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플을 먹고 디저트 가게를 나온 다니엘은 본격적으로 관광을 시작하였다.
항구도시 텐타르바헴의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명물이라 불리는 오징어 버터 구이도 먹고, 싱싱한 굴도 사먹으면서 여유롭게 거리를 거닐었다.
그리 평화로운 인생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으려니 별안간 테일 코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리벨라드님 되십니까.”
누군가 싶어서 빤히 바라보자 중년의 남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레프님을 모시고 있는 집사 반브레쉬라고 합니다. 듣기로 리벨라드님이 레프님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으셨다고 하여 데리러 왔습니다. 본인이 맞으십니까.”
“아. 맞습니다.”
다니엘이 긍정하자 반브레쉬는 미소를 짓더니 품에서 안대를 하나를 꺼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이걸 착용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대를 말입니까?”
“예. 레프님의 저택은 높은 보안 등급을 요구하는 곳인지라 일반인의 출입이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다니엘이었지만 귀족들 중에는 별난 사람이 많으니 이해하기로 하였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선글라스를 벗고 안대를 착용하자 반브레쉬가 다니엘의 손을 붙잡는다.
“절 따라오시면 됩니다.”
거절할 필요가 없었던 다니엘은 반브레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타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뒷좌석에 타자 차는 부드러운 배기음을 내면서 움직였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뒷좌석에 등을 기댄 채 차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던 다니엘의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진다.
‘같은 곳을 계속 돌고 있군. 탑승자의 방향감각을 상실시키기 위해서.’
대체 왜 이렇게까지 보안에 신경을 쓰는 걸까.
슬슬 의아함을 넘어 모종의 불안감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불안하다고 해도 차에 탄 이상 멋대로 내릴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언제까지 하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있자 차량이 어느 한 곳으로 이동하였다.
뒤이어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가 안으로 들어가서 서서히 정차한다.
잠시 기다리자 차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손을 잡는다.
“식당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반브레쉬였다.
저택의 모습까지 보여주기 싫다는 건가.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 다니엘은 군말 없이 반브레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 한동안 복도를 걸은 끝에야 반브레쉬가 어느 문 앞에서 멈춘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반브레쉬는 문을 툭툭 두드렸다.
“레프님. 일전에 술집에서 만나셨던 분을 데려왔습니다.”
“알겠으니까 빨리 열어.”
허락을 받은 반브레쉬가 문을 열고 다니엘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들어가셔서 안대를 벗으시면 됩니다.”
반브레쉬의 말대로 방 안으로 걸어간 다니엘이 손을 들어 안대를 내린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것은 긴 식탁에 즐비하게 늘어진 산해진미였다.
화려한 촛대 위에 설치된 양초들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가운데,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레프가 목에는 붉은 브로치를 단 채 상석에 앉아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저녁 식사 자리인데도 레프를 제외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레프는 다니엘을 다시 보게 된 것이 기쁜 모양인지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리벨라드! 음식 다 식는 줄 알았잖아! 빨리 이리로 와.”
다니엘은 다소 얼떨떨해하면서도 레프를 향해 다가갔다.
의자 하나를 꺼내서 앉은 다니엘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레프를 바라보았다.
“의외군요. 저녁 식사 자리라고 하기에 숙녀분의 가족분들과 같이 식사를 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가족이라는 말에 레프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린다.
“나도 의외인데? 네가 내 가족을 찾을 줄은 몰랐으니까. 너랑 내가 결혼할 것도 아닌데 가족은 봐서 뭐 하려고?”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됐으니까 네 과거 이야기나 계속 해봐. 그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부른 거니까. 이야기가 만족스러우면 네가 원하는 만큼의 돈을 주도록 할게.”
말을 돌리는 게 아무리 봐도 의심스럽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하군요. 저는 이곳에 어디까지나 초대를 받은 손님의 입장으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숙녀분께서는 집사를 시켜 제 눈을 가리게 만든 것에 모자라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숙녀분께서 저를 정말 자신과 대등한 손님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최소한 숙녀분이 누구인지 가족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니엘이 강경하게 나가자 레프는 양심에 찔렸는지 조금 미안한 기색이 되었다.
손님으로 초대한다고 해놓고 안하무인하게 군 것은 사실이니까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레프는 결국 결심했는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너한테 내 정체를 밝힌다고 해도 큰 문제는 되지 않겠지. 혹여 네가 내 정체에 대해 발설하고 다닌다고 해도, 불법 체류자인 네 말을 믿어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불법 체류자라는 말에 다니엘은 야트막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 뒷조사를 했군.’
