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가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지고 있을 무렵, 다니엘은 의뢰인인 레프가 안내한 칵테일 바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네가 정말 돌아버린 건 줄 알았다니까!”
바 테이블에 앉은 레프가 흥분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노 페어를 들고 올인을 외치는 널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미친놈이 내 돈을 가지고 장난을 치나? 그런데 그건 내 기우였어. 눈 깜빡할 사이에 쓰레기 패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로 바뀔 줄이야!”
아하하! 웃음을 터트린 레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화룡점정은 그 사기꾼 새끼가 쫄아서 아무 반박도 못 하는 거였어. 병신 새끼. 속이 다 후련하더라.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거 있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레프가 웃느라 맺힌 눈물을 닦아낸다.
“하아. 정말이지 이 시궁창 같은 곳에 살면서 재미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는데. 네 덕분에 오랜만에 웃어보네. 처음에는 웬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의뢰를 맡기길 잘한 거 같아.”
레프의 옆자리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니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런 다니엘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던 레프가 두 눈을 게슴츠레 좁힌다.
“……그런데 이상하네. 너처럼 실력 좋은 선수를 내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는데. 너 말이야. 텐타르바헴 토박이가 아닌 거 같은데. 내 말이 맞아?”
“추측하신 바가 맞습니다. 저는 외지인이니까요.”
“역시. 여기서 너처럼 피부 뽀얀 애는 귀족이거나 외지인이더라. 귀족 새끼들은 보통 싸가지가 없는데 넌 탑재하고 있는 걸 보니 외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이제 어디서 왔는지 물을 것이라 생각한 다니엘이 가짜 고향과 변명을 생각했지만, 레프는 딱히 그러한 것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네 과거에 대해서 좀 말해줄 수 있어?”
레프가 궁금한 것은 다니엘의 신분이 아니라 과거였으니까.
“나 외지인들 과거 듣는 거 좋아하거든. 가지각색들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대체 왜 이 시궁창 같은 곳에 오게 된 거야?”
사실대로 말하자면, 벨라노스 외교 대사로 파견되어 공관용 선박을 타고 가다가 어뢰에 격침당한 것이지만 그걸 입밖에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침묵하자니 의심을 받을 것 같았기에 다니엘은 이곳에 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말하기로 하였다.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단편적인 이유를 들자면 고국의 여자들이 무서워서 도망친 것이라 보면 되겠습니다.”
“여자들?”
카사노바처럼 바람이라도 피우다가 걸린 건가? 흥미진진했던 레프가 눈을 반짝이고 있자 다니엘이 자조하며 말했다.
“세 여자가 있었습니다. 저를 죽이려는 여자와 저를 이용하려는 여자. 그리고 저를 맹신하는 것 같은 정신이 좀 이상한 여자 말입니다. 숨이 막혀서 도저히 살 수가 없더군요.”
세 명이나? 깜짝 놀란 레프가 눈을 크게 뜬다.
“……너 진짜 나쁜놈이었구나?”
무슨 소리지? 멍하니 두 눈을 깜빡히던 다니엘이 반문했다.
“나쁜놈이라니요? 제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한 겁니까? 절 죽이거나 이용하려고 했다니까요.”
“바보 아니야? 세상에 어느 여자가 관심도 없는 남자를 죽이거나 이용하려고 해? 기본적으로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거라고.”
“아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딱 봐도 로맨스 소설로 연애를 배웠을 것 같은 말괄량이 영애를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다니엘이 혀를 내두르고 있자 바텐더가 다가와서 칵테일을 건네주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블러디 메리입니다.”
홀쭉한 잔에 담긴 칵테일은 강렬한 붉은색이었다.
토마토를 기본으로 만든 칵테일이라 그런지 색이 아주 진하다.
건네받은 칵테일을 가만히 바라보던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루시를 떠올렸다.
이 칵테일보다 더욱 붉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부관을 말이다.
‘지금쯤 선박이 격침당했다는 소식을 들었겠지…….’
