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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3 - Chapter 93

다음날 저녁.

일과를 끝마친 셀비아는 황궁 내부에 위치한 미술관으로 향했다.

내명부 인원들을 통해 조금이지만 병세가 완화된 아버지가 선조들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 미술관으로 향했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걸음을 옮겨 미술관에 입장한 셀비아는 증조부가 그려진 커다란 초상화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셀비아가 가까이 다가가며 화색하자 황제 베르트함이 고개를 돌린다.

딸아이를 발견한 베르트함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셀비아. 정무를 보느라 바쁠 터인데 나에게 시간을 낭비해서 되겠느냐.”

“아버지를 살피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면 성군이 되지 못하겠지요.”

“귀여운지고. 네 애교는 날이 갈수록 느는 것 같구나.”

낮게 웃음을 흘린 베르트함이 말했다.

“그래. 이왕 만나게 된 참에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꾸나. 내가 요 며칠 앓아누운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지?”

최근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던 셀비아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최악은 피할 수 있었어요.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의 생존이 확인된 건 물론이고, 결과적으로 벨라노스에 대한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구나. 잘된 일이다. 그런데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 말이다.”

베르트함이 은근한 눈빛으로 셀비아를 내려다보았다.

“보고에 따르면 조난을 당한 시간 동안 벨라노스에서 기밀 수집을 했다고 주장한 걸로 아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바가 있나?”

“그건 아직…… 통신 감청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복귀한 후 말씀드리겠다고 하더군요.”

“복귀한 후 말씀을 드리겠다라.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구나.”

은근히 떠보는 것 같은 어투에 셀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 아직도 다니엘 중령을 의심하고 계시는 건가요?”

“그럼 셀비아 너는 내가 다니엘 중령을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가.”

“당연히 저는…….”

“네 증조부님 앞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나.”

분위기가 일변한다.

꾸짖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셀비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셀비아를 한동안 내려다보던 베르트함이 초상화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찬탈자의 자식이다. 조부님이 어떤 식으로 황위를 찬탈했는지 너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황실의 정통성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권력에 눈이 먼 행위였지.”

“아버지…….”

“나는 무섭구나. 다니엘 슈타이너에게서 조부님의 눈빛이 보였던 날 이후로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다. 셀비아. 너는 유능한 신하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잘 모른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베르트함이 말을 이었다.

“조부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지. 유능한 신하가 자신의 능력을 믿고 독단적인 행동을 보일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말이다. 셀비아. 관련해서 한 번 물어보마. 다니엘 슈타이너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독선의 길을 걸어왔나.”

제국 남부에서 황자의 사조직을 검거할 때, 총력전 연설에서 기존의 연설 내용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었을 때 다니엘 슈타이너는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자신이 생존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였다.

벨라노스 내부에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명분을 방패 삼아서 말이다.

“놈이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고개를 저은 베르트함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제국이 아닌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정보를 수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많은 이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내게는 보인다. 지금 벨라노스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제국이 아니라 바로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것이 말이다.”

베르트함이 생각하기에 다니엘은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과 모종의 거래를 할 것이 명확해 보였다.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말이다.

그 뒤에 제국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가지고 있는 정보들 중 시답잖은 것을 골라 기밀이라고 진상할 것이 뻔하였다.

그렇다면 놈이 황실을 기만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이 아비가 너를 위해 희생해야 할 시기로 보이는구나. 다니엘 슈타이너의 증오는 내가 살 터이니 너는 놈의 마음을 얻도록 하여라.”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셀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린 찰나에 베르트함이 옆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까딱인다.

그러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명부장이 베르트함의 곁으로 다가와서 고개를 숙인다.

“폐하.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베르트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칙령서를 가져와라.”

수심에 잠긴 두 눈이 날카롭게 좁혀진다.

“내가 친히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말을 전할 것이니 말이다.”

*

같은 시각, 제국 남부 영광의 성화 대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대예배실 내부에 프리엔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린다.

현재 대예배실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 차 있었는데, 프리엔의 예배가 입소문을 타는 바람이 다른 지역에서도 시간을 내서 이곳에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앉을 자리가 없는 바람에 맨뒤에 서서 프리엔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건 영광의 성화 대교회에 있어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프리엔의 아버지마저도 한발 물러서서 눈감아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그러한 것에 프리엔은 아무런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프리엔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자 다니엘 슈타이너였으니까.