저녁 식사 자리를 당일이 아닌 며칠 뒤로 미룬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저택에 초대해도 탈이 없는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겠지.’
리벨라드라는 이름은 가명이니 당연히 항구도시 텐타르바헴의 명부에 없을 것이다.
동명이인이 있다고 해도 나이와 외모가 일치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걸 확인한 집사는 레프에게 ‘불법 체류자로 보인다’는 말을 전했을 터였다.
레프의 말대로 불법 체류자의 말을 진지하게 믿는 인물은 없었다.
‘그러니 혹시 비밀이 새어나가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저택에 초대한 것이겠지.’
거기에 말괄량이 같은 레프의 성정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다니엘이 보기에 레프는 조심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으니까.
“여러 기구한 사정이 있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니엘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레프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난 사생아야. 아버지라는 놈이 가장 숨기고 싶어하는 핏줄이라고 보면 돼.”
사생아라는 말에 다니엘은 짐짓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 그래서…….’
저택에 초대한 손님에게도 보안을 철저하게 지킨 이유가 납득이 가는 순간이었다.
“널 만난 것도 어찌 보면 기적이야. 망할 아버지는 내가 저택 밖에 나돌아다니는 걸 원치 않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아버지 몰래 외출을 하기도 해. 그때 우연히 널 만난 거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 레프가 근처의 와인 잔을 집어서 들어 올린다.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한다.
묘한 긴장 속에서 다니엘이 말문을 열었다.
“혹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다니엘의 물음에,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레프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글쎄. 이 시궁창 같은 나라의 정상에 위치한 덩치 큰 생쥐라고 해야 할까.”
낮게 웃음을 흘린 레프가 장난스럽게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보레드 파렘. 그게 내 아버지의 이름이야.”
덕분에, 다니엘은 아연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보레드 파렘.
그는 중립국 벨라노스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내각총리대신이었기 때문이다.
*
‘젠장. 연합국은 대체 언제 사람을 보낸다는 거지?’
군용 차량의 뒷좌석에서, 벨라노스 해군 12지구 방위사령관 대령 에드볼은 이를 꾹 깨물었다.
‘분명 연합국의 잠수함에게 영해를 개방해주면 상임이사국인 에드리아에 망명시켜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칼레드라의 제안을 믿고 영해를 열어주었는데 연합국에서는 사람을 보내오고 있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벨라노스를 탈출해도 모자를 판에……!’
연합국이 늦장을 부리고 있으니 속이 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에드볼이 듣기로 제국에서 대규모 수색 작전을 벌인다며 벨라노스 측에 영해를 개방하라는 통보를 보내고는 함대를 출항시켰다고 한다.
제국의 함대가 벨라노스에 도착하는 순간 에드볼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래서 연합국의 접촉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헛수고였다.
현재 연합국은 테러 사건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식은땀을 흘린 에드볼이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무렵에 군용 지프가 서서히 정차한다.
“도착했습니다. 대령님.”
창밖을 바라보자 넓은 마당을 가진 집이 보인다.
일단은 집에 들어가서 생각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에드볼이 문을 열고 내린다.
‘일단 짐을 싸야겠어. 가족들에게도…….’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해야 했다.
뭐부터 챙겨야 할까 고민하며 현관문을 연 에드볼은 멈칫하였다.
‘……왜 불이 꺼져 있지?’
가정부가 퇴근할 시간이 아닌데 불이 꺼져 있으니 의아했던 것이다.
그래도 별 의심은 하지 않으며 전등의 스위치를 켠 에드볼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불이 들어온 전등 아래에, 검은 정장을 입은 흑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로 와서 앉지.”
머리에 페도라를 쓰고 있는 함탈의 말에 에드볼은 식은땀을 흘렸다.
어떻게 봐도 연합국에서 보낸 사람은 아니다.
또한 함탈이 풍기고 있는 분위기가 흉흉하였기에 절대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야…….’
위기감을 느낀 에드볼이 뒷걸음을 친 순간이었다.
철컥─
차갑고도 딱딱한 무언가가 등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권총의 총구라는 걸 깨달은 에드볼이 고개만 돌려 뒤를 살펴보자,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한 병사가 위협적인 눈초리를 보내오고 있었다.
병사로 위장한 흑조의 인원이었던 것이다.
‘대, 대체 언제……?’
당했다고 생각한 에드볼의 숨이 가빠진 찰나.
함탈이 여상한 손짓으로 페도라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오해할까 싶어 말하는데…….”
에드볼을 돌아본 함탈이 두 눈을 날카롭게 좁혔다.
“앉으라는 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일세.”
그 서늘한 말소리에, 에드볼은 저들에게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