그 소식을 들은 루시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좋아하겠지?’
암살 대상자가 죽은 것인데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거기다…….’
연합국이 선박을 격침시킨 게 맞다면 루시 또한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게 된다.
‘설마 루시에게 알려주지 않고 일을 진행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크리스마스에 같이 슈톨렌을 먹겠다고 한 것도 다 연기였나.
그리 생각하니 왜인지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옆에서 그런 다니엘을 지켜보던 레프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칵테일을 바라보며 아련한 미소를 짓는 게 꼭 옛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거지?’
외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인 레프에게 있어 지금 다니엘의 모습은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있지. 리벨라드라고 했나?”
가명으로 불리자 다니엘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좋아. 너한테 흥미가 생겨서 그러는데 내 저택에 오지 않을래? 식사를 한 번 대접하고 싶어서 말이야. 겸사겸사 네 이야기도 더 들어보고.”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즉답이었다.
“의뢰인과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지 말자는 게 제 철칙이라서요. 그러니 가급적이면 이곳을 나선 이후부터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돈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어?”
돈이라는 말에 다니엘의 입이 다물어진다.
확실히 신분 세탁을 하고 빵집을 차리려면 지금 받은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다니엘의 재정 상태가 빈약하다는 것을 노린 레프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초대에 응해주면 네가 지금 받은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줄 수 있는데. 거기다 지금 당장 가자는 것도 아니야. 며칠 뒤에 정식으로 초대할 테니까 그때 와. 손해는 없고 이득만 있는 장사 아닌가? 이래도 거절할 거야?”
“당연히…….”
잠시 뜸을 들이던 다니엘이 레프를 바라보았다.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
이튿날 아침.
제국 남부, 영광의 성화 대교회.
“소식 들었어요? 외교 공관용 선박이 격침당했다던데.”
“연합국 소행일까요? 아무리 전쟁중이라고는 해도 민간인을…….”
대예배실에 모인 신도들이 최근에 일어난 선박 격침 사건을 두고 웅성거린다.
예배실의 맨 앞자리에 앉은 프리엔은 신도들의 말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도들의 말소리에 신경 쓸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왜?’
어째서 하고많은 사람들 중 다니엘 슈타이너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왜?’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다니엘 슈타이너를 지켜주시지 않은 것일까.
‘왜?’
어째서 하느님께서는 내게 다니엘 슈타이너를 대신하여 순교할 기회마저 앗아가버린 걸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프리엔의 두 눈은 공허하였다.
또한 평소 윤기가 감돌던 연갈색 머리칼은 푸석해져 헝클어져 있었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탄 선박이 격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학대한 결과였다.
‘왜?’
프리엔이 또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와중에 프리엔의 아버지이자 담임 목사인 벨라프가 교회의 연단에 오른다.
그는 마이크를 툭툭 두드리더니 대교회에 모인 수많은 인파들을 둘러보았다.
“아아. 형제 자매 여러분. 힘들고 고생스러운 시국에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자리를 빛내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사관학교를 조기 졸업하여 우리 영광의 성화 대교회의 이름을 빛내준 제 딸아이에게도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아버지의 인자한 목소리가 대교회의 곳곳에 울려 퍼졌지만 프리엔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다니엘 슈타이너의 죽음에 관한 생각뿐이었으니까.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를 기원하며, 본격적으로 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제 딸아이의 담화가 있겠습니다. 프리엔?”
프리엔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게 난감했던 벨라프가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금 말했다.
“프리엔 레밀리아트!”
호통 소리에 놀란 프리엔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본다.
벨라프는 마뜩잖은 눈초리로 프리엔을 내려다보다가 올라오라고 손짓하였다.
그제야 프리엔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를 떠올렸다.
사관 학교 졸업생들은 자대 배치 전에 짧은 휴가를 받는다.
조기 졸업생인 프리엔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에 휴가를 받고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 프리엔을 본 벨라프는 예배 전에 담화를 할 것을 요청하였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고 교회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네…….”
