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만년필을 받는 순간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선조들이 최선을 다해 지켜온 벨라노스가 사실상 제국의 속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만년필을 받지 않는 순간 일어날 참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다니엘의 말대로 제국은 개전을 선언할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제국이 개전을 선언한다면 벨라노스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수많은 국민들이 비명을 내지를 것이고, 장병들이 죽어나갈 것이며, 내각은 분열할 것이고, 정치인들은 살 길을 찾아 부화뇌동할 것이다.
그 끔찍한 혼란에서 피어나는 증오는 당연히 벨라노스의 정부 수반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들고 일어난 민중들은 내각총리대신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때 내각총리대신이 숨기고 있는 사생아가 있다는 정보가 퍼지기라도 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었다.
“…….”
잇새를 타고 침음이 흘러나온다.
속국이 되기를 거절하는 순간 제국은 벨라노스를 멸망시킬 것이 분명하였다.
‘이 모든 것을 계획한 것은…….’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다니엘은 외교 공관용 선박 격침 사건에서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에 생존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생존이 확인된다면 제국에서 자국의 전쟁 영웅을 수색하기 위해 함대를 보낼 명분이 없어질 테니까.
‘그러니…….’
다니엘 슈타이너는 죽음으로 자신을 위장한 채 제국에서 수색 함대를 보내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시간을 놀리지 않고 내 딸아이를 찾아내었다.’
이후 의도적으로 레프에게 접근한 다니엘은 친분을 쌓았다.
내각총리대신의 사생아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거처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레프는 다니엘의 생각대로 움직여주었고, 저택에 초대를 하는 실수까지 범하고 말았다.
그 사이 다니엘의 명령을 들은 사조직은 테러리스트에게 영해를 개방한 범인을 찾아내었다.
해군 대령인 에드볼이 자백하게 만드는 것으로 벨라노스 정부에 보다 쉽게 책임을 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니엘이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 제국의 함대가 텐타르바헴에 도착한다.
제국의 군대는 수색 작전을 위해 자연스럽게 텐타르바헴을 점거하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니엘 슈타이너는 이제 더는 숨길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하고 정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외교 대사의 임무로 복귀한다.
앞서 준비한 재료들로 벨라노스를 제국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다니엘 슈타이너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다.
‘다니엘 슈타이너. 정녕 네게 인간의 마음이 있기는 한 건가?’
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걸까.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이라고는 너무나도 치밀하고 계획적인 흉계였다.
분노와 슬픔 속에서 일말의 경외심을 느낀 로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만 하였다.
만년필을 건네받은 로웰이 외교 제안서를 내려다보았다.
서명을 하기 위해 손을 내리던 로웰이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돌아본다.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되겠나.”
“예. 얼마든지요.”
“……서명을 할 터이니 내 딸아이의 안전을 보장해주게.”
다니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내각총리대신께서 제안서의 내용을 지켜주신다면 양국의 평화는 절대 깨지지 않을 테니까요.”
저 말은 곧 제안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악마 같은 놈. 이를 꽉 깨문 로웰이 반쯤 체념하며 제안서에 서명을 하였다.
다른 곳에도 몇 번 더 서명을 한 로웰이 문서를 들어서 다니엘에게 건네준다.
다니엘은 문서를 건네받고는 서류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좋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서로 얼굴을 붉힐 일도 없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입니다.”
서류 가방을 닫은 후 자리에서 일어난 다니엘이 로웰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다.
“회담이 끝난 것 같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위대한 벨라노스에 무궁한 영광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로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기에 다니엘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발길을 돌렸다.
그대로 접견실의 문을 연 다니엘은 수행원들과 함께 있는 정보국장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다니엘의 시선이 차갑다.
분명 대등한 위치일 텐데 정보국장은 어딘가 모르게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보국장이 말문을 열었다.
“……회담이 끝났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사관으로 돌아가 봐야 하니 길을 막지 마십시오.”
그제야 정보국장은 자신이 수행원들과 함께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치를 챙긴 정보국장이 길을 터주자 다니엘이 그 사이를 지나간다.
또각거리는 구둣소리가 울리면서 다니엘이 점점 멀어져간다.
그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던 정보국장은 내각총리대신을 보좌하기 위해 접견실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웰이 보인다.
잠시 망설이던 정보국장은 로웰을 향해 다가갔다.
“각하. 회담은 어떻게…….”
정보국장의 걸음이 서서히 멈춘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로웰의 두 눈동자가 공허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정보국장.”
