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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9 - Chapter 79

아침이 되어 참모 본부로 출근한 다니엘은 개인 집무실 앞에서 심호흡을 하였다.

오늘 새벽에 자신을 암살하러 왔다가 돌아간 루시를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긴장이 된 것이다.

‘진정해라 다니엘.’

루시 입장에서 보자면 다니엘은 오늘 새벽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된다.

실은 안 자고 있었다는 게 들통나면 여러모로 곤란해질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맞았다.

할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되내인 다니엘이 문고리를 돌려서 문을 열었다.

이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출근한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린다.

“오셨습니까. 다니엘 중령님.”

평소와 똑같은 무감한 표정이다.

‘……오늘 새벽에 날 죽이러 온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군.’

새삼 루시가 유능한 첩보 요원이라는 게 실감이 될 정도다.

묘하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집무 책상으로 걸어간다.

의자를 꺼내 앉은 다니엘이 서류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부관. 사적으로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나?”

자리에 착석한 루시가 다니엘을 돌아본다.

“예. 무언가 궁금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래. 이틀 전에 나랑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나?”

“이틀 전이라면…… 혹시 참모 본부 입구에서 했던 대화 말씀이십니까?”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황금 장미 제과점에서 크리스마스 한정으로 슈톨렌을 판다고 했었지. 내가 한 번 알아봤더니 크리스마스에는 손님이 많아져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더군. 그래서 네 일정이 빈다면 예약을 할까 하는데 괜찮겠나? 또한…….”

시선을 마주치기 무서웠던 다니엘이 괜히 서류 가방을 뒤적거렸다.

“크리스마스에 슈톨렌만 먹고 헤어지기는 아쉬우니 다른 오락거리들도 알아봐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크리스마스에는 다른 가게들도 예약제로 손님을 받고 있어서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좋다. 그러니 의사를 확실하게 밝히도록 해라.”

서류 가방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낸 다니엘이 루시를 힐끔 바라본다.

‘여기서 루시가 예약을 해달라고 한다면…….’

적어도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까지는 암살 계획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에 다시 한번 암살을 시도할 생각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물론 거짓으로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 죄책감을 가진 루시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발생할 테니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이 잔뜩 경계하며 루시를 바라보는 가운데, 정작 루시는 다니엘의 제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식사만 하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오락거리도 같이 즐기자는 건…….’

아무리 봐도 데이트 신청이었다.

‘……다니엘은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보안국에서 구해준 것도, 스파이라는 걸 숨겨주는 것도 호감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는 하였다.

‘하지만…….’

루시는 데이트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데이트 신청을 받은 것 또한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던 루시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괜히 만년필만 붙잡은 채 우물쭈물하던 루시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저는 그때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예약을 진행하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거짓 없는 소극적인 승낙이었다.

덕분에 한시름 놓은 다니엘이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예약을 할 테니 그때 가서 딴소리하지 말도록.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할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말을 걸던 다니엘이 멈칫한다.

집무실 밖 복도에서부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똑똑─

이윽고 노크 소리가 들려오자 다니엘이 미리 일어서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다니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에른스트가 들어온다.

푸짐한 풍채의 에른스트는 다니엘이 경례도 하기 전에 말문을 열었다.

“다니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지금 당장 응접실로 가보도록 하게!”

덕분에 다소 의아했던 다니엘이 경례를 위해 들었던 팔을 내린다.

“부장님. 귀빈 접대는 총무처의 의전부서가 맡고 있는 걸로 압니다. 그런데 제가 왜 응접실로 가야 하는 것인지…….”

“그 귀빈께서 자네를 직접 호출했으니까!”

“호출이라니. 혹시 제도의 귀족들이나 국회의사당에서 나온 정치인들이라면 제가 만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에른스트가 답답하다는 것처럼 가슴을 툭툭 두드리고는 말했다.

“그런 거면 내가 자네한테 말도 안 했어! 자네를 호출한 귀빈은 다름 아닌 황녀 전하일세!”

다니엘이 당황하며 망연히 눈을 깜빡인다.

‘셀비아가 여기는 왜?’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다니엘이 급히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황녀의 호출인데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부장님. 다음부터는 황녀 전하께서 호출하셨다는 걸 먼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괜스레 에른스트에게 불만을 표하는 건 덤이었다.

*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에 도착한 다니엘은 소파에 앉아 있는 셀비아를 볼 수 있었다.

셀비아의 반대편 소파에는 작전참모차장인 세드릭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가서 경례를 올렸다.

“황녀 전하. 저를 호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잔을 내려놓은 셀비아가 다니엘을 돌아보더니 부자연스럽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얼굴을 보니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뻔했던 것이다.

차기 황제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셀비아가 다소 근엄하게 말했다.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에요. 앉으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업무 도중에 나온 것이라 전하의 말씀을 듣고 나면 바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다니엘은 셀비아와 대화를 오래 나눠서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총력전 연설의 경험으로 인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중하게 거절한 것이다.

셀비아는 그게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그럼 일어선 채로 듣도록 하세요. 다니엘 슈타이너. 황실은 당신의 총력전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번에 좋은 제안을 드리려고 해요.”

“제안이라고 하시면?”

“현재 제국은 전쟁 채권을 판매한 돈으로 여러 공공사업을 추진 중입니다. 또한 채권 판매량이 기존 예상보다 높게 나온 덕분에 추가 사업을 진행하려 하고 있답니다.”