“오늘은 형제 자매들께 참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있는 프리엔은 일전의 예배와는 달리 무척이나 평온해진 어투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의 생존 소식이 바다 건너에 있는 벨라노스에서 건너와 제국에게까지 닿았습니다. 그래요.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은 죽지 않았던 겁니다.”

프리엔이 살포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죽음에서 돌아오셨다는 표현이 어울리겠군요.”

부드럽지만 어딘가 모르게 무게감이 있는 목소리가 신도들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제가 어째서 죽음에서 돌아왔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 걸까요?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면 제 표현이 옳다는 것을 모두 인정하실 거예요.”

프리엔이 스스르 눈을 뜬다.

“알다시피 저 더러운 연합국의 짐승들은 두 번의 어뢰 공격으로 인해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이 타고 있는 선박을 격침시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지요.”

온화한 눈빛이 점차 날카롭게 변한다.

“그러나! 그 끔찍한 참사에서 오직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만이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이 그저 운이 좋았을 따름일까요?”

이를 빠득 깨물던 프리엔이 소리쳤다.

“아닙니다!”

프리엔이 양손을 들어 연단을 붙잡는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은 본래 선박 격침과 함께 이승을 떠나실 운명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음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 기적을 행한 것이 누구일까요? 도대체 그 어떤 전지전능한 존재가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을 살려둔 걸까요?”

맨 앞에 앉아있던 신도 몇몇이 소리쳤다.

─ 하느님!

프리엔은 그들을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는 다시 신도들을 돌아보았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린양들의 거두어가셨지만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만은 살려두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중요한 계획 중 하나입니다. 그 옛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죽음에서 돌아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다소 파격적인 발언에 신도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어난다.

그러나 프리엔은 확신을 가지고 말을 이었다.

“고린도전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거대한 십자가를 등지고 있는 프리엔은 거룩한 신념을 전하려는 사람처럼 열정적으로 외쳤다.

“잠자는 자들이여! 계몽하지 못했던 신도들이여! 그대들에게 감히 묻겠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의 죽음으로 인해 그대들은 연합국의 만행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이란 전염이다.

프리엔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기 시작하자 신도들은 하나 둘 긍정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의 만행을 목격하고 모두가 계몽하였을 때가 되어서야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은 죽음에서 돌아오셨습니다! 왜!? 선박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위하여,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프리엔의 입을 통해 퍼져나가는 우렁찬 목소리가 심장의 박동을 빠르게 만든다.

그들의 흥분에 도화선을 설치하였으니 이제는 터트릴 차례였다.

프리엔은 신도들을 향해 자애롭게 양손을 뻗었다.

“기적을 목도한 우리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기도하고 행동합시다! 다시는 우리의 성자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을 연합국의 짐승들에게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겁니다!”

─ 옳소!

“그런 의미에서 묻겠습니다. 우리의 적은 누구입니까.”

─ 연합국!

“하느님의 적은 누구입니까?”

─ 연합국이오!

“그렇다면, 짐승과도 못한 자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프리엔의 물음에 신도들은 입 모아 외치기 시작했다.

─ 짐승은 연합국이다!

신도들의 제창이 대예배실을 울릴 정도였다.

그 외침에 황홀함마저 느낀 프리엔이 손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에게 계몽의 단초를 마련해주신 고귀한 분들에게 기도합시다.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을 위해!”

프리엔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도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두 눈에 모종의 광기를 담은 채 한 사람의 이름을 연호하였다.

─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을 위해!

뒤이어 연합국의 짐승 새끼들을 처단하자는 목소리가 곳곳에 울리고 있었다.

그 광경에 프리엔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여태 홀로 주장하던 말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타고 나오는 것이 감격스러웠던 것이다.

‘과연. 이것이 다니엘 중령님께서 제게 내리신 사명이겠지요.’

신도들의 함성과 분노 속에서 천국의 편린을 본 프리엔이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니엘 중령님. 중령님이 앞으로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이들과 저는 죽음을 불사하고 따를 테니까 말이에요.’

성자를 따르는 것은 신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런 거룩한 결심을 마음에 품은 프리엔은 양손을 모아 기도하였다.

부디,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이 우리 모두를 잘 이끌어주시길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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