게 해석하는 것에 성공했기에, 왕국군은 현재 통신을 극도로 꺼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렇다면 이게 왜 기회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펠데라함은 야트막한 깨달음을 얻었다.
‘적들의 보급 경로가…… 우리들의 침공 경로가 될 수 있다!’
전장에는 온갖 변수가 존재하기에 보급이 하루 이틀 지체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늦으면 일주일 정도로 보급이 늦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보급대대가 통신을 꺼린 이상 노르디아의 철갑 사단은 병참 본부에서 ‘보급 지원이 출발했다’라는 간단한 소식밖에 알고 있지 못할 터.
그렇다는 건 보급대대가 적에게 공격당했다는 것 또한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 간극을 이용하여 지하 터널을 찾아 마도기동군 여단을 보내고, 남아 있는 사단의 전 병력을 노르디아를 향해 진군시킨다면?
‘……함락이다!’
그 견고한 노르디아가 너무나도 손쉽게 함락당하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안팎으로 적의 공격에 노출된 노르디아 철갑 사단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백기를 들 것이 분명하였다.
실로 악마 같은 전술에 펠데라함은 전율하였다.
흥분하여 손을 떨던 펠데라함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전술은 완벽하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의 문제다.’
다니엘 슈타이너의 말이 모두 맞아떨어져야만 실현 가능한 전술이란 소리였다.
솔직히 대위에 불과한 참모의 말을 모두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번 판돈을 걸어볼 만한 사안이었다.
“……좋다. 다니엘 슈타이너 대위. 자네의 말을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 수색대대를 포함한 가용 가능한 모든 인원들에게 적 보급대대가 위치했던 곳 인근을 샅샅이 수색하라 명하겠다.”
“각하의 믿음을 얻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니엘은 진지하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지하 터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솔직히 말해 다니엘은 각탁에 있는 대부분의 장교들과 의견이 비슷하였다.
초장거리 지하 터널을 이용해서 보급을 한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았다. 명백한 비상식이었다.
포위망의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길 이용해서 적이 육로로 보급을 한다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다.
‘만에 하나 지하 터널이 있다고 해도…….’
왕국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철저하게 숨겨놓았을 테니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제국군에 혼선을 일으킨 주범이 될 테고…….’
고과는 나락으로 치달을 것이며 손쉽게 사단장의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얻어걸린 ‘유능함’을 ‘무능함’으로 덮을 수 있게 된다.
운이 좋으면 군복을 벗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다니엘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본 펠데라함이 헛숨을 들이켰다.
‘웃고 있다고? 자신에 내놓은 작전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나 높단 말인가.’
유능한 참모들도 자신들의 추측이 빗나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보통인데 다니엘은 오히려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것도 작전 성공시 펼쳐질 적군의 학살을 논의하면서 말이다.
덕분에 펠데라함은 다니엘에 대한 자신의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느꼈다.
‘본부의 엘리트 참모? 제도의 영웅?’
웃기지도 않는 이명이다.
다니엘을 응시한 펠데라함이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펠데라함이 볼 때, 다니엘 슈타이너는 피에 굶주려 있는 훌륭한 전사였다.
*
늦은 밤.
사단사령부 예하 수색대대.
“근처에 지하 터널이 있는 거 맞아?”
“모르겠다. 까라니까 까야지.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수색대 병사들이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사령부에서 갑자기 적 보급대대가 붙잡힌 곳 일대를 수색하라 명령하였기에 벌써 6시간째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지하 터널은커녕 동물들이 파놓은 땅굴도 발견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대체 이 바보같은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싶었을 무렵이었다.
쿵…….
땅이 아닌 철판을 밟았을 때 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뭔가 싶어서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나뭇가지와 수많은 잎에 덮혀 있어서 뭘 밟은 건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뭐야? 왜 멈춰?”
“아니. 방금 못 들었어? 나 뭘 밟은 거 같은데. 지, 지뢰 아니야?”
“뭐? 시발! 잠깐만 기다려. 발 떼지 말고!”
총을 뒤로 맨 병사가 무릎을 꿇어서 동료 발 주변의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을 치운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지뢰가 아니라 철로 된 거대한 문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병사들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가 뒤로 물러났다.
“이거 설마…….”
침묵 속에서 의견을 모은 두 사람은 철문에 튀어나와 있는 손잡이를 잡고 열어보았다.
그러자 깜깜한 내부가 펼쳐진다.
“플래시. 플래시 켜봐.”
고개를 끄덕인 병사가 손전등을 들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딸깍─
빛이 부채꼴로 펼쳐지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비춘다.
동시에 병사들은 놀란 채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건…….”
사단 사령부에서 찾으라고 했던, 왕국군의 지하 터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