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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3 - Chapter 83

다니엘은 세 시간 정도를 걸어서 벨라노스의 항구도시인 텐타르바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내에 진입하자 비교적 높이가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가판대를 통해 음식과 물건을 팔고 있는 상인들이 흔하게 보인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 건지 벨라노스의 기후가 겨울의 영향을 적게 받아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체적으로 쾌적한 날씨였다.

‘나쁘지 않아. 이 정도면 합격선이다.’

앞으로 오랜 시간을 함께할 국가의 날씨를 평가한 다니엘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신분 세탁에 성공하면 여기에 빵집이나 하나 차릴까? 아니다. 항구도시면 제국인이 자주 드나들 수 있어 위험하니 내륙으로 빠져야겠는데…….’

새로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설계하던 다니엘은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문제는 돈이란 말이지.’

계획의 초석을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신분 세탁’에는 꽤나 많은 돈이 들어간다.

다니엘이 알기로 신분 세탁이란 단순히 위조 신분증을 만드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우선 정부로부터 사회 보장 번호를 확보해야 하고 여권 문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거기에 은행 계좌 개설과 주거지 등록까지 마쳐야 비로소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런 번거로운 일을 진행하려면 거금이 필요하다.

공무원을 매수할 돈이 필요한 건 물론이고 정치인들에게도 로비를 해야 하니까.

그 모든 일을 대신 해주는 브로커에게 수수료를 지급하는 것도 한 몫 한다.

‘그렇다면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할까…….’

아르바이트? 일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이 시대에서도 기본적으로 신분증 정도는 확인하니까 말이다.

만약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는 일을 찾는다고 해도 벌이가 좋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사건 사고에 휘말릴 가능성을 제외할 수 없었다.

‘신분증을 확인하지 않는 곳은 필연적으로 뒤가 구리다는 소리니까.’

일반적인 일로 벌어들이는 수익에는 신분 세탁이 힘들거라 생각한 다니엘이 턱을 쓰다듬으며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야! 내가 어디 틀린 말 했어!? 저 새끼 사기꾼 맞다니까!”

“돈 잃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난동을 부려봐야 믿을 사람 하나 없습니다. 제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요. 제 가게에서 한 번만 더 난동을 부리면 쫓아낸다고 말입니다.”

저 멀리 술집 앞에서 일어나는 실랑이에 다니엘이 고개를 들었다.

꽤나 고급스러운 평상복 차림을 한 흑발의 여성이 술집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여성의 키는 여자치고도 조금 작은 수준이었는데, 표표하게 피어오르는 기개만큼은 성인 남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난동? 네 가게에서 사기꾼 새끼 쫓아내주겠다는 게 난동이야? 혹시 돈 때문이야? 돈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줄 테니까 저 개자식을…….”

“손님! 증거라도 가져와서 사기꾼이라 몰아가시면 제가 이해라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증거도 없이 도박에서 졌다고 난리를 피우시면 제가 대체 뭐라고 해드려야 합니까?”

술집 주인이 정론으로 받아치자 여자는 반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여자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술집 주인이 문고리를 붙잡는다.

“저도 손님한테 이렇게 구는 게 좋지만은 않습니다. 밖에서 바람 좀 쐬시고 좀 진정되면 들어오시던가 하십시오.”

그리 말한 술집 주인이 문을 ‘쾅’ 하고 닫는다.

졸지에 닫힌 문 앞에서 홀로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안타깝군. 내가 좀 도와줘야겠는데.’

돈 냄새를 맡은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을 느낀 여성이 시선을 돌린다.

“……뭐야?”

날카로운 눈빛으로 다니엘을 돌아본 여성은 잠시 멈칫한다.

다니엘은 그런 여성을 바라보며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떼인 돈 받아주는 해결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원치 않게 숙녀분이 가게 주인이랑 대화를 하는 걸 들었는데 아무래도 사기를 당한 것 같네요. 맞습니까?”

“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여성은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척이라고 생각한 다니엘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무릎을 굽혀 여성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저한테 의뢰를 맡기시는 게 어떠십니까. 초기 자금만 지원해주신다면 제가 떼인 돈을 모두 되찾아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없는 건 아닙니다.”

“조건?”

“성공 시 수수료로 되찾은 돈에 해당하는 금액의 절반만 받겠습니다. 실패한다면? 제가 모든 금액을 배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가요? 손해가 전혀 없는 장사이지 않습니까?”

