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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92 - Chapter 92

제국 황궁의 대회의장은 이른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황녀 셀비아가 수색 작전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해 외교부 인사들과 참모 본부의 핵심 인원들을 불러들인 덕분이었다.

아직 대회의장에 셀비아가 입장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다소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거 들었나? 어제 여명의 광장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더군.”

“제국의 영웅이 타고 있는 외교 공관용 선박을 공격한 연합국을 강력하게 규탄해야한다는 시위 말인가? 대규모 시위였다고 들었는데.”

“편향적인 시각이기는 하지만 연합국이 의심스러운 건 사실이니…….”

외교부 인사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대회의장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친위대 병사의 외침이 들린 직후 셀비아가 대회의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황위 계승자임을 상징하는 붉은 망토가 셀비아의 걸음걸이에 맞춰 나풀거렸다.

그대로 상석으로 걸어간 셀비아가 자리에 앉은 후 소담한 입술을 달싹였다.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착석하도록 하세요.”

허락을 받은 외교부 인사들과 참모 본부의 인원들이 하나 둘 의자에 앉기 시작한다.

모두 착석한 것을 확인한 셀비아가 외무대신인 요벤프에게 눈길을 돌렸다.

“외교부 먼저 보고하도록 하세요.”

요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가장 최근에 들어온 소식부터 말씀드리자면, 벨라노스 정부에서 테러리스트에게 영해를 개방한 범인을 찾았다고 전보를 보내왔습니다.”

“찾았다고요?”

“예. 범인은 벨라노스 해군 12지구 방위사령관인 대령 에드볼이었다고 합니다. 연합국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 곤혹스러운 것이…….”

잠시 뜸을 들이던 요벤프가 말을 이었다.

“연합국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통신 기록이 전무한 것은 물론이고 계좌 기록도 깨끗해서 현재로서는 추적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획적인 범행이군요. 연합국의 반응은 어떤가요?”

“침묵을 고수하다가 최근에 공식 석상에서 상임이사국 에드리아의 국왕이 유감을 표한 바 있습니다. 민간인이 타고 있는 선박을 공격하는 테러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보고를 들은 셀비아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진다.

‘에드리아의 국왕은 백작 칼레드라의 꼭두각시에 불과해.’

그러니 칼레드라는 국왕의 입을 빌려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라 보면 된다.

‘유감을 표한다고?’

꼬리를 자른 후에 발뺌을 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연합국의 역겨운 행태에 이가 갈리는 셀비아였지만 마땅한 증거가 없으니 공식적으로 비난할 수가 없었다.

“잠수함은? 잠수함의 행방은 찾았나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며 물어보았으나 요벤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정보부에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애초에 연합국에서 출항한 잠수함이 아닌지라 추적이 힘든 것은 물론이고, 통신 감청을 피하기 위해 교신을 끊고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더군요.”

놈들의 주도면밀한 행태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셀비아는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납득하였다.

“단서가 나올 때까지 계속해서 조사하라고 하세요. 그럼 이제…….”

참모총장 대신 출석한 작전참모차장인 세드릭을 돌아본 셀비아가 말을 이었다.

“참모 본부의 보고를 듣고 싶군요.”

다니엘을 찾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세드릭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의를 표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보고에 따르면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과 흡사한 외모를 지닌 남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남성은 자기가 다니엘 슈타이너가 아니라고 부정했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사백안의 눈동자가 깜빡거린다.

“해당 남성이 다니엘 슈타이너가 맞다고 가정한다면 하급 장교를 믿지 못함에서 비롯된 일로 보입니다. 하급 장교가 스파이일 경우나 제국군으로 위장한 적일 확률을 계산한 것이겠지요.”

“과연…….”

타지에 홀로 떨어져 있으니 의심암귀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니엘이 가여웠던 셀비아가 안타까움을 느끼며 침음을 흘렸다.

그런 셀비아를 지켜보던 세드릭이 말했다.

“하급 장교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면 신분이 확실한 자를 보내 확인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압니다. 마침 마도기동군을 이끌고 있는 준장 하인리히 슈미트 또한 벨라노스에서 수색 작전을 수행중이니 그를 보내도록 하시지요. 안면이 있으니 서로 알아볼 겁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기에 셀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그런데 앞서 다니엘 슈타이너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는 게 무슨 소린가요?”

“아.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입니다만, 다니엘 슈타이너가 사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기억상실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참모 본부 내에서 잠깐 나왔습니다.”

“기억상실?”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셀비아는 곧 헛웃음을 흘렸다.

