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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8 - Chapter 78

살며시 벌어진 입술에서 흘러나온 숨결이 한기가 되어 흩어진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는 다니엘이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떠오르고 있었다.

두 계절을 함께했다.

이제는 추억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축적된 기억들을 떠올리던 루시가 별안간 고개를 저었다.

‘본질은 바뀌지 않아.’

루시는 연합국의 스파이였다.

다니엘이 제아무리 다정하게 대해줬다고 한들 ‘적’이라는 건 바뀌지 않는다.

전쟁 속에서 일어나는 스파이 활동은 장난이 아니다.

감정 따위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여 죽이지 않는 상냥한 전쟁 따위는 있을 수 없으니까.

‘다만…….’

의문이 마음속에서 응어리치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차마 다니엘을 해칠 수 없었다.

‘만약 종이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인체 실험을 감행한 것이 제국이 아니라 연합국이라면, 백작 칼레드라는 루시에게 계속 거짓말을 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나 마찬가지인 칼레드라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고 믿고 싶은 루시였지만, 종이에 적힌 내용이 계속해서 의구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니 이 문서에 적힌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다니엘을 죽이는 것을 보류하는 것이 맞았다.

판단을 마친 루시가 권총을 거두었다.

허리띠의 홀스터에 권총을 집어넣은 루시는 손에 들고 있는 문서와 사진을 장교 코트의 안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직후 뒤로 한 발 물러난 루시는 창문을 투과한 달빛을 받으며 두 눈을 반개하였다.

이유 모를 감정들 속에서 한동안 다니엘을 바라보던 루시가 발길을 돌린다.

침입한 흔적을 없앤 후 현관문으로 걸어간 루시는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여러 생각 속에서 다니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루시는 곧 광학 위장을 활성화시킨 후 현관문을 열었다.

그대로 복도로 나간 루시가 문을 닫는다.

덕분에 홀로 남은 다니엘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떴다.

‘……갔나?’

실눈을 떠서 주변을 살펴보자 루시가 보이지 않는다.

정말 갔나 싶었던 다니엘은 현관문 쪽을 살펴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존이 확실시되자 긴장이 풀리면서 온몸의 힘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제 루시의 태도가 뭔가 이상한 것 같더라니…….’

집무실에서 계급장을 바꿔 달아줄 때 다니엘은 한순간이지만 루시가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왜 분노를 삭히는 것이 아니라 죄책감을 느꼈을까? 일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하던 다니엘은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르던 애완동물도 반 년이면 애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사람과 반 년을 넘게 함께했다면 없던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 상태에서 윗선에서 암살 대상자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제아무리 매정한 스파이라도 인간인 이상 죄책감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루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다니엘은 숙소에 도착한 이후 잠을 자지 않고 소파에서 밤을 지새웠다.

그러며 소파의 등받이 위에 장교 코트를 올려놓고 ‘루시 프로젝트’ 문서가 안주머니 밖으로 삐져나오도록 만들었다.

만약 루시가 암살을 하러 온다면 필연적으로 장교 코트를 조사할 수밖에 없게끔 말이다.

이후 소파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현관문 앞에서 락픽으로 잠금 장치를 해제하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루시가 왔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자는 척을 하였다.

일어나 있다가 직접 종이를 건네주는 방식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루시 입장에서 다니엘이 ‘살기 위해 문서를 위조’했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연합국의 실험체인데도 연합국에 충성하는 걸 보면 알게 모르게 세뇌를 당했을 테니까.’

그러니 다니엘은 자는 척을 하여 루시가 ‘우연히’ 문서를 발견하는 상황을 노린 것이다.

그래야만 루시 입장에서 문서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테니까 말이다.

문서의 내용이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루시가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진다면 생존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루시가 연합국에 충성하고 명령에 따르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연합국은 생체 실험과 관련이 없다’고 믿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굳건한 믿음에 조금의 균열만 일으켜도 루시는 자신의 판단에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루시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다니엘이 예상한 대로 움직여주었다.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자면 다니엘이 루시를 보안국에서 지켜준 것도 맞았고,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묵인하고 있었던 것도 맞았으니까.

더해 루시가 사리분별 없이 연합국에 광적으로 충성하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통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루시가 계속해서 암살을 주저할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말해 미지수였다.

언제라도 목숨을 위협받는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보안국에 수사를 요청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현재 다니엘은 참모 본부에서 보안국 경감을 압박한 일로 인해 보안국과 척을 진 상태다.

