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들은 글렌디 중사는 충성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병사들에게 돌아가 명령을 하달하였다.
중대장님이 엄청난 선견지명을 발휘했다는 헛소리를 덧붙이면서 말이다.
명령을 들은 병사들이 비장한 얼굴로 전투 준비에 임하는 사이, 나는 멕캘 중위와 함께 인근 언덕을 올랐다.
멕캘 중위가 보고한 사실이 확실한지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역시 다니엘 대위님이세요. 모든 행동에는 항상 계획이 동반되어 있으시군요.”
……어째서인지 프리엔이 따라오기는 하였으나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프리엔이 재잘거리는 걸 무시하며 언덕의 정상에 오른 나는 멕캘 중위에게서 망원경을 건네받았다.
“저쪽입니다. 중대장님.”
멕캘 중위가 가리키는 곳으로 망원경을 돌리자 조금 먼 곳의 공터가 보인다.
그 공터에서 왕국군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착실하게 야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망원경의 배율을 확대한 후 주변을 한 번 살펴보았다.
온갖 물자들이 쌓여 있는 운송 차량들이 몇 대 보인다.
그 안에는 식량, 연료, 탄약, 의료 및 군용 장비, 무전기와 배터리는 물론이고 방어선 구축을 위한 철조망, 모래주머니, 지뢰와 콘크리트 또한 한가득이었다.
‘……보급부대가 맞군.’
병사들은 대략 300명을 웃돌고 있었다. 대대급 규모란 소리다.
‘그런데…….’
저정도의 대규모 물자라면 최소 여단에서 최대 사단급의 보급에 해당된다.
내가 알기로 이 근처에 그정도의 규모로 밀집해 있는 왕국군의 군대는 해안 도시의 방위를 맡고 있는 철갑 사단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은 제국군이 이미 포위망을 형성한 곳인데 어떻게 보급을 하겠다는 거지?
의아함이 들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망원경을 내려놓은 내가 멕캘 중위를 돌아보았다.
“전투에 익숙한 이들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나.”
“예. 계급을 보면 신병들이 대부분입니다. 고참병들은 최전선에 나가 있거나 대부분 전사하였으니 왕국군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요리하기가 한층 편하겠군. 프리엔 생도?”
프리엔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조금 부담스럽다.
“……성악을 했다고 했었지?”
“네. 어렸을 때는 성가대에서 활동했었으니까요. 솔리스트로 뽑히기도 했답니다.”
솔리스트라면 성가대 내에서도 탁월한 노래 실력과 기교를 갖춘 사람이었다.
하긴 미래의 프리엔은 노래에 마력을 실어 병사들을 강화하는 기예를 부리는 수준까지 가게 되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프리엔에게 그런 기예를 보여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
프리엔 본인도 자신의 능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것들을 이용하여 전투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투라면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맞겠지.’
그게 내 생존으로 직결될 테니까.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린 내가 프리엔의 어깨를 붙잡았다.
“프리엔 생도. 이번 습격에는 네 역할이 아주 막중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날 믿어주겠나?”
기만 전술을 쓰기에 프리엔만한 인재가 없었다.
프리엔은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곧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네! 대위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
새벽.
전우들과 함께 경계를 서고 있던 왕국군 군인 탈리암은 하품을 하다 말고 멈칫하였다.
숲 저편에서부터 은은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노랫소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대체 뭔가 싶어서 노래가 들리는 쪽을 응시하던 탈리암은 급히 총을 들어올렸다.
“제국군이다!”
탈리암의 외침에 경계를 서던 다른 병사들까지 총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들이 발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혼자 있잖아? 거기다 무기도 없이…….”
눈을 감은 채 노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는 여자는 분명 제국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제국군이었다.
하지만 군복의 이곳저곳이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으며 끝자락은 찢어져 있었다.
“탈영병인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노래 한 번 기가 막히네.”
프리엔을 성악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런 프리엔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신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오락거리가 전무한 군인들에게 있어서 그건 꽤나 자극적이었다.
어느새 총구를 내린 병사들은 프리엔의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몇몇은 총을 내려놓은 채 팔짱을 낄 정도였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할만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적은 무기도 없는 연약한 여자 한 명이다.
거기다 탈영병으로 보이는 여자 말이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보초병들은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 생각나네. 어렸을 때 부모님 따라 교회에 가면 항상 저런 찬송가가 들렸었는데.”
“그러게. 전쟁이 빨리 끝나야 고향으로 돌아갈 텐데. 망할 제국군 새끼들…….”
