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연회가 끝나고 나흘 후.
작전참모차장 세드릭의 집무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
세드릭이 손에 들려 있는 서류를 훑어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께서 허가하신 덕분에 자네의 바람대로 상부에서 작전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동부 전선이군.”
다니엘은 열중쉬어 자세로 세드릭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위치는 연합국 중 하나인 벨모어 왕국과의 접경지대다. 불모지에 가까운 환경이지. 또한 산악 지역에 둘러싸인 분지인지라 전략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 아니기에 소규모 중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만에 하나 벨모어 왕국이 산악 지대를 통해 진군한다면 그걸 미리 알아차리기 위해 심어 놓은 경계 부대란 소리였다.
물론 벨모어 왕국이 제정신인 이상 산악 지대를 통해 진군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험난한 산맥을 끼고 진군한다는 건 사실상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네는 이곳에 대대 규모의 본부 직할 부대를 이끌고 가게 될 거다. 도착하는 즉시 주둔 중대와 합류하여 인수인계를 받도록 해라. 임무는 그 이후에 시작하면 된다.”
“임무라고 하시면?”
“접경지대 인근에 포로로 잡혀 있는 제국의 공학 기술자를 구출해내는 것이다. 특히 한스 제른메하트를 구출해내야 한다. 그는 제국 핵심 기밀을 알고 있는 기술자 중 한 명이니까.”
임무를 이해한 다니엘이 경례를 올렸다.
“명령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세드릭이 경례를 받아준다.
다니엘을 돌려보내려던 세드릭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첨언하자면 무리해서 임무를 수행할 필요는 없다. 상부에서는 한스 제른메하트의 구출보다는 자네의 생존을 우선하고 있으니까. 애초에 대대급 인원으로 접경지대의 경비를 뚫고 포로를 구출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저건 곧 임무에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황제가 임무 실패를 빌미로 견제를 할까 싶어 곤란했던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호재와 다름이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나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이의를 제기할 사항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힘주어 대답한 다니엘이 발길을 돌려 세드릭의 집무실을 나선다.
그대로 복도를 걷던 다니엘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좋았어!’
예상보다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전장에 보내달라고 했다고 진짜 포화가 빗발치는 아수라장 한 가운데에 파견을 보내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상부는 다니엘 슈타이너를 살려두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인지 전장에 보내되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적은 곳에 파견을 보냈다.
심지어 ‘임무에 실패해도 된다’는 따스한 말까지 보태주었지 않은가.
막말로 전장에 참여하는 척 하며 타지에 가서 쉬다 오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제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계속 전장에서 지내다가…….’
현 황제인 베르트함이 모든 권한을 셀비아에게 양도한 후 내려가게 되면 제도로 복귀할 것이었다.
‘어제 셀비아의 태도를 보건대 나를 견제할 생각은 딱히 없는 것 같았지.’
그러니 셀비아가 황제가 된다면 안심하고 제도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최종 목표가 제도에서 안심하고 살아가기는 아니었다.
엘드레시아 왕국과 벨라노스를 연달아 굴복시키면서 제국이 생각 이상으로 부강해졌다지만 아직도 가장 좋은 방법은 탈출이었다.
겨울의 살얼음이 녹고 봄이 오는 순간 열강들은 앞다투어 제국에 선전포고를 할 테니까.
들려오는 소식통에 의하면 연방국과 공화국이 서서히 군사를 결집시키고 있다고 한다.
연합국의 실질적인 수장인 칼레드라와의 회담 횟수도 늘어났다고 들었다.
세계대전이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그 전화의 불길속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로서는 제국 탈출밖에 없었다.
‘그러나…….’
셀비아를 전화의 불길 속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황제와 달리 셀비아는 자신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모르지 않았다.
또한 셀비아는 민심을 챙길 줄 알지만 정치에는 능통하지 못하다.
필시 멸망하는 제국과 함께 몰락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골머리를 앓으며 계단을 내려가자 익숙한 외형의 여자와 마주친다.
흐트러진 백은의 단발과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
루시였다.
“부관?”
집무실에서 왜 나온 건가 싶어서 물어보자 루시가 붉은 눈을 깜빡이고는 말했다.
“아. 본부 직할 부대의 간부가 중령님을 뵙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이 소식을 알려드리기 위해 중령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본부 직할 부대에서?”
누구인지 대충 예상이 간다.
떨떠름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은 루시와 함께 개인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의 문 앞에 선 다니엘은 심호흡 끝에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연갈색의 머릿결을 허리 아래까지 늘어트린 여성이었다.
어깨에는 새것처럼 보이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여성은 인기척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고, 다니엘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내며 양손을 모았다.
“아아.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 제가 이 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중령님은 모르실 거예요. 성자나 마찬가지인 다니엘 중령님의 곁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제 한 목숨 바쳐 연합국의 짐승들을 도륙할 것을 하느님께 맹세-”
쿵!