‘기억상실이라면 조난 후 바로 옷을 갈아입고 제복을 숨길 리가 없어.’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취할 행동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 기억 상실이라면…….’

최악의 수를 생각하던 셀비아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평생 곁에서 보살펴줄 수밖에…….’

전쟁 영웅을 대우한다는 명분도 있으니 불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헛기침을 내뱉은 셀비아가 세드릭을 바라보며 다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혹시 모르니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전하라고 하세요.”

*

한편, 다니엘은 여관방에서 최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함대를 이끌고 수색하는 병력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쯤 입구란 입구는 모두 봉쇄한 채 신원 확인을 하고 있을 테니…….’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나?’

낙관적인 희망이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다니엘의 이성이 금방 눌러버렸다.

도망치다가 걸리는 순간 이유를 들을 것도 없이 제국을 배신한 자가 된다.

배신자의 말로는 사형이었다.

포위망이 허술해서 도망갈 수 있을 확률이 높은 거면 몰라도, 함대 규모의 포위망을 뚫고 나간다는 제정신 아닌 생각에 판돈을 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비관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을 무렵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린다.

“……누구십니까.”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문이 활짝 열린다.

덕분에 다니엘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문 너머에 서 있는 사람은 마도기동군을 이끌고 있는 준장 하인리히 슈미트였기 때문이다.

노르디아 침공 작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다니엘이 작전을 제시했다면 그걸 실행으로 옮긴 건 하인리히였으니까.

‘그런데 제국의 정예인 마도기동군까지 수색 작전에 보냈다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바람에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어안이 벙벙해진 다니엘이 굳어 있으니 하인리히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다니엘 슈타이너. 얼굴을 보니 자네가 맞군. 그런데 왜 어제 찾아온 장교에게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였나?”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변명거리를 찾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걸 의아하게 느낀 하인리히가 한 쪽 눈썹을 찌푸린다.

“혹시 정말로 기억상실인가? 내부에서자네가 기억상실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나오기는 하더군. 나는 믿지 않는다만…….”

기억상실이라는 말에 다니엘의 희망이 다시금 고개를 치켜든다.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참모 본부의 작전 참모는 높은 수준의 업무 능력을 보유해야만 가질 수 있는 직위였다.

그렇다면 기억상실에 걸린 장교를 참모 본부에서 계속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분명 직위해제를 당하겠지.’

거기다 참모 본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무능한 자는 등용하지 않는 제국의 특성상 업무 부적격 판정을 받고 전역할지도 모를 일이다.

‘좋아.’

다니엘이 기억상실에 걸린 척을 하자고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만약 자네가 기억상실에 걸렸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말게. 황녀 전하께서 전쟁 영웅은 마땅히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단언하셨으니까. 전하께서는 만약 자네가 기억상실에 걸렸다면 황궁으로 친히 데려오라고 하셨네.”

그게 무슨 소리지? 다니엘이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하인리히가 미소를 지었다.

“황녀 전하께서 자네를 ‘평생’ 곁에 두신다고 하시더군. 대단한 영광 아닌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다니엘이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안 된다……!’

저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태연함을 연기하며 낮게 웃음을 흘렸다.

속은 타들어가고 있었던 다니엘이었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체를 밝힐 때가 온 것 같군요.”

남몰래 심호흡을 한 다니엘이 하인리히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참모 본부 소속 작전 참모이자 황녀 전하의 명을 받고 벨라노스에서 외교 대사 임무를 수행 중인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각하를 뵙습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인리히를 바라본 다니엘이 각 잡힌 경례를 올렸다.

그걸 본 하인리히는 내심 감탄하고는 경례를 받아주었다.

“역시. 자네가 이곳에서 정체를 숨긴 채 암약하고 있다는 게 사실이었군. 제국을 위해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건지 내게만 말해줄 수 있겠나?”

제국을 위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짧은 시간 동안 머리를 굴리던 다니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창가를 향해 다가간 다니엘이 창문을 통해 먼 바다를 바라본다.

“제가 이곳에서 알아낸 정보는 쉬이 발설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닙니다.”

최소 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라는 소리였다.

달리 말하면 다니엘 슈타이너는 그런 정보를 조난을 당한 상태에서 수집했다는 것이 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신변을 지키는 것에도 급급할 터인데…….’

다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인리히는 저도 모르게 경외심을 느꼈다.

‘젊다고 하여 무시해서는 안 되겠군. 과연 천재 참모라 이건가.’

솔직히 말해,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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