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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3 - Chapter 103

분위기가 일변한다.

스파이로 오랜 세월을 활동한 루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셀비아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 속내만큼은 냉철하다는 것을 말이다.

‘위험해.’

말을 잘못하는 순간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전해지고 있었다.

덕분에 루시가 긴장하고 있으니 셀비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정보국을 시켜서 당신의 뒷조사를 조금 해봤어요. 그런데 이상한 정황들이 발견되더라고요?”

미소를 거둔 셀비아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루시 중위는 어째서 인근 마을 주민들과 교류를 하지 않았을까요? 신기하게도 마을 주민들은 루시 중위의 정체를 아예 모르고 있어서 말이에요.”

“그건…….”

침착하자.

배운 대로 설명하면 책 잡힐 일은 없을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사람이 무서웠습니다. 부모님에게 버림을 받고 할아버지의 손에서 길러졌으니까요. 더해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오두막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늘 충고하셨습니다.”

“왜요?”

“오두막 밖에는 야생동물이 많기도 하고, 할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저에게도 해코지를 할까 싶어서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루시는 셀비아가 준비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셀비아가 아니었다.

“그래요? 이상하네. 왜 내가 들은 것과 지금 루시 중위가 하고 있는 주장이 일치하지가 않는 걸까요. 왜 루시 중위는…….”

루시를 내려다보는 셀비아의 두 눈이 날카롭게 좁혀진다.

“제게 진실을 숨기려고 하는 걸까요.”

루시의 손이 움찔 떨린다.

정말로 들킨 건가 싶어서 마음이 조급해진 것이다.

그러나 카드를 쥐고 있는 것은 셀비아다.

지금 시점에서 패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루시는 태연함을 연기하였다.

“송구하오나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어떻게 숨기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루시가 떠보자 셀비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저는 지금 추궁을 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하세요.”

요컨대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자백을 하라는 소리였다.

셀비아는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루시는 저 말에서 평온함을 얻을 수 있었다.

‘증거가 없구나.’

증거가 있으면 굳이 자백하라는 권유를 하지 않는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자백을 유도하는 것이다.

저건 연합국에서 자주 쓰는 심문 방법 중 하나이기에 루시는 모르지 않았다.

‘물론…….’

셀비아가 연합국의 심문 방법에 통달해서 이런 식의 협박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루시의 입장에서 셀비아는 그저 본능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심문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찌되었든 셀비아에게 증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 위축될 필요가 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은 루시가 예법에 맞추어 고개를 숙인다.

“전하. 저는 제국에서 태어나 제국에 봉사하기를 마음 먹은 사람입니다. 어찌하여 저를 의심하시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살면서 제국에 위해를 끼칠 일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셀비아의 한 쪽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린다.

패가 탄로났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끝까지 자백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첨언하자면 지금 정보국에서는 당신의 조사를 이어가고 있어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아두세요.”

“송구하오나…….”

고개를 든 루시가 셀비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적국의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다면 어디 한 번 찾아봐라.

으름장을 놓는 것 같은 루시의 행태에 셀비아가 이를 꾹 깨문다.

마음 같아서는 루시를 불명예 제대시키고 제국에서 추방시키고 싶었다.

제아무리 증거가 없다고 해도 일개 중위에 불과한 장교를 추방시키는 것에 반발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다니엘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자신의 부관을 추방시키는 황녀를 다니엘이 과연 좋게 볼까?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명확하였다.

다니엘의 마음을 얻고 싶은 셀비아에게 있어서는 자충수나 다름 없는 일인 셈이다.

‘그러니…….’

루시가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나와도 별다른 제지를 할 수가 없었다.

루시 또한 셀비아의 생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기에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동안 루시를 노려보던 셀비아는 결국 한 발 물러나기로 하였다.

“그런가요. 루시 중위의 말을 들어보니 제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기는 하네요. 사과를 드릴겸 같이 식사나 한 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당연히 받들겠습니다.”