더는 듣기 힘들었던 다니엘이 문을 닫았다.
한 가지 소름끼치는 점은 문을 닫았는데도 안쪽에서 계속 프리엔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문 따위는 시야의 장벽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프리엔은 다니엘을 찬양하고 있었다.
덕분에 진절머리가 난 다니엘이 루시를 돌아보았다.
“부관.”
“예.”
“혹시 반품은 안 되나?”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던 루시가 보기 드물게 눈살을 찌푸렸다.
“중령님.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됩니다.”
“사람이라…….”
민족주의에 심취하여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해석하는 저 여자를 과연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저건 정신상태로만 보면 괴물에 가까운 무언가라고 말하려다가 참아내었다.
좋든 싫든 당분간 같이 지내야 할 텐데 괜한 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
한편, 벨모어 왕국 접경지대 분지.
공수특전여단 예하 특수전 중대 작전지휘실.
“중대장님.”
지휘소에 엎드려 자고 있던 중대장 번라드가 침침한 눈을 뜬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번라드는 낮게 하품을 하고는 상체를 일으켰다.
군복은 풀어질대로 풀어졌으며 군화의 끈은 제대로 묶이지도 않았지만 번라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이곳은 그래도 되는 곳이니까.
“뭐야. 무슨 일인데. 술 떨어졌나?”
번라드가 멍한 눈초리로 묻자 소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번라드가 짜증난다는 듯 이마를 긁는다.
“그럼 뭔데?”
“저기…… 슬슬 임무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임무? 지금 임무라고 했나.”
어이가 없다는 것처럼 번라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정신 좀 차려라 중사. 우리는 이곳에 버려진 거다. 새로운 명령이 하달될 때까지 경계 임무에 집중하라는 소리를 들은 지 벌써 일 년이 넘었어. 그 뒤로 상부에서는 우리에게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았지.”
번라드는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릿결을 뒤편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그냥 여기 죽치고 앉아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급용 술이나 퍼마시면 된다 이 말이야.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염병할 산밖에 없는 곳이지만 총 맞아 죽을 일은 없잖아?”
번라드는 낄낄거리다 말고 의아함을 머금었다.
보통 이쯤 되면 소대장도 맞장구를 칠 텐데 오늘따라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던 것이다.
“……왜 그래? 설마 상부에서 새로운 명령을 하달했나?”
소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본부 직할 부대에서 대대 인원을 보낼 테니 그쪽 중령의 지휘를 받으라는 명령입니다.”
“중령? 하. 대대급 인원이 여기에 와봤자 뭐가 달라져? 천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벨모어 왕국이라도 치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씨발. 너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래?”
마치 겁에 질린 사슴처럼 덜덜 떠는 소대장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번라드가 이유를 말해보라는 것처럼 노려보자 소대장이 심호흡 끝에 말했다.
“이곳으로 오게 되는 중령이 다름 아니라…….”
“다름 아니라 뭐?”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입니다.”
중령의 이름을 듣자마자 번라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곳이 아무리 오지의 분지라고 해도 제도에서 들려오는 소식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참모 본부 작전 참모 중령 다니엘 슈타이너.
이건 제국의 군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중 하나였다.
“중사? 나 농담 안 좋아해.”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지만 소대장은 번복하지 않았다.
“확실히 들었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이곳에 온다고…….”
덕분에 번라드가 떨리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라면…… 그 사람이잖아. 엘드레시아 왕국의 외무대신 앞에서 연합국 병사의 얼굴 가죽을 벗겨냈다던…….”
소문이란 와전되기 마련이다.
특히 오지에 해당될수록 이야기에 살이 붙는다.
처음에는 단순한 ‘술자리 농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전해지고 또 전해지는 과정에서 ‘진실’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소대장 또한 그 와전된 소문을 진실이라 치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벨바르 공작이 자신을 압박하자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저택으로 처들어갔다는 거 아십니까? 그때 벨바르 공작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사병을 쏴 죽였답니다.”
“맙소사…….”
번라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식은땀을 흘리던 번라드가 고개를 들어 소대장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 다니엘 슈타이너가 지금 우리 상태를 본다면…….”
“총살입니다. 무조건 총살일 겁니다.”
공포에 질린 번라드가 딸꾹질을 한 번 흘린다.
술이 깬 번라드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전 병력에게 알려라! 지금 당장 시설 점검 및 청소를 실시하라고 말이다! 또한 총기 수입을 실시하고 의복을 단정하게 하라고 명해라! 기술에 관련된 사항도 모두 확인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유를 뭐라고 설명할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이해진 건 단순히 번라드 혼자가 아니었다.
병력들 또한 전장 속의 평화에 찌들어 일과 시간에 포커나 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이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방금 번라드가 경험하였으니까.
“온다고 전해라. 다니엘 슈타이너가…….”
얼굴에 핏기가 가신 번라드가 마른 침을 삼키고는 말했다.
“제국의 악마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