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손을 붙잡은 여성은 자신을 레프라고 소개하였다.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다니엘 또한 별로 궁금하진 않았기에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통성명을 마친 두 사람은 근처의 잡화점으로 향했는데, 이는 레프가 한 도박이 포커 종류라는 걸 들은 다니엘이 트럼프 카드를 사자고 권했기 때문이었다.
얼떨결에 다니엘을 따라간 레프는 트럼프 카드 두 개를 대신 결제하고 다시 술집 앞으로 돌아왔다.
“……야.”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알 수 없었던 레프가 다니엘을 올려다본다.
“트럼프 카드는 왜 산 거야? 그것도 두 개나.”
“숙녀분 말씀대로라면 저쪽이 사기를 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저쪽을 이기려면 일반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할 겁니다.”
트럼프 카드 상자를 개봉한 다니엘이 카드를 꺼내더니 몇 장을 간추려서 뽑는다.
남은 카드는 다시 상자에 넣은 후 레프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가지고 계십시오. 행운의 표시로 드리겠습니다.”
레프가 의아해하며 카드를 받아들자 다니엘이 미리 빼낸 카드를 소매에 넣는다.
그걸 본 레프가 의아해하는 와중에 다니엘이 술집의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그러자 왁자지껄한 술집 내부가 펼쳐졌다.
은은하게 퍼지는 알코올 냄새와 온갖 안주들의 고소한 냄새를 맡은 다니엘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레프가 따라가자 술집의 인원들이 하나 둘 다니엘을 돌아본다.
처음 보는 외지인이 방금 난동을 피우고 쫓겨난 여자와 함께 들어온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들을 관찰하던 다니엘 곁으로 술집 주인이 다가온다.
“무슨 일로 왔소? 혹여 저 아가씨가 고용한 용병 같은 거라면…….”
“럼주 한 잔 주십시오. 아. 데킬라가 있으면 그걸로 주시고요.”
태연하게 술을 주문하는 다니엘 덕분에 술집 주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 술집 주인을 돌아본 다니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행패를 부리러 온 게 아니니까요. 저는 그저 술을 마시면서 도박이나 하려고 온 겁니다.”
선수를 고용한 건가. 그제야 이해가 된 술집 주인이 군중 사이를 바라보며 외쳤다.
“프람콜! 여기 이 손님이 한 판 하자는데!”
그러자 구석진 테이블에서 벽에 몸을 기댄 채 칩을 쌓아 놓고 있던 프람콜이 고개를 들었다.
깡마른 체구의 프람콜은 다니엘을 한 번 바라보더니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호구는 언제나 환영이지. 이리로 와.”
허락을 받은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술집 주인도 다니엘을 따라 걸음을 옮기더니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일단…….”
술집 주인이 말했다.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가게에서 이루어지는 도박은 기본적으로 포커요. 또한 배팅 한도에는 제한이 없소. 이해했으면 고개를 끄덕이시오.”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술집 주인이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두툼한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쿵 하고 올린다.
안을 슬쩍 살펴보자 낡은 칩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얼마를 가지고 도박을 할지 정하시오. 칩으로 바꿔주겠소.”
“아. 그건 제 뒤에 있는 숙녀분이 대신 낼 겁니다.”
지목당한 레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렇게 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알게 모르게 불쾌했던 것이다.
“……얼마나 필요한데?”
“저를 믿으시는 만큼 배팅하십시오.”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믿어? 어처구니가 없는 레프였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결판을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지갑을 열었다.
“좋아. 다 걸게.”
가죽 지갑에서 지폐를 모두 꺼낸 레프가 술집 주인에게 건넨다.
꽤나 큰 액수라 당황한 술집 주인이었지만 곧 침착하게 받아들었다.
뒤이어 주머니 속을 뒤적거리더니 칩 수십 개를 꺼내 다니엘의 테이블 위에 올려준다.
“여기 있소.”
고개를 까닥인 다니엘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 그런데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오?”
주머니에서 트럼프 카드 상자를 꺼낸 다니엘이 술집 주인에게 건넨다.
“숙녀분께서는 공정한 도박을 하기를 원하시더군요. 아무래도 사기를 의심하고 계십니다. 저는 별로 믿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트럼프 카드를 교체해주셨으면 합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술집 주인은 카드 상자를 건네받았다.
상자를 열어 카드를 한 번 확인한 술집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 가게에서 산 모양이군. 조작된 카드가 아닌 걸 확인했으니 이걸로 하지. 프람콜. 불만은 없겠지?”
술집 주인의 물음에 프람콜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서 다니엘은 레프가 말하는 사기가 ‘카드에 조작질을 한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약 카드에 미리 조작질을 하고 포커를 한 것이라면 카드가 교체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았을 것이니까.
