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노스에 대대적인 수색 작전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황녀 셀비아는 별궁의 거대한 실내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붉고 하얀 포인세티아가 식재되어 있는 길목을 걸어가는 셀비아의 걸음걸이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항상 총기가 깃들어 있었던 푸른 눈동자에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으며, 두 눈은 포인세티아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나 초점이 맞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수심에 잠겨 있는 셀비아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녀들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들끼리 속삭였다.
“저러다 쓰러지시는 거 아니야?”
“걱정되서 죽겠어. 요즘 식욕이 없다면서 식사도 거르시던데…….”
“식사만 문제가 아니야. 오늘도 시녀장님이 전하께 종일 정무에 집중하셨으니 침소에 드시라고 조언했는데, 졸리지 않다며 별궁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잖아.”
시녀들 중 한 명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역시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님 때문이겠지? 공관용 선박 격침 사건 이후로 계속 기운이 없으신 걸 보니까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빨리 기운을 차리셨으면 좋겠…….”
시녀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외무대신인 요벤프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녀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요벤프가 특유의 정중한 어투로 말문을 열었다.
“숙녀 여러분. 황녀 전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전하께서는 포인세티아가 식재된 길목에 계십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요벤프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포인세티아를 내려다보며 사색하고 있는 셀비아가 보인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시녀들에게 감사를 표한 요벤프가 셀비아를 향해 다가간다.
“황녀 전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셀비아가 고개를 돌린다.
상대가 요벤프라는 것을 확인한 셀비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이 시각에 무슨 일인가요? 회의는 내일 있는 걸로 아는데.”
“송구스럽습니다만 벨라노스에서 들려온 소식을 전해드리기 위해 찾아뵈었습니다.”
“벨라노스라. 그래요. 함대는 잘 도착했나요?”
요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경을 개방하라는 제국의 통보를 벨라노스의 내각총리대신이 수용하였습니다. 거절하는 순간 제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테러리스트를 지지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될 테니 당연한 선택이겠습니다.”
요벤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덕분에 제국 함대는 금일 오후 여덟 시에 벨라노스의 항구도시인 텐타르바헴이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하선한 병력들은 전하의 명령대로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이고 있으며, 벨라노스 정부 또한 제국의 수색에 협조하겠다고 나선 상황입니다.”
상황이 좋게 흘러가고 있음에도 셀비아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었다.
이미 예상한 바이기도 했으며 지금 셀비아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성과이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았던 요벤프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말했다.
“관련해서 전하께 기쁜 소식을 들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쁜 소식?”
“예. 수색에 참여했던 친위대 수석 경호인 하르트만 중령에게서 전보가 들어왔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입니다.”
시종일관 생기가 없었던 셀비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놀라서 굳어 있던 셀비아가 심호흡 끝에 말했다.
“무슨 소리인가요? 보다 정확히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선한 병력들은 함대 사령관의 명령에 의거 가장 먼저 해안가를 수색하였습니다. 만약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해류에 떠밀려 이동한 끝에 생존하였을 가능성을 따진다면 해안가를 수색하는 게 최우선 과제이니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곳에서 하르트만 중령이 다니엘 슈타이너의 군 제복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추측하기로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근처 오두막에서 옷을 갈아 입고 제복을 벗어두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침을 꿀꺽 삼킨 셀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다친 곳은? 다친 곳은 없는 건가요?”
“예. 제복에 찢어진 부분이 없었고 혈흔 또한 묻어 있지 않았다고 하니 상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옷을 갈아입고 걸어서 텐타르바헴까지 갔을 것으로 추정되니 사고로 인한 신체적 결손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다치지 않은 채 온전한 몸으로 텐타르바헴에서 활동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였다.
‘다행이야.’
셀비아의 두 눈에 생기가 돌아온다.
안도의 숨을 내쉬던 셀비아가 한시름 놓았다는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정말 다행이야…….’
저도 모르게 눈동자에 물기가 맺힌다.
다니엘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제멋대로 벅차오르고 있었다.
몸의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셀비아는 문득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왜 제복을 버리고 옷을 갈아 입은 것일까.
제복을 입은 채로 텐타르바헴 시청으로 향한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곰곰이 생각하던 셀비아는 야트막한 깨달음을 얻었다.
‘다니엘은 분명 텐타르바헴 내부에 적과 내통하는 배신자가 있다고 판단했을 거야.’
그러니 템타르바헴 시청도 믿을 수 없었기에 정체를 숨기려고 했다면 모든 게 설명된다.
‘가여운 사람…….’
셀비아가 보기에 다니엘 슈타이너는 저 멀리 있는 타국에서, 누가 아군인지 적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로 홀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도 분명 길거리를 전전하며 벌벌 떨고 있겠지.’
그리 생각하니 눈물이 차오른다.
팔을 들어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낸 셀비아가 요벤프를 돌아보았다.
“텐타르바헴에 상륙한 함대 사령관에게 전하세요.”
제왕의 면모를 되찾은 셀비아가 두 눈을 날카롭게 좁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의 신변을 확보하라고 말입니다.”
*
“하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셀비아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다니엘은 레프의 저택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레프의 아버지가 내각총리대신이라는 말을 듣고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어차피 오늘 이후로 레프를 안 만나면 엮이지 않을 테니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초대받은 김에 다니엘은 레프를 즐겁게 해주고자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레프 또한 다니엘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과거를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정말이라니까! 안 그러면 내가 어떻게 이 염병할 저택을 탈출하겠어? 담장을 넘을 수 있는 도약력을 기르는 건 기본이고 날 감시하는 사용인들에게 뇌물을 쥐여줘서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야.”
