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을 체류할 수 없다면 며칠만이라도 더 벨라노스에 있고 싶었던 다니엘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정오가 되자 황실에서 보낸 전용기가 텐타르바헴에 도착하였기 때문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즉시 복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고, 덕분에 다니엘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전용기에 탑승할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이 하르트만의 호위를 받으며 탑승하자 전용기는 곧장 이륙하여 제도로 향하였다.
제도의 상공을 자유롭게 날던 전용기는 황궁 인근의 공항에 착륙하였다.
전용기에서 내린 다니엘은 노을지는 하늘을 배경 삼아 서 있는 내명부의 인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을 위시하고 있는 내명부장은 ‘황제 폐하께서 기다리신다’는 말과 함께 다니엘을 황실의 의전 차량에 태웠다.
솔직히 말해 쉬고 싶은 다니엘이었지만 황제의 명령이라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차량을 타고 황궁으로 이동한 다니엘은 내명부장의 안내에 따라 ‘황금의 안식’이라 불리는 방으로 향했다.
도대체 무슨 방인지 알 수가 없었던 다니엘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황제 폐하께서 혼자 음주를 하시거나 사색을 할 때 들리는 방’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요컨대 황제의 개인 공간에 초대를 받게 된 것이다.
왜인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이 들었던 다니엘은 긴장을 유지한 채 이동하였고, 황궁의 최상층에 올라가서야 발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이 너머에 황제 폐하께서 계십니다.”
내명부장이 가리킨 문은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제야 이 방의 이름이 왜 황금의 안식인지 이해가 되는 다니엘이었다.
“폐하께서는 묻는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걸 싫어하시니 최대한 빨리 말을 받으시는 게 좋을 것으로 압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니엘이 내명부장의 조언에 고개를 끄덕인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내명부장이 문을 툭툭 두드렸다.
“폐하!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폐하를 알현하러 왔사옵니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여보내라는 말이 들려온다.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것으로 예의를 표한 내명부장이 시선을 보내자, 문의 양옆에서 대기중인 친위대 병사들이 움직였다.
그들이 방의 문을 열어주자 방의 테라스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는 황제의 등이 보였다.
방 안에는 금빛 장식이 가미된 대형 벽화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천장은 유리돔 형식인지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달빛이 그대로 투과되고 있었다.
바닥에는 값비싼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방의 한 쪽을 장식하고 있는 유리 술장에는 살면서 한 번 보기도 힘들다는 고가의 위스키들이 즐비하였다.
그야말로 사치로 이루어진 극락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라 몸이 저절로 위축된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다니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방의 중앙으로 걸어가 황제 베르트함을 향해 경례를 올렸다.
“황제 폐하! 참모 본부 소속 작전 참모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외교 대사의 임무를 수행하고 복귀하였음을…….”
다니엘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베르트함이 인사치레는 그만두라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니엘이 경례를 위해 올린 손을 내리자 베르트함이 조용히 말했다.
“이리로 오게. 자네에게 보여줄 것이 있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은 베르트함을 향해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베르트함은 다니엘을 곁눈질하더니 손을 들어 지상을 가리켰다.
“보이는가. 짐의 국민들이 말이다.”
다니엘은 베르트함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거리에 나온 수많은 인파들이 손을 흔들며 함성을 내지른다.
정확한 숫자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최소 일만 명에 달하는 군중이었다.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본 다니엘이 얼떨떨하게 굳어 있으니 베르트함이 웃음을 흘렸다.
“이들 모두가 자네의 생환을 축하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네. 축제 분위기가 따로 없어. 반쯤은 축제를 즐기고자 하는 명분으로 자네의 생환을 축하하는 거겠지만 말일세.”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모였을 줄은 몰랐습니다.”
“전쟁 영웅의 생환인데 이 정도면 적은 편이지. 이걸 보고 있으니 마치 내가 첫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제도에 복귀했을 때가 떠오르는군. 모두가 나의 업적을 칭송하였지.”
인파를 지긋이 내려다보던 베르트함의 두 눈이 반개한다.
“그런 국민들이 지금은 자네의 업적을 칭송하고 있군. 그럼 한 번 물어보지. 이들은 짐의 국민들인가 아니면 자네의 국민들인가.”
평온한 물음이었으나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쉬이 받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황제가 이리도 대놓고 자신을 경계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낀 다니엘이 곧장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국민들이 저를 칭송하는 것은 크게 보면 황제 폐하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일개 장교일 뿐이며 제국의 명령을 받드는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국은 곧 황제 폐하이시니 어찌 저들이 저의 국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의 변명에 베르트함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권력을 대하는 것에 익숙해졌군. 목소리의 떨림이 많이 줄어들었어.’
처음 대면했을 때의 다니엘은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면, 지금의 다니엘은 눈치를 보되 여유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권력자와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졌다는 방증이었다.
그런 다니엘을 유심히 지켜보던 베르트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일어나게. 술이나 한 잔 하도록 하지.”
베르트함이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베르트함은 방의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마호가니 원목 테이블로 걸어갔는데, 그곳에는 고급 위스키와 함께 크리스탈 잔 두 개가 놓여있었다.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가자 베르트함이 자리에 앉아서 위스키 병을 들었다.
“앉도록 해라.”
“예. 폐하.”
고개를 꾸벅 숙인 다니엘이 의자에 착석하자 베르트함이 위스키를 따라준다.
병 안에서 나오는 위스키의 색감은 황금빛이 섞인 호박색이었다.
