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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2 - Chapter 82

바다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다니엘의 머릿결을 한차례 휘감으며 흘러간다.

백사장에 우두커니 선 채 바닷바람을 맞고 있던 다니엘은 별안간 헛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인데…….’

혀를 내두른 다니엘이 과거를 회상하였다.

그동안 제국을 탈출하기 위해 저질렀던 수많은 일들을 말이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 모든 일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심지어 탈출하려고 발악하면 발악할수록 지위가 높아지고 유명세가 붙기 시작하지 않았나.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속해서 겪은 다니엘은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이제 제국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가.

지금 다니엘 슈타이너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드디어 과거의 오점을 지우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적에게 공격을 당했다는 불쾌함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낀 다니엘이 근처에 있는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군복을 입은 채로 사람을 만나면 정체를 들킬 수 있기에 위험했지만 다니엘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두막 근처의 어선에 녹이 쓸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끼가 자라나 있다. 한동안 관리를 안 했다는 것이니 오두막 또한 방치되어 있겠지.’

만에 하나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떠나면 그만이었다.

백사장의 모래를 헤치며 오두막으로 걸어간 다니엘은 허름한 문을 손등으로 툭툭 두드렸다.

“계십니까.”

대답이 없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조난을 당해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계십니까.”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버려진 오두막이라는 걸 확신한 다니엘은 문고리를 붙잡고 안쪽으로 밀었다.

오래된 경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활짝 열린다.

혹시 몰랐던 다니엘이 두 눈을 좁히며 열린 문 너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여러 잡동사니들과 상자들이 가득한 오두막에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주변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그제야 긴장을 푼 다니엘이 상자 안에 담긴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헌 옷이랑 낡은 신발…… 거기에 망가진 가전제품들이군.’

아무래도 이 오두막은 필요가 없어진 물건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 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신분을 숨기고 싶은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낮게 웃음을 흘린 다니엘은 쓸만한 옷을 찾기 위해 상자 안을 뒤적였다.

삼십분 정도를 뒤적거린 끝에 다니엘은 제법 멀쩡한 면 옷과 신발을 구할 수 있었다.

수선한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입고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즉시 제복을 벗고 물기를 닦은 후 헌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발견한 낡은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에는 페도라를 얹는다.

거울이 없었기에 창문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한 번 가다듬은 다니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만약 있다고 해도 닮은 것뿐이라고 둘러대며 빠져나가면 될 일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다니엘 슈타이너는 죽었으니까.’

오늘부로 참모 본부 소속 작전참모 중령 다니엘 슈타이너는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마음속에 묻은 다니엘이 애도를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묵념을 끝낸 다니엘은 소맷단을 한 번 다듬은 후 오두막 밖으로 나왔다.

낮과 저녁의 경계에 걸친 태양이 바다 위를 노을로 물들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저 멀리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에 하나 둘 불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노을과 조화되어 따스하면서 몽환적인 풍경을 형성한다.

‘일단 저기로 가야겠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신분 세탁을 위한 돈을 마련하는 것이니까.’

결심을 마친 다니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군화나 구두가 아닌 평범한 신발을 신고 백사장으로 나아간 다니엘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 가득히 들어오는 것이 황홀하게 느껴질 정도다.

고개를 들어 붉그스름하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본 다니엘이 별안간 양팔을 벌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수많은 고생 끝에 드디어 내게로 찾아왔구나! 달콤하고도 목가적인 자유여!”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리도 신나는 일일 줄은 차마 몰랐다.

“지금부터 내게 불행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행복만이 있으리라!”

희곡의 주인공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내뱉은 다니엘이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목표는 벨라노스의 항구도시인 텐타르바헴.

저곳에서 신분 세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

한편, 황궁의 대회의장.

“그래서 지금 총력전 연설로 연합국은 물론이고 다른 열강들까지 도발한 것이 잘한 짓이라고 보는 거요? 그게 중앙민족당의 당론이라고 보면 되겠소?”

