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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4 - Chapter 104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이질적이다 못해 불편하게 다가온다.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 이럴까.

‘왜 싸우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간에서 중재해야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은식기든 금식기든 식사를 할 때 쓴다는 점에서 똑같지 않겠습니까. 어느 식기를 쓰는가는 결국 개인 기호에 따라 다른 것이니 다툴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여자의 시선이 다니엘에게 향한다.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은 시선이었기에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개인 기호에 따라 다르다고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건 셀비아였다.

“그럼 다니엘 중령은 금식기와 은식기 중에 뭘 고르실 건가요?”

의도가 명백한 질문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괜히 끼어들었나 싶었을 무렵에 황실 악단의 연주가 바뀐다.

방금까지의 연주가 여유로웠다면 지금은 조금 빠른 템포가 이어지고 있었다.

곡의 분위기 또한 밝아진 것을 보면 연회의 꽃인 무도(舞蹈)를 알리는 연주였다.

화제를 바꿀 기회라고 생각한 다니엘이 서둘러 말을 돌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가능하다면 황녀 전하의 춤사위를 볼 수 있겠습니까.”

능구렁이처럼 질문을 회피하는 다니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셀비아였지만,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파트너가 되어주신다면 못 할 것도 없네요. 같이 추시겠어요?”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셀비아 또한 자리에서 일어난다.

곁눈질로 루시를 한 번 노려본 셀비아는 다니엘을 데리고 홀의 중앙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근처에는 벌써부터 남녀들이 짝을 이룬 채 무도를 즐기고 있었다.

“다니엘.”

그들을 바라보며 걷던 셀비아가 입술을 달싹인다.

당신의 부관이 의심스럽다고 말을 전하려던 셀비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떠벌리고 다녀서야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냥 다른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친위대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답지 않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왈츠를 추기 위해 셀비아의 손을 잡은 다니엘이 답했다.

“예전에도 하르트만 중령에게 같은 제안을 받았었지요. 그때와 마찬가지의 대답을 들려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셀비아가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다니엘의 의견을 존중하고는 있었으나 기분이 상하는 것을 숨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의아했던 다니엘이 재차 말을 건넨다.

“……전하.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없을 리가.

셀비아는 현재 제국의 차기 황제로서 모든 권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권력이란 자고로 집단의 우두머리에 속한 이들에게 충성을 맹세 받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셀비아는 공허함을 느꼈다.

나라의 중추를 책임지고 있는 귀족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갈수록 집중되고 있었지만 셀비아는 이것이 자신의 힘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심지어 지금 아군임을 자처하고 있는 이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셀비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었다.

자신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내고 황자와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물을 말이다.

‘하지만…….’

이 불안한 마음을 토해내는 것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이 보여서는 안 되는 추태나 마찬가지다.

황제란 만인을 다스리고 이끌어야 하는 존재.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한 셀비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뒤이어 악단의 연주가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두 사람의 발이 움직인다.

이제는 지겹다는 것처럼 숙달된 춤사위가 셀비아에게 보이고 있었다.

셀비아에 비하면 다니엘은 다소 어설픈 몸짓이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썩 나쁘진 않았다.

“제법 잘 추시네요.”

“전하께서 예전에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는 출 줄 알아야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던 셀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을 조명 삼아 둘만의 무도회를 즐겼던 것은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으리라.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있는 학생에게는 보상이 있어야겠네요. 말해봐요.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 원하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원하는 거라면 하나 있기는 하였다.

“보상을 논하시니 감히 요청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 가능하다면 제가 전장에서 활약할 수 있게끔 명령을 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현란하게 움직이던 셀비아의 발이 멈춘다.

덕분에 다니엘은 발이 꼬여 넘어질뻔 하였지만 끝내 균형을 되찾았다.

“……전하?”

셀비아의 푸른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춤을 추느라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은 셀비아가 다니엘을 올려다본다.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전장에 나가겠다니. 벨라노스 영해에서 그 꼴을 당하고도 만족하지 못하신 건가요?”

