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s

Chapter 98 - Chapter 98

다니엘의 올곧은 시선에서는 진심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베르트함은 바보가 아니었기에 지금 저 말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는다.

“…….”

“…….”

침묵이 길어지고 있지만 둘 중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건 비단 다니엘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황제 베르트함 또한 이제는 다니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에 놓였기 때문이다.

현재 늙고 병든 베르트함은 권력의 이양기에 놓여 있었다.

젊고 용맹했던 시절의 자신이라면 다니엘을 역으로 협박해서 목줄을 채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황실의 권력은 양분되어 있었으며 다니엘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신들은 이제 황제가 아닌 황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황제가 붕어(崩御) 하면 제국의 다음 수십 년을 지배할 것은 다름 아닌 셀비아였으니까.

곧 찾아올 셀비아의 치세에서 다니엘은 명실상부 공신이자 충신의 취급을 받을 것이었다.

셀비아의 총애 속에서 수많은 국민들의 지지가 다니엘에게 향할 게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다니엘을 핍박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킨다면…….’

국민들이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셀비아의 지지기반이 흔들리고 말 것이다.

자신을 황제의 자리에 앉게 해준 충신을 소홀히 대한다면 숱한 비난에 시달릴 테니까.

대리청정을 맡고 있는 이상 셀비아는 황제의 독단이라는 변명으로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물론 셀비아가 다니엘을 핍박하는 것에 동의할 리는 없겠지만, 자그마한 가능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베르트함은 묘한 불쾌함을 느꼈다.

불쾌함의 근원은 다니엘 슈타이너가 이 모든 것을 파악한 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연. 네 몸에는 블랙베리의 피가 흐르고 있구나.’

다니엘은 자신의 말이 어디까지나 ‘수도원장에게 들은 이야기’라 밝히는 것으로 불경죄를 피해가고 있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니엘을 키워낸 수도원장에게 교차 검증을 요구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수도원장이 ‘기억이 잘 안 난다’라고 대답해버리면 과거의 일은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니까.

‘만약 실제로 들은 이야기라고 해도…….’

그걸 입 밖에 내는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다니엘은 동화 이야기를 빌려 자신의 의중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교활한 여우 같으니라고…….’

현실을 해학하고 풍자하는 것이 동화라고 하던가.

지금 이 자리에서 동화가 재현되고 있음을 느낀 베르트함이 헛웃음을 흘렸다.

“상호파괴를 확증하는 상황에서는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이건가. 재미있는 해석이군.”

베르트함의 말을 들은 다니엘은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몰려오는 취기에 이성이 흔들린 나머지 도박수를 던진 것이 내심 불안했었는데, 베르트함이 웃으며 넘기고 있으니 안심이 된 것이다.

“동화 이야기는 이쯤 하면 된 것 같으니 이제는 자네의 포상에 대해 논해보도록 하지.”

“……포상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가 말하지 않았나. 만약 자네가 벨라노스 내각총리대신과의 회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는다면 제국의 기초 이념인 신상필벌에 의거 상을 내리겠다고 말이다.”

다니엘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저 말이 일종의 덫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황제의 입에서 나오는 포상에 아무런 조건도 없을 리가 없었다.

‘포상을 내려달라 하면 분명 내게도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다.’

베르트함은 상을 준다고 하였지 벨라노스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제때 보고하지 않은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니 보고의 지연을 핑계로 삼아 포상에 이런저런 조건을 달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짧은 순간 머리를 굴린 다니엘은 먼저 선수를 치기로 하였다.

“폐하. 받고 싶은 포상이라면 벨라노스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제가 독단적으로 임무를 수행한 것을 용서받고 싶습니다. 그 외에는 따로 바라는 것이 없사옵니다.”

베르트함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받고 싶은 것이 없다?’

