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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4 - Chapter 94

정체를 밝힌 이후 다니엘은 마도기동대의 극진한 호위를 받으며 대사관으로 향했다.

이제 신변의 안전이 확보되었으니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인 셈이다.

마치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대사관에 입장한 다니엘은 울며 겨자 먹기로 벨라노스 내각총리대신과의 회담을 준비하였다.

그렇게 사흘간 대사관 내부의 차석대사와 외교부의 도움을 받아 벨라노스 측에 건넬 제안서를 작성하던 와중이었다.

똑똑─

적막한 사무실 안에 울리는 노크에 서류를 넘기던 소리들이 멈춘다.

고개를 든 다니엘이 주변을 한 번 돌아보았다.

“……차석대사님.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런데 이 시각에 대사관에 찾아올 손님이 있었습니까?”

안경을 벗은 차석대사는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들은 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방문자에 대해 추측하려는 찰나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울린다.

“다니엘 중령? 나일세!”

목소리를 들어보니 친위대 수석 경호를 맡고 있는 하르트만 중령이었다.

그제야 안심한 다니엘이 문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허락을 받은 하르트만이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손에는 붉은 색감의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걸 본 다니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칙령서……!’

저건 황제의 명령이 적힌 두루마리였다.

예전에 하르트만을 통해 훈장을 받을 때 본 적이 있었으니 확실하였다.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사관 내의 외교관들과 차석대사 또한 기립한다.

“이거…….”

그 모습을 본 하르트만이 손을 들어 뺨을 긁적였다.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하게 됐군. 미리 연락이라도 할걸 그랬어.”

“아닙니다. 황제 폐하의 명령일진대 저 같은 일개 참모의 편의를 봐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군인의 귀감이 따로없었다.

다니엘을 지긋이 바라보던 하르트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황제 폐하의 명령을 전달하겠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하르트만의 앞으로 가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차석대사와 외교관들 또한 무릎을 꿇는 것으로 예의를 보이자, 하르트만이 칙령서를 휘감고 있는 금색 실을 풀어헤친다.

헛기침을 하는 것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은 하르트만이 칙령서를 펼치고는 말했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듣거라! 짐이 알기로 그대는 선박이 격침당한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벨라노스의 해안가 중 한 곳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들었다. 허면 왜 지엄한 황실에 이 사실을 제때 보고하지 않았나?”

무언가 느낌이 이상하다.

다니엘이 초조해하는 와중에 하르트만이 말을 이었다.

“벨라노스에 존재하는 적이 두려워 정체를 숨겼다고는 하나 짐이 듣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변명이다. 적이 두려웠던 자가 어찌 벨라노스에서 암약하며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탈취할 수 있었나? 그대의 행동은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낮게 침음을 흘렸다.

“하여 짐은 그대에게 죄를 묻고자 당장 송환코자 하였으나, 대리청정을 수행하고 있는 내 딸아이가 필사적으로 말렸음에 생각을 바꾸었다.”

셀비아가? 의외라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든다.

“다니엘 슈타이너. 그대가 확보한 기밀이 정말로 쓸만한 것이라면 이번 외교 회담에서 좋은 성과를 내리라 믿는다. 그리한다면 제국의 기초 이념인 신상필벌에 의거 그대에게 벌이 아닌 상을 내릴 것이다.”

요컨대 확보한 기밀을 바탕으로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과 개인적인 거래를 하지 말고, 제국을 위해 이바지하라는 협박 아닌 협박인 셈이었다.

딱히 개인적인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던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크게 불리한 조건이 아니었다.

‘문제는…….’

성과를 내지 못 했을 경우다.

황제의 성정을 돌이켜보면 장차 자신 혹은 딸아이의 정적이 될 인물을 집요할 정도로 경계하는 정치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분명 내가 눈엣가시겠지.’

의도치 않았다고는 하나 일개 장교에게는 과분할 정도의 공을 쌓았다.

황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성과를 내지 못하는 순간 그걸 빌미로 삼아 수시로 괴롭힐 것이 뻔하였다.

‘내가 순순히 당할 것 같나.’

사람을 의심하고 떠보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예전에는 있지도 않은 사조직을 내가 운용하고 있다고 의심을 하더니…….’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결심했다.

이번 외교 회담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는 것으로 책 잡힐 일을 만들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다니엘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황제 폐하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일이 없게 하겠습니다.”

그 모습에 만족한 하르트만이 칙령서를 닫았다.

“황제 폐하께 그리 말씀드리도록 하겠네. 임무에 힘써주길 바라네.”

“예.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의 대답을 들은 하르트만이 뒤돌아 걸어나간다.

그걸 본 다니엘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차석대사 또한 몸을 일으켜 무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었다.

“폐하께서 화가 나신 모양입니다. 그래도 정상참작을 해주신다니 다행…….”

너스레를 떨며 다니엘에게 다가가던 차석대사는 멈칫하고 말았다.

사무실을 떠나는 하르트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차석대사가 침묵하고 있자 다니엘이 눈길을 돌렸다.

“차석대사님. 제안서를 대폭 수정해야겠습니다.”

“예? 지금이 가장 적절한 제안서 같습니다만…… 요구 사항을 낮출까요?”

“아니요. 높이십시오.”