“잘한 짓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석해야 총력전 연설이 열강들을 도발한 것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겁니까. 연설을 왜곡하지 말고 본질을 보십시오!”

대회의장의 길다란 각탁에서는 각 정당의 대표인 당수(黨首)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 중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자유사회당의 당수인 켐벨과 중앙민족당의 당수인 엘르카르였다.

주로 자유사회당의 당수인 켐벨이 다니엘 슈타이너의 총력전 연설을 비판하면 중앙민족당의 당수인 엘르카르가 반박하는 식이었다.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은 그쪽이지 않소이까! 총력전 연설로 인해 국민들이 결집하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전황은 불리하오! 우리가 장차 상대해야 할 국가는 연합국 하나가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소!”

“적이 연합국 하나가 아닐 것이기에 다니엘 슈타이너의 연설에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 다니엘 중령의 연설이 다소 급진적이고 호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동의하는 바이나 제국 현 상황으로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곳에 모인 당수들 중 비교적 젊은 피에 속하는 엘르카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유사회당의 당수께서는 다니엘 중령을 개인의 사익을 위해 활동하는 자로 몰아가려는 것 같은데 제 기분탓입니까?”

“하! 몰아가다니?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해보시게. 총력전 연설로 인해 가장 많은 이득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다니엘 슈타이너 중령일세!”

“이득을 보려는 자가 한직인 벨라노스의 외교대사로 임명되기를 자처했다고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상석에서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황녀 셀비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모차장 세드릭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어…….’

다니엘이 벨라노스의 외교대사로 파견되면 당파 싸움이 발생할 거라더니 정말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오늘 점심에 국회의사당의 당수들이 대리청정을 수행하고 계신 황녀 전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단체로 찾아왔었다.

그래서 셀비아는 대회의장을 내어주고 의견을 말해보라 하였는데, 자유사회당의 당수인 켐밸이 다니엘 슈타이너를 제지할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건전한 의견 교류였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언성이 높아지더니 지금은 말싸움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격앙되어 있었다.

셀비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다니엘을 법의 테두리 안에 가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자유사회당의 당수인 켐밸이었다.

‘저 늙은이는 왜 계속 다니엘을 욕하는 거지?’

다니엘이 제국에 가져다준 수많은 이점에 비하면 켐밸이 한 것이라고는 인맥과 혈연을 이용하여 당수 자리에 앉아 국회의사당의 왕 노릇을 한 게 전부였다.

듣기로 국회의사당의 의장 또한 자유사회당 출신이라고 하니, 켐밸이 지금 의원들 앞에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한 마디 해야겠어.’

아버지는 의원들은 기본적으로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적하지 말고 경청하라고는 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심을 마친 셀비아가 말문을 열려고 한 순간이었다.

“전하!”

대회의장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친위대의 수석 경호인 하르트만이 들어온다.

궁중의 예법도 지키지 않고 문을 열어젖힌 하르트만은 셀비아를 발견하고는 급히 뛰어왔다.

호통을 쳐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무례함이었지만 셀비아는 당황스럽기만 하였다.

하르트만이 예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헐떡이던 하르트만이 셀비아 앞에서 한 쪽 무릎을 꿇는다.

“전하! 부디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급보를 전하고자 마음이 급했을 따름입니다.”

급보라니? 잠시 뜸을 들이던 셀비아가 말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기라도 하였나요?”

“그건 아닙니다. 제가 전해드릴 급보는 벨라노스 외교대사 파견에 관한 것입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벨라노스로 향하던 공관용 선박이…….”

셀비아의 눈치를 보던 하르트만이 고개를 숙인다.

“적의 어뢰 공격으로 인해 격침되었다고 합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방금까지 열변을 토하던 의원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건 셀비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참이나 굳어 있던 셀비아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지금…….”

한없이 떨리는 셀비아의 목소리에 하르트만이 짧게 침음을 흘린다.

셀비아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숨을 죽이고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현실을 부정하려는 것 같은 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셀비아의 마음을 헤아린 하르트만은 침묵 속에서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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