아버지의 야욕에 이끌린 프리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계단을 타고 올라 연단까지 걸어가자 벨라프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연단 앞에 선 프리엔은 연단 책상에 놓인 담화문을 발견하였다.
프리엔이 아닌 벨라프가 작성한 담화문이었다.
그대로 읽으라는 것처럼 놓인 담화문의 내용을 본 프리엔이 헛웃음을 흘린다.
담화문에는 ‘저는 검은 마력을 가진 채 태어나 악마와 다름 없는 삶을 살았다’는 문구가 수없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문장의 끝에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장광설이 적혀 있었다.
‘웃기지 마.’
프리엔은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구원을 받은 것이다.
프리엔이 가진 믿음의 근간은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로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분노로 입술을 꾹 깨물던 프리엔은 담화문을 집어 옆으로 던져버렸다.
담화문이 흩날리며 바닥에 떨어지자 벨라프는 물론이고 신도들 또한 놀란 기색이 되었다.
그런 신도들을 눈에 담은 프리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불합리를 느꼈습니다.”
마이크를 통해 뻗어나가는 음성이 대교회의 뒤편까지 닿는다.
“검은 마력을 타고났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질타와 구박을 받았으니까요. 가장 자비롭다고 알려진 성직자들 또한 저를 비천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무슨……!”
당황한 벨라프가 프리엔을 쫓아내려고 하였으나, 프리엔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버지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그 위압적인 기세에 눌린 벨라프가 주춤하자 프리엔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다니엘 중령님은 달랐어요! 그는 제 마력이 검다고 하여 멀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까이에 품어주며 네 능력은 축복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프리엔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신도 여러분들은 사도행전 10장 34절을 기억하시나요? 모든 민족과 인종에게 하느님의 은혜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 말이에요! 그 점에서 다니엘 중령님은 노르디아에서 인종 차별을 철폐하는 것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국경 너머에까지 전하였습니다!”
프리엔이 손을 들어 연단을 붙잡는다.
“또한 수많은 희생이 발생할 수 있는 북부 전쟁에서, 다니엘 중령님은 협상을 통해 왕국과의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켰습니다. 그로 인해 살아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해 보세요!”
눈을 감은 프리엔이 구슬프게 흐느낀다.
“아아. 그는 성자였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도 만인에게 있어서도 성자와 다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무고한 자의 목숨을 사탄의 자식들이 앗아갔습니다. 그게 누구일까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도들 중 몇몇이 외쳤다.
─ 연합국!
그걸 들은 프리엔이 스르르 눈을 뜬다.
“예. 연합국이 아니라면 우리의 성자를 공격할 악마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성자를 앗아간 악마들을 그저 목도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프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악마를 방관하는 자는 그 자체로 악마와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악마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다니엘 슈타이너의 죽음을, 영웅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일 테니까요!”
곳곳에서 동의한다는 고갯짓과 말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내려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연단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준 프리엔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니엘 중령님의 말씀대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제가 감히 하느님을 대신하여 신도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그건 바로……!”
공허했던 프리엔의 눈동자에 맹렬한 분노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성전입니다!”
성전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신도들을 하나 둘 기립하게 만든다.
안 그래도 연합국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와중에 프리엔의 말이 행동의 도화선이 되어준 것이다.
“형제 자매들이여! 하느님의 자식들이여! 우리는 다니엘 슈타이너의 죽음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들고 일어나십시오! 우리는 기필코 일어나 하나 되어 싸울 것입니다!”
거대한 십자가 앞에서 열변하는 프리엔의 모습은 신도들에게 있어서 거룩하게까지 보였다.
덕분에 환호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며 박수갈채가 더해진다.
그들 중 성정이 과격한 몇몇이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 성전을!
─ 연합국의 악마들에게 신의 철퇴를 내려라!
신앙심과 분노가 한데 어우러진 공간에서 프리엔이 양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하였다.
‘비록 다니엘 중령님은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제가 기필코 그 의지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