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이른 아침.
황궁의 실내정원.
“으음…….”
붉은 망토를 나풀거리며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던 셀비아가 옆을 돌아본다.
“내명부장이 보기에는 어때요? 괜찮은 거 같아요?”
안절부절못하는 셀비아의 모습에 내명부장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벌써 세 번이나 물어보고 계십니다.”
“진정이 안 돼서 그래요.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그래서 어떤 거 같아요?”
셀비아는 지금 화장이 잘 되었는지를 묻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난 셀비아는 내의원 인원들에게 화장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런 경우는 잘 없는지라 내의원 인원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솜씨를 발휘했다.
물론 심혈을 기울였다고는 하나 그렇게 도드라지는 화장법은 아니었다.
우아하면서도 절제된 미를 주기 위해 가벼운 파운데이션이나 파우더를 사용했을 뿐이니까.
입술에 바른 립스틱 또한 피부톤에 가까운 누드 색조였다.
그래서 멀리서 보면 화장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옅은 수준이었다.
그만큼 화장이 자연스럽게 잘 먹혔다고도 볼 수도 있었다.
“소인이 보기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우십니다. 아마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도 지금의 황녀 전하를 보신다면 자연스럽게 미를 칭송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니엘이 미를 칭송한다고?
외모 칭찬을 하는 다니엘을 상상하던 셀비아가 별안간 작게 키득거렸다.
평소 다니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보다 크리스마스 연회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요?”
크리스마스 연회는 매년 황실에서 주최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제국이 전시에 들어서고 난 이후부터는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기는 했지만, 황족은 물론이고 귀족과 상류층이 모두 참여하기에 권위 높은 연회로 명성이 높았다.
본래 이 연회는 황제가 주관하지만 이번에는 대리청정을 맡고 있는 셀비아의 관할이었다.
연회에 돈을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셀비아였지만 이번에는 국고를 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니엘 슈타이너였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연회를 빌미로 삼아 전쟁 영웅의 생환을 축하하는 자리를 만들 셈이었다.
명분이 확실하니 다들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덕분에 셀비아는 순조롭게 크리스마스 연회를 준비할 수 있었다.
들뜬 표정의 셀비아를 바라보던 내명부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신 대로 다니엘 중령의 기호에 맞추어 만찬을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식후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 만국에서 재료를 공수하였습니다. 다니엘 중령에게 선물할 최고급 위스키 또한 곧 도착한다고 하니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것으로 아옵니다.”
내명부장의 말을 들은 셀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 준비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셀비아가 만족하자 내명부장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전하. 황후 폐하께서 내명부를 통해 전하께 선물을 전하라 하였는데 지금 보여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어머니께서? 뭘 보내셨는데요?”
“그것이…….”
셀비아의 눈치를 보던 내명부장이 송구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께서 황녀 전하를 위해 직접 속옷 몇 개를 고르셨습니다. 황후께서는 ‘중요할 때 입으라’는 말과 함께 전하께 해당 속옷을 전해달라 하였나이다.”
내명부장의 옆에 있던 시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더니 속옷 상자의 입구를 천천히 열어보인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 셀비아는 속옷의 형태를 보자마자 굳어버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천의 면적이 적은 것은 물론이고 해괴망측한 디자인이었다.
성욕에 지배당한 사람이나 입을 것 같은 디자인이 불쾌하게 다가온다.
이걸 선물한 사람이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화를 내었을 것이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 셀비아가 손을 내저었다.
“치우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황후 폐하께서는 ‘내 딸아이가 첫 번째 선물은 거절할 게 분명하니 다른 선물을 준비했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게 뭔가요?”
대부분의 경우 호기심이 불쾌함을 이기는 법이었다.
셀비아가 의문을 표하자 다른 시녀 한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상자의 입구를 연다.
상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크리스탈 병이 있었는데 안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색감이 분홍색인 걸 보면 설마…….’
의심스러운 액체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셀비아의 이마에 힘줄이 격자로 돋아난다.
“당장 치우세요.”
명령을 들은 시녀들이 상자의 입구를 닫고는 뒤로 물러난다.
내명부장은 셀비아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단지 황후의 명령이었기에 따랐을 뿐이다.
“어머니에게 전해주세요. 다음에도 이딴 선물을 보내오면 최소한 반 년은 문안인사를 드리지 않을 거라고 말입니다.”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은 셀비아의 모습에 내명부장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황후 폐하께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마디 더 하려던 셀비아는 그만 입을 닫고 고개를 저었다.