베르트함은 다니엘이 포상을 요구하는 순간 그걸 빌미로 삼아 형식적인 감찰을 받으라고 제안했을 것이다.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감찰을 실시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

마침 다니엘은 벨라노스에서 조난을 당했을 때 보고를 지연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감찰을 받아야 하는 명분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더해 일방적인 압박에 의한 감찰이 아닌 ‘포상을 주기 위한 감찰’이라고 포장할 수 있었기에 국민들의 반발을 살 일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 다니엘이 포상을 원했다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할 수 없기에 감찰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니엘은 베르트함의 예상을 비껴나가고 있었다.

바라는 것은 오직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죄를 면제받는 것이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덕분에 베르트함이 짓고 있는 은은한 미소에 균열이 일어난다.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것처럼 이리저리 피해가는 다니엘의 화술에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정말 일개 장교라고?’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정치인과 대화를 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국제 연합을 이끌고 있는 칼레드라와 회담 자리를 가졌을 때가 생각날 정도로 말이다.

충심을 연기하고 있는 저 표정 안에 도사리고 있을 흑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마른 침을 삼킨 베르트함이 태연함을 가장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묻겠네. 네 죄를 사하는 것 외에 정말로 받고 싶은 것이 없는가?”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을 깊이 후회하고 있는 바, 폐하께서 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을 최고의 포상으로 여기겠습니다.”

겉으로는 충신을 연기하고 있었기에 차마 나무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제야 황제 베르트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목줄을 채울 수가 없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베르트함이 마련한 모든 덫을 보라는 것처럼 회피하고 있었다.

심지어 덫을 피한 늑대는 천천히 다가와서 사냥꾼인 베르트함에게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나를 죽이려고 든다면 나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자조의 미소를 지은 베르트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원하는 게 그것뿐이라면 나도 말리지 않으마.”

테라스를 통해 불어오는 바람이 술기운을 달아나게 만든다.

“밤바람이 차구나. 슬슬 들어가 봐야겠지. 자네도 최근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피로가 쌓였을 텐데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게.”

“명령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니엘이 베르트함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다니엘이 발길을 돌려 나가기 전에 베르트함이 지나가듯 말을 흘렸다.

“자네가 보기에 내 딸아이는 성군이 될 수 있을 것 같은가.”

다니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위대한 제국에 걸맞은 사람이 되실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 다니엘이 다시금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발소리를 들은 친위대 병사들이 문을 열어주자 다니엘은 복도로 빠져나갔다.

다니엘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내명부장이 베르트함을 향해 다가간다.

“폐하.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메마른 웃음을 흘린 베르트함이 위스키 병을 들어서 잔을 채웠다.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이 이야기의 본질이라면 잘 끝났다고 볼 수 있겠지.”

느리게 채워지는 잔을 바라보던 베르트함이 말을 이었다.

“내명부장. 나는 아무래도 다니엘 슈타이너를 증오하고 있는 모양일세.”

“……폐하?”

“그러나 가장 애정하고 있는 자도 다니엘 슈타이너라 말하면 믿겠는가?”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베르트함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녀석이 나의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이 지긋지긋한 격정과 고민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소리를 내뱉은 베르트함이 테라스를 향해 다가간다.

황제가 테라스에 나와 바람을 맞고 있자 축제를 즐기던 시민들이 하나 둘 올려다본다.

그들이 무어라 소리치자 시민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서 황제 베르트함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준 베르트함이 술잔을 높게 들어 올리자 와하하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바람을 타고 ‘황제 폐하 만세!’라는 말소리와 ‘다니엘 슈타이너 만세!’라는 말소리가 섞여 들려오고 있었다.

베르트함에게 있어 저 말소리는 단순한 환호성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마치 제국에는 두 명의 주인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으니까.

‘물론…….’

이 생각은 예민해진 마음이 세상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의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약 다니엘 슈타이너가 세상에 다시 없을 충신이라면…….’

제국은 결단코 번영하리라.

그 옛날 조부님이 다스리던 제국처럼 위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이었다.

그곳에서 셀비아는 성군으로 다니엘은 공신으로 대대손손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슈타이너가 정치적 야망에 휩싸여 권력을 탐하는 늑대라면…….’

이 제국은, 다시는 없을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었다.

More Chap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