셀비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칫 잘못했다가는 벨라노스 영해에서 당한 일을 제도에서도 당할 수 있었으니 문제였다.

그렇다고 황녀 앞에서 ‘네 아버지가 날 괴롭힌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다니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을 내뱉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셨지만 국내의 여론이 마냥 좋지만은 않습니다. 일각에서는 다니엘 슈타이너가 황실을 좌지우지한다는 황당한 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시정잡배의 개소리가 뭐 어쨌다는 건가요?”

“개소리가 맞습니다. 그러나 개 한 마리가 짖으면 다른 개들 또한 같이 짖기 마련입니다. 개들이 짖기 시작하면 그 주인 또한 원인을 살피려 들겠지요.”

다니엘이 셀비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잡았다.

“그러니 황녀 전하와 저는 너무 가까워서도 너무 멀어서도 안 되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저를 전장에 내보내는 것으로 ‘다니엘 슈타이너는 그저 일개 군인일 뿐’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려주십시오.”

벨라노스에 죽다 살아난 다니엘을 또다시 전장에 보내는 것으로 귀족들의 의심을 꺼트리라는 것이었다.

실로 합당한 제안이었지만 셀비아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내 손으로 당신을 사지로 내몰라는 소린가요.”

셀비아의 눈에는 다니엘이 자신을 위해 지독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였다.

실상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었지만, 속내를 밝힐 필요가 없었던 다니엘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이것이 저와 황녀 전하 모두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다니엘의 시선을 받은 셀비아는 짧은 침묵 끝에 말문을 열었다.

“그럼 이것 하나만 약속해줘요.”

“무엇을 말입니까.”

“절대 죽지 않겠다고. 그리하여 대관식이 시행되는 날에 나를 꼭 보러 오겠다고 말이에요.”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다니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황녀 전하.”

*

루시는 셀비아와 다니엘의 밀담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꽤나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셀비아가 대뜸 무도를 멈추고는 다니엘과 진지하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싶었던 순간이었다.

“루시 에밀리아.”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루시는 돌아보지 않아도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테오발트 베르노.

그는 연합국 첩보부 소속 팔렌티아 지부장이었다.

“복귀 명령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짐을 싸서 귀환하도록 해라.”

루시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할 말을 고르던 루시는 심호흡 끝에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스파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었지만 테오발트는 나무라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저 루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때문인가. 그 남자가 너를 홀리기라도 한 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유가 뭐지? 제정신이라면 연합국을 배신한다는 선택을 할 수 없을 텐데.”

테오발트의 뻔뻔함에 루시가 이를 꾹 깨물었다.

“루시 프로젝트.”

“…….”

“이걸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모든 게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제가 연합국에 충성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황한 모양인지 테오발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의 네 선택을 분명 후회하게 될 거다.”

그리 말한 테오발트가 천천히 물러난다.

그제야 긴장을 푼 루시는 앞을 바라보았다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무도를 끝낸 다니엘이 홀로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그게 의아했던 루시가 입을 열었다.

“다니엘 중령님? 황녀 전하께서는?”

“아. 전하께서는 연회 이후에 만나야 할 인사들이 많기에 내가 붙들어 둘 수 없더구나. 그런데…….”

다니엘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방금 어떤 남자랑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

다니엘의 질문에 사실대로 대답할까 고민하던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개인의 사정에 다니엘을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같이 춤을 추고자 하더군요. 거절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나? 모처럼 연회장에 왔으니 즐겨도 될 텐데 말이야.”

“춤을 따로 배운 적이 없어서 재미를 느끼지 못 할 겁니다.”

“그런가.”

무언가 안타깝다고 느낀 다니엘이 루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럼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연회가 끝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말이야.”

춤을 권유받을 줄은 몰랐던 루시가 놀라며 다니엘을 올려다본다.

잠시 주저하던 루시는 곧 다니엘의 손을 붙잡았다.

맞닿은 손의 온기를 느끼던 루시가 다니엘을 바라보며 살풋 미소를 지었다.

“원하신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창가를 통해 스며드는 달빛 속에서 루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이 선택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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