또한 내용은 증명할 수 없는 문서 한 장은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었으며, 부관이 스파이라면 그 상관 또한 조사를 받게 되어 있으니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조사 과정에서 루시가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숨겨주었다는 정황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일이 무척 어렵게 흘러갈 테니까.

‘그렇다면…….’

현재 다니엘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합국이 루시에게 생체 실험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채증하는 것이었다.

‘루시 프로젝트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확보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루시는 더는 연합국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테니 암살 위험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뿐인가? 혼자서 한 개 대대를 상대할 수 있는 인간 병기를 아군으로 두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루시를 전향시킬 방법에 대해 골몰하던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고민한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옛날에 본 스파이 영화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스파이가 암살 대상자를 사랑하게 되어 결국 본국의 명령을 저버린다는 내용의 영화였다.

영화의 내용을 떠올리던 다니엘은 본인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렸다.

‘그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가 날 사랑하게 될 리가.’

차라리 무력으로 루시를 제압하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다니엘이 상념을 꺼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숨을 부지했으니 축하 기념으로 위스키나 한 잔 마실 셈이었다.

*

같은 시각, 제국 아이젠크로네 궁전.

황녀 셀비아의 침실.

“어디 보자. 내년에 국가 선전부에 투입될 예산안이…….”

고급스러운 실크 잠옷을 입은 셀비아가 각종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최근 대리청정을 맡게 되면서 차기 황제인 셀비아에게도 현 황제와 동일한 보고가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걸 처리하려니 자는 시간도 아까웠던 것이다.

그리 서류를 읽어 내려가고 있을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허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열린다.

문 너머에는 황금빛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마리안트 폰 암베르그.

그녀는 셀비아의 어머니이자 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의 아내인 황후였다.

“새벽까지 열심히구나. 아직은 네 아비에게 의지해도 될 텐데 말이다.”

마리안트가 가까이 다가오며 건네는 말에 셀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의지만 해서는 황제가 될 수 없어요. 지금부터 익숙해지지 않으면 나중에 국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을 테니까 노력하는 게 맞아요.”

“역시 내 딸아이라 그런지 기특하구나.”

낮게 웃음을 흘린 마리안트가 셀비아의 옆자리에 앉는다.

눈치를 보고 서류를 갈무리해서 옆으로 치운 셀비아가 마리안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머니.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럼. 사실은 일전에 네가 그이랑 나눈 대화를 듣고 조언을 해주려고 왔단다.”

“조언이요?”

셀비아가 반문하자 마리안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니엘 슈타이너라고 했지? 이번에 연설을 성공적으로 이끈 젊은 장교 말이다. 궁금하여 이 어미가 조금 찾아본 바로는, 야망과 능력이 있으니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 같더구나.”

마리안트가 셀비아의 손등을 가볍게 붙잡았다.

“딸아. 그이는 다니엘이라는 장교를 경계하고 적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단다. 정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목줄을 채우고 싶으면 보다 인도적인 방법이 있으니까.”

“……인도적인 방법이라니요?”

“잃을 것이 많고 명예를 아는 남자일수록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니. 그러니 만약 다니엘이 제국의 중진이 되었을 때 말을 듣지 않는다면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사용하도록 해라.”

이해가 안 되었던 셀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만이 가지고 있는 무기라니요?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있단다. 내가 그걸로 네 아비를 사로잡고 널 낳았으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말꼬리를 흐린 셀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셀비아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마리안트가 손을 거두었다.

“이 어미가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경계하고 적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단다. 물론 절대 성급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디까지나 여러 방법 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셀비아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딸을 귀엽게 바라보던 마리안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셀비아. 명심하렴. 아무리 뛰어난 남자라도 성욕 앞에서는 바보가 된다는 점을 말이다.”

의미심장한 말을 전한 마리안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서 침실을 나가버렸다.

그제야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린 셀비아가 얼굴을 붉힌다.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찾아와서는 왜 망측한 소리를 하시는 건지…….’

고개를 휘휘 저은 셀비아는 서류를 들었다.

다시금 정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마리안트가 늘어놓고 간 말이 머릿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는 터라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이상야릇한 상상을 하게 된 셀비아가 양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얼굴을 덮은 손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파르르 떨린다.

‘정신 차려,셀비아.제발…….’

솔직히 말해, 부끄러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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