절반을 받겠다고? 어이가 없었던 여성이었으나 실패시 전액 배상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손해가 없는 건 맞았다.

흥미가 생겼던 여자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다니엘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리벨라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물론 가명이었다.

*

같은 시각, 황궁의 대회의장.

“모두 도착하였습니다. 황녀 전하.”

하르트만의 말에 상석에 앉아 있던 셀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대회의장의 각탁 양옆에는 제국의 수뇌부라 불리는 인물들이 긴장을 유지한 채 기립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한 곳에 모이기 힘든 인물들이었으나, 셀비아가 국회의사당의 당수들을 물리고 내각 비상소집령을 내린 덕분에 모두 이곳에 위치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차기 황제가 될 셀비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셀비아의 뺨에 눈물 자국이 생긴 것을 확인한 덕분이었다.

그건 내각이 소집되는 3시간 동안 셀비아가 이곳에서 혼자 울음을 삼켰다는 증거였다.

살얼음판 같은 공간에서 셀비아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각자 보고하도록 하세요.”

눈치를 보던 인물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국가 선전부 장관 쉴러 다이네스였다.

“보도국장과 방송국장에게 사실 확인이 되기 전까지 해당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끔 입단속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소식이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결과 현재 국민들이 동요하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중앙정보부 국장이 입을 열었다.

“전하. 중앙정보부는 외교 공관용 선박 격침 사건 직후 최초 명령지가 어디인지 확인하려 하였으나 쉽지 않았습니다. 연합국의 소행으로 생각하여 공식은 물론이고 비공식 출항 일시를 모두 조사해보았으나 사건과 일치하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셀비아의 싸늘한 시선이 중앙정보부 국장에게 닿는다.

“연합국의 소행이 아니라는 말을 전하고 싶은 건가요.”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잠수함이 연합국의 항구가 아니라 다른 곳의 항구를 통해 출항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연합국의 테러’라고 규정할 수는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중앙정보부 국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다.

그걸 보다 못한 국방부 장관이 거들었다.

“전하. 중앙정보부 국장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습니다. 사건이 명확해지기 전까지는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으로 아옵니다. 연합국에 분노를 돌리는 것은 사건을 규명한 후로 미뤄도 되지 않겠습니까.”

셀비아의 시선이 국방부 장관에게 닿는다.

“사건을 규명한다?”

“예. 외교 공관용 선박 격침 사건은 아시다시피 벨라노스 영해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분명 벨라노스의 해군 사령관 중 한 명이 미지의 테러리스트에게 영해를 개방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먼저 조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국방부 장관이 고개를 숙인다.

“해군 전략담당자의 말로는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이 살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짧은 침묵 끝에 셀비아가 다급히 되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확률이 낮기는 하지만 당시 해류의 흐름으로 볼 때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만약 다니엘 슈타이너가 방이 아닌 갑판에 올라가 있던 상태였고, 어뢰의 폭발 지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멀리 있었으며, 선박이 격침되기 전에 바다에 빠졌다면…….”

국방부 장관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사건 발생 지점으로부터 가까운 벨라노스의 해안가 중 한 곳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확률은 무척이나 낮습니다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닙니다.”

국방부 장관의 말에 내각 인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말이 안 된다는 소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셀비아의 입장에서는 그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상석의 팔걸이를 꽉 붙잡은 셀비아가 명했다.

“지금 당장 벨라노스로 향할 함대를 구성하세요.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칠 겁니다.”

덕분에 대회의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셀비아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실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이곳의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 중 국방부 장관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 합당한 명령이시나 이건 함대를 대동하여 타국의 영해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벨라노스 측의 반발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군을 대동한 수색 작전을 하기 위해서는 벨라노스 측의 동의가 필요할 텐데 협상단을 먼저 보내시는 것이…….”

국방부 장관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셀비아의 시선이 자신을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장관을 침묵시킨 셀비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협상이 아닌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전하세요.”

셀비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각 장관들과 국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벨라노스가 사건 규명을 위해 출항하는 제국의 함대에게 영해를 개방하지 않는 순간…….”

내각을 휘어잡은 셀비아가 차갑게 타오르는 분노 속에서 두 눈을 날카롭게 좁힌다.

“벨라노스 또한 테러리스트와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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