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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6 - Chapter 106

번라드 중대장의 명령은 어렵지 않게 전 병력에게 전달되었다.

처음 명령을 들은 병사들은 중대장이 지루함에 못 이겨 드디어 미친 건 줄 알았다.

버려진 전초기지나 마찬가지인 곳을 점검하고 청소하라는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니엘 슈타이너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명령을 받들었다.

번라드와 마찬가지로 병사들 또한 다니엘 슈타이너의 악명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죽고 싶지 않았던 병사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시설의 미비된 사항을 점검하였고 당장 조치 가능한 선에서 수리하였다.

또한 전초기지에 하나 있는 다리미로 군복의 주름을 펴는 것은 물론이고, 혹여 책 잡힐 일이 없도록 총기 손질 또한 몇 번이나 하게 되었다.

혹여 다니엘 슈타이너가 군사 장비의 사용법과 관리 방법을 물을까 싶어서 병기본 책자를 들고 달달 외우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그렇게 약 보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 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이……. 아니! 대대장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서 무전을 받은 번라드가 목에 걸고 있던 휘슬을 들어서 불었다.

그러자 기지 앞에 모여 있던 병사들이 양옆으로 갈라지더니 차렷 자세를 취한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일과 시간에 낄낄거리며 포커를 치던 이들이, 다니엘 슈타이너가 온다는 말을 듣고는 정예병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둘러보던 번라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일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군.’

상부에게 잊혀져서 소위 말하는 ‘유령 부대’가 된 이후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기강이었다.

번라드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무렵 저 멀리서 차량이 진입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긴장한 번라드가 정면을 바라보자 선두를 달리는 군용 지프 차량 뒤편으로 수송 차량들이 연달아 들어오고 있었다.

‘상부에서 대대급 인원을 보냈다는 게 사실이었군.’

버려진 번라드의 중대와는 달리 물자가 부족할 리 없는 완편된 대대였다.

‘특수 임무를 시작하게 되는 건가…….’

번라드가 마른 침을 삼켰을 무렵 선두를 달리던 군용 지프 차량이 서서히 정차한다.

곧 차량의 문이 열리더니 가장 먼저 장교로 보이는 여자들이 내린다.

뒤이어 검은 머리를 가진 남자 장교가 차량에서 나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남자는 장교용 방한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열린 코트를 통해 국선장 금장과 황금 십자 훈장이 보이고 있었다.

“……!”

저 남자가 바로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긴장해서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번라드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다니엘이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입을 통해 흘러나온 숨결이 한기가 되어 흩어진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초기지를 살펴보던 다니엘이 번라드를 바라본다.

눈이 마주친 순간 번라드는 기계적으로 팔을 올렸다.

“환영합니다! 대대장님!”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니엘이 움직일 때마다 분지에 쌓인 눈들이 짓밟히며 군홧발이 찍힌다.

장신의 키를 가진 다니엘이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걸어오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의 늑대처럼 보인다.

단지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뿐인데도 기세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도저히 시선을 마주칠 수 없었던 번라드가 의도적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자, 지근거리에 도달한 다니엘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귀관의 이름은?”

손을 내린 번라드가 열중 쉬어 자세를 취했다.

“공수특전여단 예하 특수전 중대 소속 대위 번라드입니다!”

“병력은?”

“예! 현재 중대 병력 현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총 47명 중 부상자 1명을 제외한 46명 모두 작전 수행 가능한 상태입니다!”

번라드의 보고를 들은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일 년간 임무 대기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서 해이해졌을거라 생각했는데 기강이 잘 잡혀 있어.”

“과찬이십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눈치를 보던 번라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입니다만 제국의 영웅이신 다니엘 중령님께서 이런 오지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벨모어 왕국에 포로로 잡힌 한스 제른메하트를 구출하기 위함이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대대장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부대를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계획에 근거한 명령을 내려주시면 바로 시행토록 하겠습니다.”

한기 어린 숨을 내쉰 다니엘이 번라드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내릴 명령은 하나. 현상 유지다.”

그리 말한 다니엘이 번라드를 지나치며 말했다.

“춥군. 숙소까지 안내해라.”

잠시 멍하니 있던 번라드가 급히 대답했다.

“아. 예! 알겠습니다!”

다니엘의 옆에 따라붙은 번라드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였다.

‘현상 유지라는 건…….’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소리처럼 들렸으니까.

*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소리가 맞았다.

