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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5 - Chapter 95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로웰이 무어라 반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찰나에 다니엘이 한발 물러났다.

“이런. 본격적인 회담에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것이었는데 너무 과열된 게 아닌가 싶군요. 일단 앉아서 회담을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로웰은 긴장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 슈타이너와 싸우고자 이곳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옷매무새를 한 번 가다듬은 로웰이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걸 본 다니엘 또한 착석한 후 무릎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렸다.

여상한 손짓으로 서류 가방의 지퍼를 연 다니엘이 안쪽을 뒤적거린다.

“그럼 지금부터 제국의 제안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 여기에 있군요.”

다니엘이 서류를 몇 장 꺼내 로웰에게 건넨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결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의가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주시고요.”

웃으며 서류를 건네는 다니엘이 가증스럽게 느껴진다.

마뜩잖은 눈빛으로 다니엘을 바라보던 로웰이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불쾌한 기색 없이 양손을 모은 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정중한 태도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이쪽을 깔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로웰은 다니엘을 경계하면서 서류를 한 번 읽어 내려갔다.

서류에 적힌 내용은 일견 간단해 보였다.

테러리스트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요구하며 공식적인 성명을 낼 것을 요청, 보다 세밀한 조사를 통한 진상 규명 요구와 함께 배상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로웰 또한 납득하고 받아들일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의 항목에 있었다.

‘제국 무역에 대한 관세 철폐, 항구도시 텐타르바헴에 제국군의 주둔 허용, 군사 기지 건설에 대한 협조, 국경 상시 개방?’

여기까지만 해도 어이가 없는데 더 큰 문제는 마지막 항목이었다.

『테러리스트 방지법을 제정하여 일부 고위 공직자 및 군 장성 임명시 제국에게 상세한 정보를 전달할 것을 요구합니다. 제국에서는 이를 면밀히 판단한 후 테러리스트 재발 방지를 위해 필요에 따라 감찰 감독을 실시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테러리스트 방지법으로 말을 돌리고 있었지만 결국 내정 간섭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이건 아무리 봐도 중립국에 대한 요구라기보다는 패전국에 대한 요구에 가까웠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로웰이 서류를 테이블에 내팽개쳤다.

“대체 뭐하자는 건가!? 지금 이딴 걸 제안서라고 가져왔나?”

“……뭔가 잘못되었습니까?”

“뭐가 잘못되었냐고? 정말 제정신인가!? 벨라노스는 중립국일세! 국제적인 분쟁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약속을 맺었단 말이네! 그런데 그런 벨라노스가 제국의 군대를 받아들이고 내정 간섭을 받는다면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나!”

손을 든 로웰이 다니엘을 향해 삿대질을 하였다.

“다니엘 슈타이너! 이건 명백한 주권 침탈 행위다! 국제 사회에서 이 짓거리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다! 또한 자네가 이 제안서를 건넨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야! 내각총리대신의 이름으로 제국 외교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니엘이 별안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 외교부에 항의하다니요? 방금 제 말을 못 들었습니까. 분명 이 자리에 있어서만큼은 제가 곧 제국이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로웰의 두 눈이 좁혀진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을 무렵에 다니엘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좋습니다. 내각총리대신께서 강경하게 나오시니 저 또한 진실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방금 국제 사회가 벨라노스의 주권 침탈을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용납할 것 같아 보이는군요.”

“그게 무슨…….”

“모두가 알다시피 제국 공관용 선박을 격침시킨 테러리스트에게 길을 열어준 것은 다름 아닌 벨라노스 해군입니다. 이를 부정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그 배후가 누구일까. 내각총리대신께서는 범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로웰이 마른 침을 삼켰다.

“에드볼 대령의 말로는 연합국에서 뇌물을 받았다고…….”

“예.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벨라노스 정부에서 직접 제국 정부에 전보를 보내주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 증거가 있습니까? 연합국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 말입니다.”

로웰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닫을 수밖에 없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국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아! 벨라노스가 제국의 외교 공관용 선박을 공격해놓고 연합국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구나. 범인은 벨라노스의…….”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다니엘이 로웰을 빤히 바라본다.

“내각총리대신이구나.”