‘내명부는 그저 어머니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을 뿐이니까.’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해탈한 셀비아가 낮게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도착하였습니다!”
실내 정원의 입구에서부터 친위대 병사가 크게 외친다.
흠칫 놀란 셀비아가 서둘러 테이블 앞에 가서 앉는다.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서 홍차가 담긴 잔을 드는 것은 덤이었다.
그러고 있으니 저편에서 다니엘 슈타이너가 당당하게 걸어온다.
제국군의 제복을 입은 채 걸어오는 다니엘의 얼굴에는 약간의 피로가 보이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셀비아에게 있어서는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못 보던 사이에 더 잘생겨진 거 같아.’
홍차를 마시는 시늉도 잊은 채 빤히 바라보게 되는 얼굴이다.
실상은 벨라노스에 가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 외모였지만 말이다.
“황녀 전하.”
가까이 다가온 다니엘이 황실 예법에 맞추어 고개를 숙인다.
사적인 부름이니 경례보다는 이쪽이 조금 더 예의에 알맞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니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비아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잔을 내렸다.
“일어서서 들을 얘기는 아니니 앉도록 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셀비아의 반대편에 착석한다.
죽은 줄 알았던 다니엘이 살아 돌아온 것이 무척이나 기쁜 셀비아였지만, 황실의 위엄을 실추시킬 수 없는 노릇이기에 최대한 절제하며 말했다.
“생환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모든 것은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다니엘이 의례적으로 대답하고 나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어디에서부터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던 셀비아가 초조한 마음속에서 말문을 열었다.
“제가 다니엘 중령을 부른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떠보는 건가? 저도 모르게 긴장한 다니엘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회담 결과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듣고자 호출하신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런 건 이미 외교부를 통해 귀가 아플 정도로 들었어요. 제가 오늘 다니엘 중령을 호출한 것은 사적인 이유 때문이에요.”
“사적인 이유라 하시면?”
셀비아는 괜히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연회에 초대하는 것이 어딘가 모르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말해야 다니엘이 받아들일까 고민하던 셀비아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다니엘 중령은 알고 계시나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황궁에서 성대한 연회가 개최된다는 걸 말이에요.”
“아. 들었습니다. 벌써부터 연회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이 통하겠네요. 저는 이번에 정식으로 다니엘 중령을 연회에 초대하려고 해요.”
이제 영광으로 받들겠다는 다니엘의 말이 나올 차례였다.
그래서 셀비아는 기다리고 있었지만 다니엘은 쉬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곤란한 것처럼 말을 고르던 다니엘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선약이 있기는 하지만 일정을 조절하면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선약이라는 말에 셀비아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다.
“선약이라니요? 누구랑 말인가요?”
“아. 그것이…….”
다니엘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루시 에밀리아라고 제 부관이 있는데 이번에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저와 부관 둘 모두 크리스마스에 딱히 일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시 에밀리아라면 셀비아도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점령지인 노르디아를 안정화시키는 것에 공훈을 올린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그 여자가 다니엘에게 꼬리를 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흐응…….”
셀비아가 개의치 않다는 듯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요. 다니엘 중령의 부관도 올해 크리스마스 연회에 초대하도록 할게요. 그럼 일정을 조절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요?”
분위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지만 다니엘은 눈치채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해주신다면 제 부관 또한 영광으로 알 것입니다. 말을 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니엘이 예법에 맞추어 고개를 숙인다.
다니엘이 몸을 돌려 걸어나가자 셀비아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반개한 두 눈동자에는 들떴던 기색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루시 에밀리아.
다니엘이 언급한 여자의 이름을 되뇌던 셀비아가 잔을 들어 홍차를 한 모금 마신다.
달그락─
잔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셀비아가 소담한 입술을 달싹였다.
“내명부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내명부장이 급히 다가가서 고개를 숙인다.
“잘 들으세요. 한 번만 말할 테니까요.”
서리가 낀 것 같은 목소리에 뒤편에 선 시녀들도 굳은 채로 귀를 열었다.
“정보국에 연락해서 루시 에밀리아에 대한 신원을 철저하게 조사하라고 명하세요. 학력, 생년월일, 정치색, 고향, 대인관계는 물론이고 출신 성분까지 모조리 말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내명부장의 대답을 들은 셀비아의 푸른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좁혀진다.
‘알아야겠어.’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꼬리를 치는 여자가 대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만약 순수한 연심이 아니라 모종의 목적이 있는 거라면…….’
모든 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막아설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