‘그렇다면 어떤 사기일까.’
급할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 알아가면 될 일이니까.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소.”
포커가 시작됨을 알린 술집 주인이 다니엘과 프람콜에게 카드를 두 장씩 건넨다.
이후 기본적인 배팅을 하고 플랍, 턴을 지나 리버의 차례가 온다.
5장의 카드가 모두 나온 시점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패를 한 번 확인해보았다.
‘투 페어.’
포커에서 투 페어가 나올 확률은 꽤나 낮다.
승부를 걸어도 괜찮은 패라는 소리다.
덕분에 고민하고 있을 무렵 프람콜이 심리전을 할 생각도 없이 외쳤다.
“레이즈.”
판돈을 올리겠다는 소리였다.
잠깐 침묵하던 다니엘이 콜을 하고 패를 공개하였다.
프람콜의 패는 ‘트리플’이었다.
투 페어인 다니엘은 패배하였고 프람콜이 웃으며 칩을 가져갔다.
“저 아가씨가 데려왔다기에 선수인 줄 알았더니. 실망스럽네.”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후로 다섯 번을 연속으로 했지만 다니엘이 이기는 판은 없었다.
그러자 슬슬 초조해지는 것은 레프였다.
‘뭐하는 거야? 이 멍청이가……!’
남의 돈이라고 막 쓰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 페어가 나와도 폴드를 외치기는커녕 콜을 하고 있는 다니엘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리는 느낌이다.
반면 다니엘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잔잔하였다.
프람콜이 어떤 속임수를 쓰는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얕은수를 쓰는군.’
프람콜은 다섯 번 내내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가져갔다.
도박판에서 손장난을 치는 놈이야 쉽게 볼 수 있었지만 항상 간발의 차이로 이긴다?
그건 구경꾼 중에 프람콜의 조력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력자가 수신호로 내 카드패를 말해주고 있겠지.’
그걸 본 프람콜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간발의 차로 이기는 연출을 하고 있었다.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 사기를 치고 있는지 알았으니 이제 그걸 역이용하면 그만이었다.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칭찬 아닌 칭찬을 던진 다니엘이 프람콜과 여섯 번째 판을 시작한다.
딜러인 술집 주인에게서 카드를 받으며 포커를 진행하던 다니엘은 마지막 차례인 리버에 도착하였다.
손에 들린 다섯 장의 카드가 가리키는 방향은 노 페어.
폴드를 외치는 것이 정상인 쓰레기 패였다.
그러나 다니엘은 태연하게 자신의 칩을 중앙으로 모두 밀어 넣었다.
“올인.”
덕분에 프람콜은 물론이고 구경꾼들도 놀라서 웅성거렸다.
놀란 것은 바로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레프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친놈아! 뭐하자는 거야!?’
제정신인가 싶었을 무렵에 프람콜이 피식거렸다.
‘블러핑을 할 속셈인가 본데. 미안하지만 네 패는 모두 보이고 있다고.’
불쌍해서 한 번 져주려고 했는데 안타깝게 됐다고 생각한 프람콜이 입을 열었다.
“콜.”
프람콜이 자신의 칩 대부분을 중앙으로 밀어 넣는다.
그 순간, 다니엘은 중추 신경계에 마나를 집적시켜 신경을 가속시켰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소매에 손을 집어 넣은 다니엘이 패를 빠르게 바꾸고 신경 가속을 멈춘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다니엘이 패를 바꿨다고는 의심조차 하지 못한 프람콜이 자신의 패를 공개한다.
“투 페어. 너는?”
이미 알고 있지만 예의상 물어본 것이다.
그런 프람콜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는 다니엘이 여상하게 자신의 패를 공개하였다.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
포커에서 나올 수 있는 최상위 카드에 프람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뭐야? 대체 언제……?’
손이 움직이는 것조차 보지 못한 프람콜에게 있어서는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동안 멍하니 카드를 내려다보던 프람콜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은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것처럼.
“왜?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쉬는 처음 보나?”
다니엘의 비아냥거림에 프람콜이 이를 빠득 갈았다.
“이 개자식이……! 어디서 사기를 치고 지랄이야!”
“사기? 내가 사기를 쳤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지?”
“시치미 떼지 마라! 넌 분명……!”
흥분한 나머지 다니엘이 원래 가지고 있던 패를 까발리려던 프람콜이 멈칫하였다.
구경꾼들의 험악한 시선이 자신에게 꽂히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니엘의 원래 패를 말해버리면 프람콜은 여태 자신이 사기 포커를 하고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내려앉는 침묵 속에서 다니엘은 주인장이 내어준 데킬라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시선은 프람콜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사기를 치는 것처럼 다른 놈들에게도 사기를 쳤을 테지. 안 그런가? 프람콜.’