로웰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힘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물기가 섞여 있는 목소리다.
한참 후에야 로웰은 쥐어짜내듯 말을 내뱉었다.
“……악마와 거래를 한 걸지도 모르겠어.”
자조와도 같은 로웰의 말소리에 정보국장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대체 이곳에서 무슨 말을 꺼낸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회담을 끝낸 다니엘은 의전 차량을 통해 대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석대사와 외교관들은 당연하게도 다니엘에게 회담 내용에 대해 물었고, 다니엘은 회담이 성공적이었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들은 차석대사와 외교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다니엘이 벨라노스 내각총리대신의 서명이 들어간 외교 제안서를 보여주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차석대사는 ‘성공적인 회담 정도가 아니라 벨라노스 정부에게서 충성 맹세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며 잔뜩 흥분하였으며 외교관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다니엘 슈타이너가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을 굴복시켰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텐타르바헴 항구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실로 충격적인 희소식은 당연하게도 친위대 수석 경호인 하르트만의 귀에도 들어갔다.
“다니엘 중령! 나일세!”
그것이 지금 하르트만이 대사관 사무실에 찾아온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문을 몇 번 두드리자 안쪽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십시오.”
허락을 받은 하르트만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외교대사 자리에 앉은 다니엘이 업무를 보고 있는 걸 확인한 하르트만이 미소를 지었다.
품에 신문들과 디저트를 든 채 가까이 다가가자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하르트만 중령님? 그건 뭡니까?”
“자네가 디저트를 좋아한다고 해서 사왔다네. 신문들은 지난 며칠 동안 쌓인 제국 일보야. 자네가 궁금해할 것 같아 가져왔네. 그런데…….”
다니엘이 서류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본 하르트만이 의아함을 느꼈다.
하르트만이 신문과 디저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회담이 끝났는데 왜 아직도 일을 하고 있나?”
“서류상 조약이 체결되었다고는 해도 국회의사당에 비준 요청을 해야 하니까요. 관련 서류를 작성중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황제 폐하께 최종적인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음.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바쁘다는 건 알겠군.”
다니엘과 술이나 한 잔 하면서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를 축하하고자 했던 하르트만이 괜히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와중에 다니엘이 서류 작성을 끝마치고는 신문을 돌아본다.
벨라노스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제국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궁금했으니까.
‘특히…….’
조약의 최종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황제 베르트함과 독대해야 할 텐데, 그 전에 제국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었다.
다니엘은 일단 가장 오래된 신문부터 집어서 헤드라인만 읽기로 하였다.
『벨라노스로 향하던 외교 공관용 선박이 격침당하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황녀 전하께서 비상 소집령을 내리시다!』
『제국 국방부, 벨라노스 측에 국경을 개방하라 통보하다.』
다음 신문을 펼쳤다.
『영웅의 죽음에 시민들이 동요하다.』
『제도 각지에서 영웅의 죽음을 애도하는 물결이 일어나.』
『황녀 전하께서 ‘이는 크나큰 손실이며 반드시 진상을 규명할 것’이라 알려.』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음 신문을 펼쳤다.
『분노한 시민들, 제국의 영웅을 죽인 범인은 연합국이라 단정하고 연일 시위.』
『반전주의자들은 제국의 적? 국회의사당의 한 의원이 극단적인 발언을 해 논란.』
『테러리스트의 만행에 분노한 청년들, 거리로 나와 다니엘 슈타이너의 죽음을 규명해달라 호소.』
심호흡을 한 다니엘이 가장 최근 신문을 펼쳤다.
『다니엘 슈타이너! 죽음에서 돌아오다!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제국!』
『테러리스트의 공격에서도 살아 남은 다니엘 슈타이너, 일각에서는 신의 기적이라 칭해.』
『황녀 전하, 다니엘 슈타이너의 생환은 전 국민은 물론이고 나 또한 기다린 일이라 기쁨을 표현하시다.』
헤드라인을 다 읽은 다니엘이 신문을 접었다.
골머리를 앓던 다니엘이 하르트만을 올려다본다.
“하르트만 중령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응? 뭔가?”
“저는 조약 이행의 현지 적용을 감시하고 대외 공보 활동을 하기 위해 이곳 벨라노스에 남고 싶습니다. 제국에 돌아가는 것은 최소한 몇 달 뒤로 미루고 싶으니 이를 황녀 전하께…….”
다니엘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하르트만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할 거라 보는가? 전하께서는 하루 빨리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네.”
덕분에 다니엘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 제국에 돌아가면…….’
대체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