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당일.
황금 장미 제과점.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과 루시 에밀리아 중위님이시죠? 저희 가게에 방문해주셔서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예약 확인을 위해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은 서류철을 들어 명단을 확인하였다.
그 사이 다니엘은 옆에 서 있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사복차림은 처음 보는 거 같은데…….’
루시는 현재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아래에는 연갈색의 펜슬 스커트를 입고 있었기에 몸의 라인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었다.
세련되면서도 우아한 옷차림을 보면 이 시대의 신여성이 절로 생각나는 복장이었다.
‘다만…….’
아무래도 자주 입는 옷은 아닌 모양인지 루시는 어딘가 모르게 긴장한 모습이었다.
‘이해한다. 저거 무슨 느낌인지 알지.’
한껏 멋을 내려고 최신 유행에 맞춰 옷을 입었는데, 막상 밖에 나오니 타인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신경 쓰이는 현상일 것이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 루시 에밀리아 중위님.”
종업원의 호명에 상념이 깨어진다.
다니엘이 시선을 돌리자 종업원이 사무적인 미소로 응대하였다.
“예약 확인되었습니다. 제가 자리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카운터에서 나온 종업원이 따라오라는 것처럼 걸음을 옮긴다.
루시와 다니엘은 군말 없이 따라갔고, 종업원은 두 사람을 창가로 안내해주었다.
“이곳에 앉아서 기다리시면 음식과 커피를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종업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지자 루시와 다니엘은 자리에 착석하였다.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마주보았다.
루시가 무감한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이는 가운데 다니엘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게 의아했던 루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중령님? 왜 웃으십니까.”
“그냥. 항상 딱딱한 제복 차림만 보다가 사복을 입은 걸 보니까 달라 보여서 말이다. 지금은 뭐랄까. 잘나가는 여배우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구나.”
갑작스러운 칭찬에 루시는 할 말을 잃은 채 살며시 입을 벌렸다.
칭찬을 받고 싶어서 꾸미고 나온 건 맞지만 막상 상상이 현실이 되니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은 것이다.
스파이로서 다니엘을 대할 때는 망설임 같은 건 없었는데, 한 명의 여자로서 다니엘을 대하려고 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그런 루시를 지긋이 바라보던 다니엘이 손을 들어서 가죽 장갑을 벗는다.
“그보다 오늘 저녁에는 황궁에 들러야 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아. 연회라면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다니엘이 전화를 통해 미리 말해주었으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었다.
‘왜 나까지 초대한 건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제국의 황녀가 직접 불렀다는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긴장할 필요는 없다.”
다니엘은 장갑을 모두 벗어서 테이블 옆에 놓으며 말했다.
“황실 연회라고 하여 거창할 것 같지만 결국 사교를 위한 자리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말을 조심하고 음주에 주의한 채 만찬을 즐기다 보면…….”
다니엘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종업원이 슈톨렌을 들고 다가왔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특별 메뉴인 슈톨렌입니다! 맛있게 드셔주세요!”
밝게 말한 종업원이 슈톨렌을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는다.
이어 따스한 김이 일어나는 커피 두 잔을 루시와 다니엘의 앞에 놓아주고는 뒤로 물러난다.
“이건…….”
테이블 중앙에 놓인 슈톨렌을 내려다보던 루시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정말로 빵 위에 눈이 내려앉은 것 같습니다. 예쁘군요.”
“외견만큼이나 맛도 좋은 빵이다. 금방 썰어줄 테니 잠깐 기다려라.”
빵칼을 든 다니엘이 슈톨렌을 부드럽게 쭉 밀면서 잘라낸다.
슬라이스 형태로 몇 개를 잘라낸 다음에야 빵칼을 내려놓았다.
“먼저 먹도록 해라.”
루시의 감상을 들어보고 싶었던 다니엘이 식사를 권한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루시는 포크를 들어서 슈톨렌을 찍은 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소담한 입술을 벌려 슈톨렌을 입에 넣은 루시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맛있어…….’
슈톨렌은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달콤한 맛을 과시하였다.
뒤이어 촉촉하고 부드러운 질감의 빵이 씹히자 고소한 맛이 퍼져간다.
또한 도중에 씹히는 건포도가 상큼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맛을 음미하며 슈톨렌을 꿀꺽 삼킨 루시는 솔직한 감상을 말하려다가 멈칫하였다.
거만한 미소를 지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니엘이 왜인지 모르게 얄미웠기 때문이다.
마치 ‘어때? 맛있지? 내가 추천한 건데 맛이 없을 리가 없다니까?’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는 바람에 루시는 본심을 숨긴 채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아내었다.
“……먹을만하네요.”
물론 그래봤자 다니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맛있었으면서 또 시치미를 떼는구나.’
슈톨렌을 한 입 먹었을 때 보인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귀여운 반항을 한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미소를 유지한 채 손을 들었다.
“먹을만하다니 다행이군. 그럼 나도 한 번…….”