레프의 ‘저택 대탈출기’를 끝까지 들은 다니엘이 손을 내저으며 웃음을 갈무리하였다.
“저라면 그렇게까지는 못 했을 겁니다. 현실에 순응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군요.”
“순응하면 안 돼. 그러면 지는 거라고 생각해.”
“듣기에 따라서는 좋은 조언이군요. 그런데 이제 시간이…….”
벽걸이 시계를 바라본 다니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많이 늦었군요. 이대로 가다간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게 생겼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너랑 나랑 죽이 잘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너 말이야. 그냥 내 저택에서 자고 갈래? 남는 방 많으니까. 아니면 우리 저택에서 일해주라. 내가 네 신분을 만들어주는 건 물론이고 높은 봉급도 제공할게. 어때?”
괜찮은 조건이었지만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택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내각총리대신을 만나는 순간 좋지 않은 일이 생길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둘 모두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중한 거절에 레프의 두 눈이 반개한다.
“좋아. 저택에 감금당한 나랑 달리 넌 자유로운 영혼이라 이거지?”
“그건 오해의 소지가 있겠는데요. 저보다는 수시로 저택을 탈출하시는 숙녀분이 좀 더 자유로움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압제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요.”
다니엘의 말을 들은 레프가 피식거렸다.
듣기 싫은 말도 좋게 돌려 말하니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인간상이다.
“알았어. 그만 붙잡을게. 나중에 또 기회가 있을 테니까.”
레프가 손을 들어 박수를 두 번 치자 식당의 문이 열리며 집사인 반브레쉬가 들어온다.
손에는 이곳에 올 때 썼던 안대가 들려 있었다.
“숙소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대로 반브레쉬를 따라 나서려는 순간 레프가 다니엘의 팔소매를 붙잡았다.
“잠깐만. 마지막으로 우리 망할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망할 아버지지만 어찌되었든 내각총리대신이라고? 출세할 수 있는 기회야.”
출세? 그런 겉만 번지르르한 단어에 현혹되기에는 다니엘의 인생은 너무나 다사다난하였다.
그냥 어디 조용한 시골에서 빵집이나 개업하고 싶었던 다니엘에게 있어서 이건 필요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말을 안 하면 놓아줄 것 같지 않았기에 다니엘은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올바른 정치를 하시라고 전해주십시오.”
“뭐야. 싱겁게…….”
혀를 내두른 레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좋은 시간이었어.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만나.”
“예. 기회가 된다면 말입니다.”
공손하게 대답한 다니엘이 고개를 숙인다.
물론, 벨라노스 내각총리대신의 딸을 다시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안대를 쓰고 반브레쉬의 손에 이끌린 채 차에 탑승한 다니엘은 한 시간 정도를 주행한 끝에 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안대를 벗으셔도 됩니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안대를 벗었다.
창밖에 익숙한 외형의 여관이 보인다.
반브레쉬는 차 문을 열어주었고,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하차하였다.
밖으로 나오자 반브레쉬가 허리를 깊이 숙인다.
“감사합니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정중함에는 고마움이 한껏 묻어나 있었다.
“아가씨께서 이리도 많이 웃음을 터트리신 것은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모두 리벨라드님 덕분입니다.”
당황스러웠던 다니엘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산해진미를 대접 받을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숙녀분도 귀족 집안 답지 않게 말재간이 상당하여서 지루하지도 않았고요.”
“그리 봐주시니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럼…….”
허리를 든 반브레쉬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차량에 탑승한다.
시동을 건 차량이 서서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을 본 다니엘이 조끼에 걸어 놓았던 선글라스를 쓰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텐타르바헴에 계속 머무는 것은 위험하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여관 입구의 문을 열었다.
동시에 다니엘은 엄청난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관 로비에 병사를 대동한 제국의 장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장교는 카운터에서 여관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 사람을 본 적 있소?”
“못 봤다니까요? 애초에 이런 거물이 저희 여관에는 왜 오겠어요?”
“다시 한 번 천천히 보시오. 혹시 모르니까…….”
장교의 손에 들린 것은 초상화가 그려진 전단지였다.
‘저건…….’
아무리 봐도 자신이라는 걸 확인한 다니엘이 식은땀을 흘린다.
제국에서 병력을 보낼 거라는 건 어림짐작으로 알고 있었지만 빨라도 너무 빠르다.
들키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조용히 뒷걸음을 치려던 순간이었다.
“응?”
인기척을 느낀 장교가 돌아본다.
덕분에 다니엘은 뒷걸음을 치려는 행동을 멈추고 자연스럽게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자신의 방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자 여러 시선들이 따라붙는다.
‘제발…….’
그냥 지나가게 해달라고 마음 속 깊이 외쳤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보게.”
장교가 불러 세우자 다니엘이 걸음을 멈춘다.
장교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초상화와 다니엘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천천히 다가갔다.
“지금 대대적인 수색 작전이 벌어지고 있어서 그런데 협조를 해줄 수 있겠나? 혹시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을 아는가?”
다니엘이 남몰래 이를 꾹 깨물었다.
여기서 들키는 순간 제국에 반 강제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스파이 부관이 목숨을 노리고, 민족주의에 빠진 정신 나간 부하가 있는데다, 자신을 경계하는 황제와 황제의 성격을 빼닮은 황녀가 지배하는 제국에 말이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온 기회인데 날려먹을 순 없었다.
심호흡 끝에 장교를 돌아본 다니엘이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흐음. 다니엘 슈타이너라…….”
고민은 깊었으나 결정은 빨랐다.
“그게 누굽니까?”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뻔뻔해지기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