최고급 위스키라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는 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폐하?”
당황한 다니엘이 베르트함을 바라본다.
베르트함이 잔이 가득 찰 정도로 위스키를 따라주었기 때문이었다.
위스키는 본래 이렇게 마시지 않는다.
특히나 최고급 위스키일 경우 맛과 향을 음미하며 조금씩 마시는 것이 정상이었다.
베르트함 또한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잔에 가득 위스키를 따라준 것이다.
“일단 마시게.”
“하지만…….”
“나도 마시겠네.”
베르트함이 자신의 잔에도 위스키를 가득 따라낸다.
그걸 본 다니엘이 기겁하며 말했다.
“폐하! 병세가 완화되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술을 드시면 큰일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르트함은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 이렇게 마신다고 죽을 것도 아니고, 안 마신다고 살 것도 아닐세. 그러니 들도록 하지.”
잔에 술을 다 따라낸 베르트함이 위스키 병을 옆으로 치운다.
베르트함이 잔을 들었고, 다니엘 또한 거절할 수 없음으로 잔들 들었다.
둘은 가볍게 눈을 마주친 후 잔에 담긴 위스키를 목 너머로 모두 비워버렸다.
베르트함은 침음을 흘리며 술을 소화해내었으나 다니엘은 연신 기침을 터트렸다.
베르트함은 젊을적에 자주 했던 행위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 위스키를 잔 가득 따라서 한 번에 마시는 행위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곧 죽을 것처럼 기침을 하는 다니엘을 바라보던 베르트함은 곧 폭소를 터트렸다.
“술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영 아니군. 그것도 못 마셔야 되겠는가?”
“이건…… 쿨럭! 처음 있는 일이라…… 죄송합니다.”
겨우 숨을 돌린 다니엘이 숙였던 허리를 들며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낸다.
그런 다니엘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던 베르트함이 조용히 목소리를 흘렸다.
“자네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동화가 하나 떠오른단 말이지.”
“……동화 말씀이십니까?”
“그래. 용맹한 사자와 지혜로운 여우라는 동화를 아는가?”
모를 리가 없었다.
저 동화는 제국에서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유명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인간으로부터 숲을 지켜내는 것에 성공한 용맹한 사자가 숲속 동물들을 모두 불러 모은다.
사자는 이곳에 인간과 내통한 동물이 있다면서 한 명씩 심문하여 잡아먹는다.
그들 중 유일하게 여우만이 살아서 빠져나간다는 내용이다.
부모님이 없는 다니엘 또한 수도원장님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였다.
“그 동화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간첩이겠지요.”
“그렇다면 말이 통하겠군. 그대가 보기에는 여우가 무슨 꾀를 내어 사자의 먹이가 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 같나?”
이 이야기에는 꽤나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여우가 꾀를 내어 빠져나간다는 부분에 대한 해석이 각 가정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각자 이야기를 지어내서 여우가 무슨 꾀를 내었는지를 아이들에게 말해주고는 하였다.
‘물론…….’
다니엘은 베르트함이 정말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대체 언제까지 나를 떠보려는 거지?’
지나치게 큰 공을 쌓은 전쟁 영웅을 견제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다.
다니엘 또한 말년에 이른 황제의 의심병이 커지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급하게 마신 술의 취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황제는 벨라노스에서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시킨 내게 책을 잡을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의 대화는…….’
단순한 꼬투리 잡기에 불과하였다.
“말해보게. 여우가 무슨 꾀를 내었을지에 대해서 말일세.”
두 번째 물음은 보다 날카로운 음성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물음에 침묵하지 말라던 내명부장의 말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고민에 휩싸이던 다니엘은 결국 수도원장님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들려주기로 하였다.
허튼 생각을 돌려 말하는 것보다 실제로 들은 말을 내뱉는 것이 뒤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폐하. 저를 키워주신 수도원장님이 들려준 말로 답변을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어린 시절 수도원장에게 들었던 말임을 피력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베르트함은 다니엘이 무슨 말을 해도 나무랄 수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잘 빠져나간다고 생각한 베르트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 번 말해보게.”
“예. 수도원장님은 사자가 여우를 찾아오기 전에 토끼를 만난 것을 먼저 언급하셨습니다. 토끼가 어떻게 죽었는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이다. 토끼는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싫어서 뇌물을 준비했지. 블랙베리를 한 바구니 가득 담아서 건네주었던 걸로 아는데…….”
“안타깝게도 사자는 극심한 블랙베리 알레르기를 앓고 있었지요. 자신을 능욕한다고 생각한 사자는 그 자리에서 토끼를 한 입에 먹고 말았습니다.”
“그래. 그랬었지.”
베르트함이 기억난다는 듯 호응하자 다니엘이 말했다.
“수도원장님이 말씀하시길, 그걸 본 여우는 전 날에 블랙베리를 엄청나게 먹었을 거라 하시더군요. 심지어 블랙베리를 자신의 집 곳곳에 놔두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베르트함이 의미심장하게 다니엘을 바라본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음날 사자가 집에 찾아오자 여우는 이리 말했다고 합니다. 사자님 사자님. 위대하신 사자님. 사자님은 저를 한 입에 삼키실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명심하셔야 합니다. 제 몸에는 블랙베리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저를 잡아먹는다면…….”
짧은 침묵 끝에, 다니엘이 베르트함을 마주 바라보았다.
“사자님 또한 죽음을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