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여관방의 창문을 투과한 희미한 서광이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덕분에 정자세로 누워서 자고 있던 다니엘의 눈이 꿈틀거린다.
반사적으로 스르르 눈을 뜬 다니엘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침이군. 분명 낮까지 푹 자려고 했는데…….’
일부러 늦게 수면을 취했는데도 아침에 눈이 떠지는 걸 보면 작전 참모로서의 버릇을 못 버린 것 같았다.
‘하긴 일 년을 참모 본부의 장교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습관이 바뀔 리 없지.’
자조하며 상체를 일으킨 다니엘이 손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몸이 조금 찌뿌둥하기는 해도 피로는 사라진 것 같으니 나쁘지 않았다.
‘어디 보자. 오늘은…….’
멍한 정신 속에서 천천히 일정을 떠올리던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프의 저택에 가는 날이군.’
그 말괄량이 영애는 돈을 미끼로 다니엘을 저택에 초대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문제는 레프가 저택의 소재지를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은 위치를 모르는 저택을 어떻게 찾아가냐고 질문을 던졌었다.
그 질문에 레프는 ‘시간이 되면 네게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고는 칵테일 바를 나가버렸다.
‘어디서 뭐하는 사람인지 물어볼 걸 그랬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면 물어본다고 하여 대답을 해줬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레프가 물주가 되어주기로 했으니 굳이 식사 초대를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저녁 식사 초대라고 했었지.’
지금은 이른 아침이니 시간이 꽤 남았다는 소리가 된다.
모처럼의 휴식이니 이대로 숙소에서 빈둥빈둥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이왕 벨라노스에 온 김에 본토의 디저트를 먹어보고 싶어졌다.
슬슬 나가야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긴 다니엘이 옷장의 문을 연다.
열린 옷장 안에는 옷걸이에 정성스럽게 걸린 새 옷들이 위치해 있었다.
트위드 소재로 만들어진 자켓, 조끼, 바지였다.
전체적으로 다크 그레이 색상에다 조끼에는 미세한 체크무늬가 새겨져 품격을 더해준다.
레프에게 식사 초대를 받은 이후 다니엘이 사비를 들여 산 것이었다.
‘그 여자는 아무리 봐도 귀족인 것 같으니…….’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기 위해 적당히 값이 나가는 옷을 따로 장만한 것이다.
남이 보기에는 유난을 떤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다니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라면 분명 레프의 가족들도 있겠지.’
돈을 주는 건 실질적으로 레프가 아니라 레프의 부모님일 확률이 컸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공략해야 할 것은 레프가 아니라 레프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의 마음에 들어야만 받을 수 있는 돈이 늘어날 게 당연할 테니까.
그런 면에서 다니엘은 사비를 써서라도 고급스러운 옷을 구매한 것이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옷차림에 예민하게 반응하니까.
수도원에서 괜히 후원을 해주는 시의원들과 귀족들이 방문할 때 아이들에게 예복을 입히는 게 아니었다.
그 외에도 걸음걸이, 말투, 성격, 식사 예절 등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더 있기는 했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귀족들 응대는 항상 내가 맡았으니까.’
귀족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는 빠삭하게 알고 있으니 점수를 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한 번 힘내보자. 신분 세탁과 내 빵집을 위해서 말이야.’
결심을 마친 다니엘은 욕실로 들어가서 간단히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을 보며 머리 손질까지 마친 다니엘은 마지막으로 선글라스를 끼고 여관을 나섰다.
그러자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따사로운 햇빛이 다니엘을 반겨준다.
날씨가 참 좋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원래 계획대로 벨라노스에서 유명한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인파를 헤치고 디저트 가게에 입장하여 자리를 잡고 앉자 종업원이 가까이 다가온다.
종업원은 창가에서 분위기를 잡고 앉아 있는 다니엘에게 묘한 매력을 느끼며 말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종업원을 돌아본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트라이플 하나 주시겠습니까? 커피도 같이 말입니다.”
“트라이플 하나에 커피…… 알겠습니다.”
다니엘을 향해 미소를 지어준 종업원이 뒤돌아 걸어간다.
주문을 끝낸 다니엘은 여유로운 태도로 창가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층에 위치한 디저트 가게라 그런지 밖이 꽤나 잘 보였는데, 넓게 펼쳐진 바다에서 거대한 무역선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갈매기 무리가 경적에 반응하여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참으로 목가적인 풍경에 마음이 다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게 제대로 된 삶이지…….’