셀비아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다니엘을 올려다본다.

“관련해서 다니엘 중령에게 권한을 나누어드리려고 해요. 사업을 구상하고 책임자로서 진행할 수 있는 권한을 말이에요.”

“……전하? 일개 작전참모가 맡기에는 너무 과중한 업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물론이고 황실 또한 당신을 일개 작전참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 가감 없이 의견을 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셀비아는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이는 다니엘을 떠보는 것이었다.

만약 다니엘이 아버지의 말대로 제국을 집어삼킬 늑대라면 지금 이 제안을 듣고 국가 중대사에 해당하는 사업을 진행하려 할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의 영향력을 한층 더 강화시키려고 들 테니까.

반면 다니엘은 이걸 잠시나마 제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였다.

“전하. 정 그러시다면 저를 벨라노스에 보낼 외교대사로 임명해주셨으면 합니다.”

“……벨라노스요?”

벨라노스라면 제국의 서쪽, 바다 건너에 있는 중립 국가였다.

그곳에 외교대사로서 가겠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되었던 셀비아가 반문한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진지한 어투로 자신이 벨라노스에 가려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예.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제국은 곧 삼국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럼 결국 지금 제국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기와 인력입니다. 그러니 벨라노스로 가서 무기를 수입하고 용병을 고용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압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건 제국 수뇌부에서도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벨라노스 외교대사로 임명할 인물은 널리고 널렸다.

굳이 다니엘 슈타이너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란 소리다.

그런데 그걸 본인이 하겠다고 하니 셀비아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정말인가요? 그러니까…… 벨라노스에 외교대사로 파견되고 싶다는 게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저는 진심입니다.”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벨라노스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국내 정세를 보라.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다니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황제는 모종의 오해를 가진 채 경계를 하고 있으며, 부관인 루시는 목숨을 노리고 있는 판국이다.

그야말로 폭풍의 눈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 다니엘은 숨을 돌리고자 외교 업무를 수행하는 척 외국에 잠시 피해 있을 생각이었다.

물론 다니엘의 속마음을 모르는 셀비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셀비아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가 확고한 것 같으니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보세요.”

“예. 황녀 전하.”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의를 표한 다니엘이 뒤돌아 걸어나간다.

그 정갈한 자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셀비아가 반대편에 앉아 있는 세드릭을 돌아보았다.

“……어떤 거 같아요?”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세드릭이 대답했다.

“제가 보기에는 실로 현명한 판단입니다.”

세드릭이 보기 드물게 웃음을 흘렸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황녀 전하의 위세를 등에 업고 벨바르 공작을 굴복시킨 전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귀족들과, 귀족들의 돈을 받고 활동하는 정치인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테이블 위의 집게를 든 세드릭이 각설탕을 집어서 커피 안에 풍덩 빠트린다.

“이번 총력전 연설로 인해 그 분노는 정점에 이르렀을 겁니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여겼을 테니까요. 개들 중 극단적인 이들은 다니엘 슈타이너를 정치적으로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상한 손짓으로 스푼을 든 세드릭이 커피를 휘휘 젓는다.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도 다니엘 슈타이너를 경계한다는 추문이 있더군요. 이 상황에서 다니엘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한답시고 국가 중대사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치인들과 귀족들이 합심하여 다니엘 중령을 공격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다니엘은 한직인 벨라노스 외교대사로 임명되어 제도 내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그들의 불만을 불식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각설탕이 커피 안에서 사르르 녹아간다.

“불만이 사그라들면 다니엘은 사익을 위해 정치를 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국가를 위해 행동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의원들 사이에서 피어오를 겁니다. 그렇게 되면…….”

스푼을 뺀 세드릭이 냅킨을 들어 커피가 묻은 부분을 닦아내었다.

“필연적으로 당파 싸움이 발생할 겁니다. 대표적으로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중앙민족당과 자유사회당이 대립하겠지요. 이런 걸 이이제이라고 하지요. 다니엘 슈타이너 입장에서는 손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입니다.”

스푼을 내려놓은 세드릭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물론 이 모든 건 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다니엘이 굳이 한직인 벨라노스 외교대사를 선택한 것에 대한 다른 이유는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세드릭의 이야기를 다 들은 셀비아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세드릭의 말이 사실이라면 다니엘은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 위험한 자였으니까.

그러나 속단은 이르다.

“……참모차장이 생각하기에 다니엘이 황실에 표하는 충성이 거짓처럼 보이나요?”

눈을 한 번 깜빡인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기에 다니엘 슈타이너의 충성심은 진짜입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행동이라 보기에는 여러모로 어폐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충성심이 황실을 향한 것인지 제국을 향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요.”

다니엘 슈타이너의 충성이 황실을 향한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 충성심이 위대한 제국…… 그러니까 국가의 발전 자체에 있다면?

다니엘 슈타이너가 황실을 무능하다 판단하는 순간 벌어질 일들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이다.

“황녀 전하.”

특유의 사백안으로 셀비아를 뚫어지게 바라본 세드릭이 진심을 담아 충고하였다.

“하루빨리 다니엘 슈타이너의 마음을 얻으셔야 합니다. 만약 다니엘 슈타이너의 마음을 얻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신다면…….”

잠시 뜸을 들이던 세드릭이 말했다.

“연합국보다 까다로운 적수를, 내부에 두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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