다니엘의 예상대로 이곳에는 프람콜에게 돈을 잃은 사람이 꽤 많았다.
덕분에 요즘 술집 내에서 프람콜의 이미지는 거의 쓰레기와 동급이었다.
지금도 보라.
다니엘이 패를 바꾼 것을 구경꾼들 중 몇몇이 뒤늦게 알아차렸는데도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이나 구경꾼들은 프람콜이 패배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런 흉흉한 민심 속에서 다니엘의 원래 패를 까발리는 것으로 여태 사기 도박을 해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맞아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자충수를 뒀다는 걸 깨달은 프람콜의 동공이 가늘게 떨린다.
“이런. 프람콜.”
다니엘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프람콜을 바라본다.
“내가 너라면 얌전히 결과에 승복할 텐데. 만약 그러지 않으면…….”
테이블에 팔을 얹은 다니엘이 앞으로 상체를 기울인다.
미소를 머금은 다니엘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너는 오늘 여기서 반병신이 될 테니까.”
그 싸늘한 말소리에, 울음을 삼킨 프람콜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다니엘이 도박판에서 재미를 보고 있을 무렵, 루시는 참모 본부에서 업무를 보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장시간 야근 끝에 모든 업무를 처리한 루시가 서류를 갈무리하였다.
“중령님. 이제 퇴근 시간…….”
거의 반사적으로 집무 책상을 바라보며 말을 내뱉던 루시의 말끝이 흐려진다.
다니엘은 자리에 없다.
벨라노스에 외교 대사로 파견을 나갔기 때문이다.
“…….”
퇴근시간이 되면 항상 시답잖은 말을 건네던 다니엘이 없으니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루시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곧 돌아올 사람인데 괜히 감상에 젖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서류 가방을 챙기고 집무실을 나서려던 루시는 멈칫하였다.
복도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인가 싶었을 무렵 집무실의 문이 열리더니 에른스트가 들어온다.
“작전참모부장님.”
루시가 경례를 올리자 에른스트가 힘겹게 받아준다.
평소와는 다른 저조한 분위기가 느껴진 루시가 의아해하며 손을 내린다.
“참모부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루시의 물음에 에른스트가 이를 꾹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스트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루시를 바라보았다.
“루시 중위.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듣도록 하게. 자네의 상관인 다니엘 중령이 탑승해있던 외교 공관용 선박이…….”
차마 루시를 보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인지 에른스트가 시선을 내린다.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격침당했다고 하네.”
격침.
그 단어가 내포한 힘이 루시의 사고를 정지시킨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던 루시가 반문하였다.
“확실한…… 사실입니까.”
작전참모부장인 에른스트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루시의 이성은 이 전제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어보는 것은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방어기제와 같았다.
에른스트가 떨리는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자 루시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진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할 말을 고르던 루시가 에른스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만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마음일지 십분 이해한 에른스트는 루시를 붙잡지 않았다.
덕분에 집무실을 나온 루시는 구둣발을 또각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머릿속에는 온갖 기억들이 혼재되어 때로는 합쳐졌다가 때로는 흩어진다.
시시각각 흐르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루시의 숨이 점점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다니엘 슈타이너가 타고 있는 선박이 격침당한 걸까.
어째서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을까.
어째서 이 소식을 지금에서야 알아버린 걸까.
도무지 해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을 마음속에 던지던 루시가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물어봐야겠어…….’
제도에서 활동하는 첩보원과 접촉하여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고 싶었다.
그 생각 속에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던 루시의 발이 삐끗한다.
발목이 옆으로 기울며 몸이 휘청거린 것이다.
급히 계단의 난간을 붙잡은 루시가 몸을 낮춘 채 균형을 유지하였다.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숨은 아까보다 더 가빠져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탓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해버리고 만 것이다.
두 눈을 반개한 채 가쁜 숨을 내쉬던 루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다니엘이 참모 본부 앞에서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에 시간이 난다면 같이 가도 된다.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슈톨렌을 같이 먹자며 장난스럽게 말하던 다니엘의 얼굴이 선연하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는 알고 있었다.
다니엘이 죽은 이상 같이 슈톨렌을 먹는 크리스마스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루시가 천천히 눈을 뜬다.
물기가 서린 붉은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슬픔보다는 분노에 가까웠다.
외교 공관용 선박을 격침하라 명령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연합국에서 다니엘이 타고 있는 외교 공관용 선박을 공격한 게 맞다면…….’
이제 더는 백작 칼레드라를 신뢰할 수 없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