포크를 찾던 다니엘의 손이 허공을 정처 없이 유영한다.
아무리 봐도 포크가 없었던 것이다.
“응? 종업원이 내 포크를 깜빡한 모양인데.”
그냥 손으로 집어먹을까 싶다가도 손에 설탕이 묻을 걸 생각하면 꺼림칙하다.
아무래도 종업원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먹여드리겠습니다.”
루시가 슈톨렌을 찍은 포크를 들어서 앞으로 몸을 기울인다.
“……먹여주겠다고?”
장난인가 싶었지만 루시의 붉은 눈동자는 영문을 모른 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미인계의 일환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거절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슈톨렌을 받아먹었다.
슈톨렌의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을 음미하던 다니엘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부관. 네 호의는 고맙지만 아무래도 포크를 하나 더 주문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왜 그렇습니까?”
“보는 눈이 많지 않은가. 이들이 부관과 나를 연인 관계로 오해하면 곤란하지 않겠나.”
별다른 뜻 없이 다니엘에게 슈톨렌을 건넸던 루시가 뒤늦게 얼굴을 붉힌다.
“아.”
의도치 않게 연인 행세를 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부끄러웠던 것이다.
“다니엘 중령님. 저는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니라…….”
뒤늦게 변명을 해보지만 분위기는 이미 어색해져 있었다.
짧은 침묵 끝에 루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은 덤이었다.
*
식사를 끝낸 루시와 다니엘은 저녁이 되자 황궁으로 향했다.
마중을 나온 내명부의 인원에게 안내를 받은 루시와 다니엘은 얼마 안 가 연회가 열리는 별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회가 열리는 곳이라는 걸 광고라도 하는 것처럼 온갖 조명들이 화려하게 켜져 있는 곳이었는데, 주차장에서부터 알만한 정재계 인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별궁 안으로 입장하자 거대한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그레이트 홀이 펼쳐진다.
홀 안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테이블 가득 차려져 있었으며, 중앙에는 거대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더해 황실의 관현악단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기에 실로 성대한 분위기였다.
‘크리스마스 연회는 일반적인 연회랑은 다르다고 듣긴 했는데…….’
내심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간 다니엘은 루시와 함께 가장자리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괜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정도로 유명세를 타면 구석에 있어도 자연스럽게 사람이 꼬이는 법이었다.
“다니엘 중령 아닌가.”
테이블에 앉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린 다니엘은 정장 차림의 작전참모차장인 세드릭을 볼 수 있었다.
옆에는 셀비아까지 있었기에 다니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루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작전참모차장님. 그리고 황녀 전하.”
다니엘이 예법에 맞추어 고개를 숙인다.
셀비아는 루시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니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니엘 중령. 초대에 응해주셔서 고마워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초대받을만한 사람이 초대받은 것뿐인데 영광이랄 게 있나요. 그보다 작전참모차장이 다니엘 중령과 할 이야기가 있다던데요.”
세드릭은 의아함을 머금으며 셀비아를 돌아보았다.
다니엘 중령과 따로 할 이야기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셀비아의 의중을 이해한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의 말씀대로네. 저쪽으로 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세드릭이 다니엘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셀비아가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 중위? 다니엘 중령의 부관으로 아는데 제가 알고 있는 게 맞나요?”
셀비아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그렇지 않았다.
묘한 기류속에서 루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좋아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루시 중위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할 텐데…… 아. 일단 앉도록 해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전하께서 일어서 계시는데 제가 앉을 수는 없습니다.”
셀비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앉으라고 했어요.”
그제야 루시는 저 말이 배려가 아닌 명령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루시가 착석하자 셀비아가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요즘 루시 중위에게 관심이 있어서 말이에요. 괜찮으면 어떤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제게 말을 해줄 수 있으실까요? 고향이라던가 가족과의 관계 말이에요.”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에 루시는 배운 대로 말했다.
“……저는 제국 남서쪽에 위치한 뮐렌도르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정확히는 뮐렌도르프의 인근에 위치한 숲속의 작은 오두막에서 말입니다.”
“흐응. 그리고요?”
“그곳에서 저는 할아버지의 손에서 길러졌습니다. 제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할아버지께서는 저를 애지중지 보살펴주셨습니다. 이후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모든 과정을 이수한 후 참모 본부에 배속되어 다니엘 중령님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설명이다.
덕분에 셀비아 또한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군요. 꽤나 힘든 생활을 보냈겠어요. 오두막에서 부모 없이 할아버지의 손에 길러지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아마 이런 루시 중위의 과거는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한 단어로 말인가요?”
“궁금하신가요. 그럼 들려드릴게요.”
셀비아가 테이블 위에 손을 짚고 몸을 앞으로 숙인다.
윤기 어린 백금발의 머릿결이 어깨를 타고 스르르 흘러내린다.
긴장감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가운데 청금석을 닮은 푸른 눈동자가 부드럽게 좁혀진다.
루시가 저도 모르게 위축된 순간, 셀비아가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