“그런데 저 여자는 어떻게 하지? 제 발로 걸어온 걸 보면 망명이라도 할 셈인가.”
“몰라. 대대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맛이라도 한 번 볼까? 생긴 거 꽤 괜찮아 보이는데.”
병사들이 프리엔의 처우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며 낄낄거리는 사이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탈리암 또한 다른 병사들처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숲이 원래 저렇게 어두웠나?’
야영지로 다가오는 여자의 뒤편이 이상할 정도로 어두웠던 것이다.
보통 희미하게 윤곽은 보여야 정상인데 마치 장막에 가려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의아하게 느낀 탈리암이 앞에 있는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전방 시야가 너무 어두운데.”
그러나 병사는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탈리암. 이 쫄보 새끼야. 너는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오늘 먹구름 때문에 달이 가려졌잖아. 그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어두운 거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보초를 한 두 번 선 게 아니었으니까.
슬슬 불안감을 느낀 탈리암이 병사들을 둘러보았으나 다들 고향 이야기며 여자 이야기에 푹 빠져 있을 뿐이었다.
그 무렵 야영지 바로 앞까지 도착한 프리엔이 노래를 끝마쳤다.
덕분에 이야기를 나누던 보초병들의 시선이 프리엔에게 집중된다.
“연합군의 손을 붙잡은 왕국군 여러분.”
감미로운 목소리를 흘린 프리엔이 미소를 지었다.
“부디 지옥으로 떨어지시길.”
그 순간 프리엔이 등 뒤편에 장막처럼 흩뿌려놓았던 마나를 일제히 거두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것은, 이백 명에 달하는 제국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잘 정돈된 자세로 왕국군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
그제야 탈리암은 깨달았다.
프리엔이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시켜 성악을 부른 것은 어디까지나 이백 명에 달하는 병사들의 발소리를 숨기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잘못은 언제 깨달아도 늦는 법이었다.
탈리암을 비롯한 보초병들이 당황해서 얼어붙어 있는 사이, 제국군을 위시한 다니엘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국군들의 총구에서 수많은 섬광이 번쩍였다.
*
타다당─! 타앙!
총성 소리에 보급대대 중령 헨리 푸에르가 눈을 번쩍 뜬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보고를 하러 들어오는 부관은 없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총성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허, 허억……!”
그제야 정신을 차린 헨리는 허겁지겁 군복을 입고는 권총을 들어 지휘 막사 밖으로 나왔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 헨리는 막사 밖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과 연기가 사방에 자욱하게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검은색 군복을 입은 제국군들이 야영지를 점거하고 있는 게 보인다.
총성을 듣고 급히 군용 텐트에서 나오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제국군의 총에 맞아 단말마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급사할 뿐이었다.
“이, 이게 대체…….”
제국군에게 보급 경로가 들켰다고? 어떻게? 왜?
충격적인 상황에 머릿속이 정리가 되질 않는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헨리는 지휘 막사를 향해 다가오는 한 명의 남자를 발견하였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이는 가운데, 고고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은 검은 머리를 가진 제국군의 장교였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외형이다 싶었던 헨리는 장교의 가슴팍에 착용되어 있는 국선장 금장을 보고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제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두려움을 느낀 헨리가 권총을 들어 다니엘을 겨누었다.
“다가오지 마라! 이 괴물 자식아!”
다니엘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로 대치한 채 가만히 있던 와중에 다니엘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절 죽이고자 한다면 쏘십시오.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쏘라고 하면 못 쏠 것 같나!?”
“아니요.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를 죽인다면 당신의 병사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헨리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다니엘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지휘계통을 잃은 제국군은 고삐 풀린 망아지와 다름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왕국군 모두를 죽이려고 들 겁니다. 하지만 그 끔찍한 미래를 우리는 바꿀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들려온다.
“대대장님. 지금 당장 항복을 명령하십시오. 그럼 저도 공격을 멈추라 명하겠습니다. 부디 부하들을 생각하십시오. 그들의 가족이 나눠가질 슬픔을 떠올리셔야 합니다.”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을 때 결정하라.
그 뱀과 같은 말솜씨에 헨리는 이를 빠득 깨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다. 괜히 아집을 부린다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면 모두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헨리는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능한 지휘관도 아니었다.
낮게 흐느낀 헨리가 권총을 든 손을 내린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항복…….”
스르르 손을 편 헨리가 권총을 떨어트리며 말했다.
“……항복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