벨모어 왕국 접경지대 분지의 전초기지에 합류한 지 열흘이 지난 지금.

다니엘 슈타이너는 독서에 열중이었으니까.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은 다니엘이 뭉클한 마음속에서 책을 덮는다.

책의 제목은 눈물을 마시는 제빵사였다.

‘좋은 이야기였어…….’

이 시대에 이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이 있다니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작가에게 팬레터라도 보낼까 싶었던 무렵에 작전지휘실의 문이 열린다.

문 너머에는 루시가 서 있었다.

“다니엘 중령님.”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자 루시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런 명령도 안 내리실 생각이십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잘 모르겠군. 나는 분명 현상 유지 명령을 내렸지 않은가.”

“그걸 아무것도 안 하는 거라 생각하는 병사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가. 시기가 조금 빠르기는 하지만 불만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모 본부 직할 부대의 병사들은 자원해서 군에 입대한 정예들이니까.

작전지에 도착했는데 자신의 상관이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으면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었다.

‘병사들의 불만이 여론이 되면 곤란하겠군.’

다니엘 슈타이너가 작전지에서 임무에 태만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면 복귀 명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훈련을 빌미로 뭐라도 해야겠는데…….’

제도에 돌아가는 것은 피하고 싶었던 다니엘이 머리를 굴렸다.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던 다니엘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전 병력에게 전해라. 내일 아침이 밝자마자 서쪽 산악 지대의 능선을 타고 올라간다. 목적은 적 동향 정찰 및 진지 구축 훈련을 하기 위함이다.”

루시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동쪽이 아니라 서쪽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접경지대는 동쪽입니다.”

그러니까 서쪽으로 가야지.

동쪽으로 갔다가 정말 적이랑 마주치기라도 하면 불상사가 발생할 확률이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마지 못해 일 하는 척을 하는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다니엘은 자신의 천재적인 발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깔보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부관. 내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이리 말하는 것 같나.”

루시는 고개를 저었다.

노르디아 침공 작전에서부터 벨라노스 내각총리대신과의 협상에 이르기까지, 다니엘 슈타이너는 기상천외한 방법들로 적을 굴복시키고는 하였으니까.

이번에도 그 일환이라고 생각한 루시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모든 병력에게 내일 오전부터 이동해야 하니 군장 준비를 마치라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루시가 작전지휘실을 나서며 문을 닫는다.

덕분에 홀로 남은 다니엘은 책을 펼쳤다.

명장면이라 생각한 구간을 다시 읽기 위함이었다.

*

벨모어 왕국.

접경지대 전초기지 지휘 군막.

“그대들은 지금 접경지대 인근 분지에 위치한 적 전초기지에 다니엘 슈타이너가 합류했다는 소식을 알고 있나.”

왕세자 블레프의 말에 지휘 군막 안에 술렁임이 감돈다.

다들 눈치를 보고 있을 때 대령 갈레발트가 말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국의 악마가 저곳에 있다는 것이…….”

“그렇다. 제국 측 인사에게 직접 들은 정보이니 틀림없어.”

“맙소사. 그렇다는 소리는…….”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는 블레프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신께서 내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주신 것이지. 다니엘 슈타이너를 포로로 잡는 것에 성공한다면 나는 더 이상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된다.”

블레프는 왕세자이기는 하지만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동생 때문에 그 지위가 불안하였다.

동생이 전장에서 연달아 군공을 올리는 바람에 그의 형 되는 블레프의 지지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최근 반 강제적으로 전장에 나오게 된 것인데, 아주 운이 좋게도 다니엘 슈타이너가 인근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들은 것이다.

‘연합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다니엘 슈타이너를 포로로 잡는 것에 성공한다면…….’

머저리 같은 동생은 절대 자신을 넘볼 수 없을 것이며 연합국 내에서의 지위 또한 상승할 것이 분명하였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왜 이곳에 온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에서 먼저 정보를 취득한 순간 승기는 기울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를 사로잡은 이후에 누릴 달콤한 영광들을 상상하던 블레프가 입을 열었다.

“대령. 지금 당장 정예병으로 이루어진 대대를 편성하도록 해라. 내일 아침이 밝는 즉시 우리는 적 전초기지를 치러 갈 것이니까.”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군막에 잔잔히 감돌았다.

“기다려라. 다니엘 슈타이너…….”

탐욕에 젖은 블레프의 두 눈동자가 번뜩인다.

“내 친히 제국의 악마라 불리는 네놈을 사냥할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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