요구 사항을 높이라는 말에 차석대사가 흠칫한다.

그걸 벨라노스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차석대사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야만 합니다. 모든 건…….”

낮게 숨을 내쉰 다니엘이 두 눈을 날카롭게 좁힌다.

“제가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

회담 당일, 내각총리대신 관저 접견실.

‘이 앞에 내각총리대신이 있다.’

접견실의 문 앞에 선 다니엘이 긴장한 채 넥타이의 위치를 가다듬었다.

서류 가방을 든 손에 괜히 힘이 들어간다.

‘내각총리대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파악이 끝났다.’

외교부의 정보에 따르면 정치적 수완은 없으나 성정 자체는 온화하고 따스하다고 한다.

특히나 아이들에게 자상한 면모를 보여줘서 국민들의 신뢰도가 높다는 것을 보면, 분명 딸아이에게도 좋은 아버지로 남고 싶어할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니엘에게는 좋은 카드가 있었다.

‘내각총리대신이 숨기고 있는 사생아를 나는 알고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걸 빌미로 내각총리대신을 협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니엘이 신경 써야 하는 건 내각총리대신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였다.

이번 회담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순간 다니엘의 입장은 난처해진다.

회담을 망칠 경우 황제는 온갖 이유를 들며 다니엘에게 목줄을 채우려고 할 테니까.

그러니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소 악독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내각총리대신에게 속으로 용서를 구한 다니엘이 심호흡 끝에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벨라노스 내각총리대신인 로웰이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로웰 옆에는 정장을 입은 수행원들이 권총이 넣어진 홀스터를 착용한 채로 열중쉬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회담 장소에 먼저 와서 위스키를 마신다라…….’

꼭 자신이 여유로운 상황이라는 걸 표출하고 싶어서 안달난 것 같았다.

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취한 행동일 테지만, 다니엘이 보기에는 겁에 질린 사람이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내색은 하지 않으며 다가가자 로웰이 위스키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 반갑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 꽤나 고생을 했다고 들었는데.”

“테러리스트 때문에 난리가 아니었지요.”

둘은 자연스럽게 악수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 하나도 진정으로 웃고 있지는 않았다.

“영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건 우리의 실수가 명확하네. 미리 용서를 구하지. 관련해서 제국에게 유리한 제안을 몇 가지 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좋지만 저희가 먼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편이 서로의 의견을 좁히는데 용이할 것 같으니까요.”

“뭐, 마음대로 하도록 하게.”

악수를 끝낸 다니엘이 손을 거두며 덧붙였다.

“아. 그런데 본격적으로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긴장을 풀 겸 제가 겪은 일들을 내각총리대신께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야기라면 어떤?”

“제가 조난을 당한 상태에서 참으로 아리따운 아가씨를 만나서 말입니다.”

아가씨라는 말에 로웰의 안색에 균열이 일어난다.

그러나 예상한 일이었던 것인지 금방 평온함을 되찾았다.

“사적인 이야기가 될 것 같군. 우리 둘 모두에게 말이야. 그러니 다른 사람은 물리는 게 좋겠지?”

“물론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로웰이 수행원들에게 눈치를 준다.

그러자 수행원들은 로웰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질서정연하게 접견실을 빠져나갔다.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로웰이 다소 거칠어진 숨을 내쉬고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이보게. 자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잘 알아.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국과 벨라노스 사이의 거래일세. 사적인 이야기를 회담장에 끌고 오지 말라는 말이다. 알겠나.”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공허한 침묵이 로웰을 초조하게 만든다.

때로는 침묵이 그 어떠한 말보다 강한 법이라는 걸 다니엘은 잘 이용하고 있었다.

침묵이 계속될수록 애가 타던 로웰은 결국 한 발 물러나기로 하였다.

“좋아. 이렇게 하지. 내 딸에 관한 이야기는 회담이 끝난 다음에 따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래야 우리가 서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다니엘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의 여유로움은 역시 연막이었나.

저쪽이 급하다는 걸 알았으니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내각총리대신께서 무언가 착각하는 게 있는 것 같군요. 이건 한 나라를 책임지는 사람의 자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국제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다니엘 슈타이너!”

저도 모르게 고함을 내지른 로웰이 흥분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전쟁 영웅이라고 하여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나! 너는 일개 참모이자 고작 외교 대사일 뿐이야! 또한 지금 네 앞에 있는 것은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이다! 여기가 지금 거드름을 피워도 되는 자리인 줄 아는가!”

로웰은 다니엘을 겁박하기 위해 외친 것이었으나 상대를 잘못 골랐다.

다니엘은 웃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입을 다문 채 웃음을 흘릴 뿐이었으니까.

뒤이어 손사래를 친다.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군요. 외교 대사라는 것은 고작이라는 단어로 억누를 수 있는 직책이 아닙니다. 외교 대사란 기본적으로 제국을 대표하여 타국의 수장과 만나는 사람이니까요.”

웃음을 갈무리한 다니엘이 로웰을 빤히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끔찍한 침묵이 흐른다.

기세에 눌린 로웰의 눈동자가 한 순간 떨린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있어서만큼은…….”

로웰을 한동안 응시하던 다니엘이 정색하며 말했다.

“제가 곧 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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