두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대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달랐다.

‘계속해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결국 나는 네 정체를 밝혀낼 거니까.’

‘그만 두는 게 좋을 거야. 나는 포기할 생각 없으니까.’

그러나 둘 중 어느 누구도 가면 속의 의중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

한편, 다니엘은 세드릭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좋아하는 음식으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어느새 전황으로 이어졌는데,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각하. 말씀하신 대로 지금 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상황이 좋을지 모르나 거시적으로 보면 여전히 불리한 입장입니다.”

“그렇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제국을 칠 준비를 할 테니 말이다.”

“예.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제가 전장에서 활약하게끔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세드릭이 의외라는 듯 다니엘을 바라본다.

“전장에 가겠다고? 자네가? 어째서지. 황녀 전하께서도 그걸 원치 않으실 테고 상부에서도 굳이 자네를 전장에 내보내려고 하지 않을 텐데.”

군 수뇌부는 다니엘 슈타이너를 선전 영웅으로서 제도에서 활동하게 하는 편이 국익이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제도에서 활동하는 것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가 다니엘 슈타이너를 견제하고 있으니까.

‘날 공격하면 너 또한 공격받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으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인간의 권력욕이 정점에 이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말년이다.

자신이 일군 모든 것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것이 권력자였다.

황제가 자신이 죽기 전에 무슨 짓을 벌일지 다니엘은 감히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 셀비아가 황제가 되는 것으로 베르트함에게 모든 권한을 인계받을 때까지는 전장으로 피해 있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생존에 보다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니까.

그렇다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던 다니엘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자국의 군인들은 전선에서 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쟁 영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도에서 안락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진정 제국을 위한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전장에서 활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의 그럴듯한 변명에 세드릭이 내심 감탄하였다.

‘과연. 제국을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바칠 수 있다는 건가.’

가히 군인의 모범이라 할만하였다.

다니엘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를 보고 있었으니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다. 상부에 자네 의견을 전해두도록 하겠네. 총참모장께서는 용기 있는 젊은이를 좋아하시니 분명 자네의 의견을 받아들이실 거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그보다…….”

세드릭이 눈동자만 굴려 루시가 앉아 있던 연회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셀비아가 해당 테이블에 앉아 루시와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났을 거라 생각한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자리를 오래 비운 것 같은데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세드릭의 말에 동의한 다니엘이 연회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셀비아와 루시를 볼 수 있었다.

‘그새 친해진 건가?’

의아해하며 다가가자 셀비아가 다니엘을 돌아본다.

“아! 다니엘 중령! 마침 잘 왔어요. 중령의 부관과 식사를 하던 중이었는데 같이 하시겠어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와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다니 영광으로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이 의자를 꺼내 앉자 주변을 오가던 웨이터가 눈치를 보고는 식기를 세팅해준다.

그걸 본 셀비아가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황실에서는 아직도 은식기를 쓰고 있네요. 이유를 아시나요?”

은발을 가진 루시를 겨냥하여 한 말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었던 다니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산화가 잘 일어나는 금속이 은이니까요. 중세의 귀족들은 독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 은식기를 쓰면 독을 감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었지요. 그게 전통으로 내려온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셀비아가 루시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은식기가 독을 감별하는 것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 말이에요. 실제로 독이 든 음식을 은식기로 먹고 죽은 사례도 빈번했다고 해요.”

은연중에 자신을 비난하는 셀비아의 말에 루시의 두 눈이 반개한다.

루시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반박하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독을 먹고 죽은 사례가 빈번하다고 하여 은식기를 금식기로 바꾸지 않은 것으로 보면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루시의 자연스러운 반박에 셀비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

“…….”

동시에 알 수 없는 침묵이 내려앉는다.

둘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다니엘은 생각했다.

‘집에 가고 싶군…….’

지금 당장이라도 이 연회장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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