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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0 - Chapter 100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루시를 다니엘은 말없이 보듬어주었다.

속에 있는 응어리를 모두 토해내게끔 말이다.

그리 한참이나 울고 나서야 루시는 진정할 수 있었다.

루시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온 것을 확인한 다니엘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힘을 최대한 뺀 채 루시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다니엘이 말했다.

일단은 진정하고 목욕을 하면서 정신을 차리는 게 어떻겠냐고 말이다.

그제야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닐 거라는 걸 인지한 루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어렵사리 내뱉은 루시가 발길을 돌린다.

방에서 옷가지 몇 개를 챙긴 루시는 다니엘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고는 욕실에 들어갔다.

덕분에 혼자 남은 다니엘은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꼴을 보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데 간단한 요리라도 해주려는 것이다.

식칼을 이용하여 당근을 큼직하게 잘라내던 다니엘은 별안간 목을 매만졌다.

‘넥타이 끈에 목이 조이는 바람에 식겁했네…….’

대뜸 다가와서는 넥타이를 잡아 당기기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싶었던 다니엘이었으나 루시의 흐느낌을 듣고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루시는 울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서럽게 말이다.

아무리 봐도 그건 암살 대상자를 앞에 두고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대체 뭐였던 거지. 내 복귀가 그리도 반가웠나?’

아니. 단순한 반가움에 흘리는 눈물이라기에는 괴리감이 꽤 있었다.

‘마치…….’

과거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것에 가까운 눈물이었다.

평소의 루시 답지 않은 모습을 떠올리며 당근을 다 썰어낸 다니엘이 식칼을 내려놓는다.

당근을 한곳에 모은 다니엘은 끓고 있는 커다란 냄비 안에 털어 넣었다.

냄비 안에는 여러 재료와 함께 닭고기가 들어가 있었다.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인다.

‘됐다. 이제 계속 끓이기만 하면 완성이다.’

자신의 요리가 만족스러웠던 다니엘은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멈칫하였다.

루시 방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루시의 방을 살펴보면…….’

유용한 정보를 취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실쪽에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시간은 넉넉하였다.

심호흡을 한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루시의 방에 들어갔다.

스파이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숙녀의 방에 들어가는 것이라 조금 긴장되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허탈한 마음이 앞섰다.

“심각할 정도로 깔끔하군…….”

침대, 책상, 옷장, 커튼.

이 외에 다른 걸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단출한 구성이었다.

덕분에 다니엘은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보통 방이라는 건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공간 중 하나다.

그런데 루시의 방에서는 개성의 편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흔한 인형이나 포스터도 없이 텅 빈 방에는 사람의 온기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공허한 공간이다.

‘……취미가 없나?’

아니면 취미를 가질 기회조차 없었던 것일까.

알게 모르게 루시를 동정하던 다니엘은 책상 위로 시선을 던졌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뭐지?’

책상 위에는 책이 있었다.

‘그래. 책이 있을 수는 있지.’

그런데 그 제목이 문제였다.

【늑대 같은 남자를 유혹하려면 여우가 되어라!】

【사랑이란 전쟁과 같다! 사랑 전선에서 승리하는 법!】

【남자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34가지 방법!】

이성을 유혹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무려 세 권이었다.

그것도 기초적인 생활 용품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건 루시가 과거에 다니엘 슈타이너를 유혹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샀던 책이지만, 상태가 깔끔하게 보존되어 있었기에 새 책처럼 보이고 있었다.

짐짓 당황스러운 다니엘이었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루시에게 만나는 남자가 있나?’

다니엘이 알기로 없었다.

애초에 루시는 이성은 물론이고 동성에게도 마음의 문을 잘 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설마 날 유혹하려고?’

합당한 추론이었다.

도출된 결과가 또 다른 추론을 낳는다.

‘……미인계인가?’

미인계는 얼굴에 자신이 있는 이 시대의 스파이들이 자주 쓰는 방식 중 하나였다.

루시 또한 객관적으로 수려한 용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럼 현관문에서 보인 행동도…….’

루시를 의심하던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게 연기였다면 루시는 당장 스파이를 그만두고 여배우로 데뷔를 해야 했다.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서글프게 우는 루시의 모습은 절대 연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울음의 의미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렴풋이 루시의 과거와 관련이 있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흘러나온 물이 지면에 닿아 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목욕을 마친 루시가 몸을 씻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다니엘은 급히 방에서 나왔다.

자연스럽게 주방에 들어간 다니엘은 차를 준비하였고, 샤워기의 물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얼마 후에 루시가 욕실에서 나왔다.

시선을 돌리자 목욕 가운으로 몸을 감싼 채 걸어나오는 루시가 보인다.

물기를 머금은 은백색의 머릿결이 평소보다 더 희게 빛나고 있었다.

루시가 가까이 다가오자 다니엘이 머그컵에 차를 따라내서 건네주었다.