식은땀을 흘리던 로웰이 급히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논리적 비약이다! 벨라노스가 대체 왜 제국의 외교 공관용 선박을 공격한다는 말인가! 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다니엘이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증거를 제시하십시오. 간단한 일 아닙니까?”

로웰은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의 질문에 대답하면 대답할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강하게 받았으니까.

“증거가 없는 이상 제국은 벨라노스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저는 벨라노스가 제국의 외교 공관용 선박을 공격했을 리 없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각총리대신께서 지금의 이 제안을 거절하신다면 제국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몸을 뒤로 기울인 다니엘이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댄다.

“벨라노스의 해군이 제국의 민간인을 죽였다. 명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제국은 선전포고를 할 것이고 국제 사회는 침묵하겠지요. 선전포고에 대한 이유가 너무나도 명확하니까요.”

다니엘의 낮은 웃음소리가 적막 속에서 안개처럼 내리깔린다.

“연합국 또한 벨라노스를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민간인이 희생된 것에 대해 제국을 향해 깊은 유감을 표해놓고, 제국이 국민의 복수를 하러 나서겠다고 들고 일어나는 걸 제지할 순 없을 테니까요. 이때 벨라노스를 두둔하면 공범이라는 걸 자처하는 꼴이지요. 그리고…….”

다니엘이 손가락을 튕기고는 위스키가 남은 잔을 가리켰다.

“드시지 않으실 거면 제게 좀 주시겠습니까? 목이 말라서 말입니다.”

로웰이 눈동자만 돌려 위스키가 담긴 잔을 바라본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로웰은 잔을 들어서 다니엘에게 건네주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로웰을 손을 본 다니엘이 잔을 가볍게 건네받는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미소를 지으며 잔을 건네받은 다니엘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그러며 감탄을 내질렀다.

“역시 고급품은 다르군요. 고급 위스키는 증류 과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더니 풍미가 무척이나 좋습니다. 앞으로 이런 걸 못 마시게 되면 인생이 참으로 고달프겠습니다.”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인지는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었다.

위스키 잔을 돌려가며 술의 색감을 감상하던 다니엘이 잔을 내려놓았다.

“잠깐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군요. 계속해서 말씀드리자면, 선전포고를 한 제국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벨라노스에 군대를 상륙시킬 수 있을 겁니다.”

현재 벨라노스의 항구도시인 텐타르바헴은 제국군이 점령중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있는 한 벨라노스는 제국의 상륙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전쟁 시작과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았다.

“벨라노스에 상륙한 군대는 순식간에 수도까지 진격할 겁니다. 내각총리대신께서도 익히 들어 아시겠지만 제국은 전면전을 선포한 이후 엘드레시아 왕국을 한 계절이 지나기 전에 함락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엘드레시아보다 규모가 작은 벨라노스는 얼마나 걸릴까요?”

다니엘이 장난스럽게 손을 들어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이 주. 이 주면 충분할 겁니다.”

로웰의 숨소리에 물기가 섞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름도 안 되는 시간에 제국군은 벨라노스의 수도까지 진격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벨라노스의 국민들은 제국의 무자비함에 분노함과 동시에 정부의 무능함을 증오할 것입니다.”

소파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린 다니엘이 말했다.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증오는 곧 내각총리대신께 향하겠지요. 어쩌면 민중 봉기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제국은 진격을 멈추고 벨라노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할 것입니다. 그러며 은근슬쩍 정보를 풀게 되겠지요.”

다니엘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에게 사생아가 있다더라.”

로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저 말이 내포하고 있는 끔찍한 참상이 머릿속에 재생된 덕분이었다.

결국 로웰은 참지 못하고 흐느끼고 말았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다니엘이 목소리를 낮춘다.

“이해합니다. 모든 걸 잃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지금 내각총리대신께서는 상상이 현실이 되지 않게끔 처신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라 봅니다.”

다니엘이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로웰을 향해 건넨다.

고개를 든 로웰은 흐느낌 속에서 다니엘을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 있어 누가 갑이고 을인지는 로웰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평생을 우리 안의 사자로 살아온 로웰은 눈앞의 늑대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로웰의 눈동자에서 투쟁의 빛이 사라지는 걸 목격한 다니엘이 만년필을 가볍게 흔들었다.

“제안서에 서명을 하십시오. 그래야만 모든 게…….”

낮고 스산한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이어진다.

“없던 일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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