언제 죽을지 몰라 덜덜 떠는 인생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사치나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좋은 나머지 한동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니 종업원이 돌아온다.
“주문하신 트라이플과 커피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트라이플과 커피를 테이블 위에 올려준다.
고맙다고 인사하려던 다니엘은 멈칫하였다.
아몬드 쿠키 세 개가 덤으로 왔기 때문이었다.
“응? 제가 아몬드 쿠키도 시켰었나요?”
“아아. 아몬드 쿠키는 서비스라고 보시면 됩니다.”
“서비스라. 감사합니다. 벨라노스에는 좋은 분들이 많으시군요.”
다니엘이 미소를 지어주자 종업원이 남몰래 얼굴을 붉힌다.
“그, 그럼 맛있게 드세요.”
고개를 급히 숙인 종업원이 종종걸음으로 떠난다.
그게 의아스러운 다니엘이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트라이플이었으니까.
다니엘은 포크를 들어서 딸기가 올려진 트라이플을 부드럽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러자 상큼하면서도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진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다니엘은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
“부관. 여긴 제대로 된 집이니 한 번 먹어보도록…….”
말하다 말고 다니엘은 입을 다물었다.
반대편 자리에는 아무도 없는데도 무심결에 루시를 찾은 것이다.
그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던 다니엘이 낮게 웃음을 흘린다.
‘기껏 탈출해놓고 나를 죽이려고 든 스파이를 찾는 꼴이라니…….’
이래서 버릇이 무서웠다.
‘그래도…….’
만약 이곳에 루시가 있었다면 먹는 재미는 늘어났을 것 같기는 하였다.
루시가 이걸 먹는다면 분명 정신을 못 차렸을 테니까.
맛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속으로 감탄을 꾹꾹 눌러 담았을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 루시를 지켜보는 것도 나름의 재미였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한들 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지금의 평화에 만족해야겠지.’
머릿속의 상념을 떨쳐낸 다니엘이 포크로 트라이플을 잘라서 다시 입안에 넣는다.
다시 먹은 트라이플의 맛은, 어쩐지 첫 입보다 맛있지는 않았다.
*
벨라노스의 텐타르바헴 항구에 도착한 무역선은 정박 위치를 확인하고 닻을 내렸다.
이후 정박 줄을 이용하여 선박과 부두를 연결하고 보딩 램프라 불리는 선박 경사로를 설치하였다.
선박 경사로가 고정되자 무역선 직원들이 화물을 나르기 위해 하나 둘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런 직원들 사이에서 비밀 조직인 흑조 또한 걸음을 옮겼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삼십여 명의 인원들이 경사로를 통해 텐타르바헴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항구 근처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은 물론이고 호객꾼들 또한 그들에게 감히 말을 걸지 못하였다.
입을 다문 채 인상을 쓰고 걷고 있는 그들의 눈빛에서 강렬한 분노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저들이 누구인지, 또 무엇 때문에 텐타르바헴에 도착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 이런저런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추측과 공상이 이어지며 ‘저들은 마피아 조직이 아닌가?’라는 수군거림까지 돌았지만 흑조의 수장인 함탈은 신경 쓰지 않았다.
흑조가 평소와는 달리 눈에 띄는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다니엘 슈타이너를 추모하기 위함이었으니까.
‘다니엘 슈타이너는 죽었다. 바로 이곳에서…….’
인종 차별 철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선지자가 벨라노스에서 순교하였다.
흑조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함은 분노가 되었고, 무슨 수를 써서도 다니엘 슈타이너를 죽이는 것에 일조한 범인을 찾아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수장님.”
그들을 위시하고 있는 함탈에게 부하 한 명이 다가온다.
“말씀하신 대로 범인 색출에 전력을 기울이면 되겠습니까.”
부하의 말에 함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노스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정치인과 군부까지 부패한 곳이다. 뇌물을 쥐어주면 누가 영해를 열라고 명했는지 순순히 불 것이다. 그렇게 단서를 쌓아가며 추적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협조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협조하게 만들어라.”
싸늘한 목소리에 부하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하게 만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부하가 명령을 전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자 함탈은 정면을 바라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
‘난 네놈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선지자를 죽였다는 걸 뼈저리게 후회하게 해주마. 우리는 기필코 네놈을 찾아서…….’
그는 가죽 장갑이 비틀릴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철저히 단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