“카모마일 차다. 보아하니 잠을 제대로 못 잔 거 같은데, 카모마일 차에는 불면증과 스트레스를 완화시켜주는 효능이 있으니 도움이 될 거다.”

망연히 다니엘을 바라보던 루시가 양손으로 머그컵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뒤를 가리킨다.

“뒤에 있는 냄비에 끓고 있는 건 닭고기 브로스 수프다. 다른 요리도 할 수 있지만 며칠 굶은 것 같아 수프로 준비했다. 위장에 자극을 주지 않는 선에서 영양을 챙겨야 하니 말이다.”

루시는 머그컵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냄비로 시선을 돌렸다.

냄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두 시간 정도 지나면 불을 끄고 먹도록 해라. 간이 싱거울 수 있으니 후추랑 소금을 추가해서 먹어도 좋을 거다.”

다니엘의 덤덤한 설명이 따스한 위로가 되어 다가온다.

잠시 망설이던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니엘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지사지에도 정도가 있지. 상관을 부려먹는 부관이라니. 내 체면이 말이 아니군.”

미안했던 루시가 시선을 내린다.

다니엘이 그런 루시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혼이 날 거라 생각했던 찰나에 다니엘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내 체면을 생각한다면 다음부터는 멋대로 굶지 마라.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 알겠나.”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던 루시의 눈이 조금 크게 뜨인다.

루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다니엘이 손을 거두었다.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까지는 기운을 회복하도록 해라. 연인들이 북적이는 가게에 궁상맞게 나 혼자 가기는 싫으니 말이다.”

“……크리스마스라 하시면?”

“같이 슈톨렌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나.”

슈톨렌.

별다른 뜻 없는 한 마디에 루시는 지금의 이 상황이 꿈이 아님을 다시 한번 자각하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크리스마스가.

루시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루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확인한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운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 같으니 이제 돌아가봐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제복모를 든 다니엘이 머리에 착용한다.

그대로 루시를 지나친 순간이었다.

“다니엘 중령님.”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만은 또렷하였다.

짧은 침묵 끝에 루시가 용기내어 말을 이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소리에 다니엘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은혜라. 내가 구해준 어느 의사도 똑같은 말을 했었는데 말이야. 신기한 기분이군.”

웃음을 갈무리한 다니엘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기대하도록 하지.”

은은한 미소를 지어준 다니엘이 발걸음을 옮겨 숙소를 나가버렸다.

다니엘이 사라진 숙소 안에서, 루시는 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머그컵을 꼬옥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 전에…….’

예쁜 옷을 한 벌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에드리아.

백작 칼레드라의 집무실.

『제1914057호 벨라노스 동향 보고서 - 1738791971』

중앙정보국의 첩보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읽던 칼레드라가 눈살을 찌푸린다.

보고서에는 다니엘 슈타이너가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을 압박하여 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회담을 성공시켰다는 것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인가?”

중앙정보부 부국장 베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해당 보고서는 교차 검증이 끝난 자료입니다.”

덕분에 칼레드라가 눈을 감은 채 이를 꽉 깨물었다.

‘선박 격침에서 생존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다니엘은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죽음을 무기로 삼아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을 굴복시켰다.

덕분에 제국은 바다로부터 오는 공격에서 안전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을 허락한 이상 벨라노스가 제국의 방파제이자 첨병으로서 적의 공격을 막아줄 테니까.

‘골치가 아프군.’

본래 제국의 멸망은 확정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고 사소한 결함도 발견되지 않았다.

‘연합국의 승리가 손에 잡힐 것처럼 다가오고 있었는데…….’

대뜸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나타나더니 계획을 하나 둘 어그러트리고 있었다.

마치 다가올 운명에 저항하는 이야기 속 영웅처럼 말이다.

침음하며 이를 갈던 칼레드라가 천천히 두 눈을 뜬다.

‘네놈이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고작 일개 인간 한 명이 몰아치는 파도의 방향을 뒤바꿀 순 없는 법이었다.

제국은 궤멸할 것이고 연합국은 번영하리라.

‘내가 기필코 그렇게 만들 것이다.’

전황 또한 연합국이 유리하였으니 괜히 골머리를 앓을 필요는 없었다.

‘다만…….’

다니엘의 생존으로 인해 루시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최근 제도의 팔렌티아 지부에서 루시가 변심했을지도 모른다는 보고까지 있었다.

그런 와중에 다니엘이 생환했으니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본래 다니엘의 빈자리를 루시가 흡수하도록 판을 짜고 있었던 칼레드라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루시의 변심이 기정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건 내어줄 수 있어도 루시 에밀리아만큼은 넘겨줄 수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칼레드라가 베크를 노려보며 말했다.

“루시에게 복귀 명령을 내려라. 지금 당장!”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베크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크가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가자 칼레드라가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달아오른 이마가 열병에 걸린 것처럼 뜨겁다.

이 스트레스의 원흉은 당연하게도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제국의 황제여. 어째서 놈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는 건가!’

칼레드라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판단 지표가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놈은…….’

장차 제국을 집어삼킬 괴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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