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좋았어!’
셀비아가 호출했다기에 이번에는 또 무슨 악운이 기다리고 있을까 싶었는데 단순한 기우였다.
셀비아가 건넨 제안은 악운이라기보다는 행운에 가까웠으니까.
‘안 그래도 제도에 있는 게 여러모로 눈치가 보였는데…….’
합법적으로 외국에 체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대리청정을 수행하고 있는 셀비아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으니 벨라노스 외교대사로 임명되는 것은 거의 확정이나 마찬가지였다.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격언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벨라노스에 외교대사로 가게 되면 분명 좋은 대접을 받게 될 것이다.
중립국인 이상 세계 최고 수준의 군사력을 가진 제국과 갈등을 빚기는 싫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벨라노스 외교대사로 파견되는 것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휴가와 같았다.
제도에 도사린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데, 대접을 받으며 외국에서 체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즐거운 기분을 숨기지 않으며 개인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문을 열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작전참모부장인 에른스트가 집무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장님? 안 가셨습니까?”
의아했던 내가 물어보자 뒷짐을 지고 있던 에른스트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자네가 황녀 전하랑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혹시 나에게만 조금 귀띔을 해줄 수 있겠나?”
능글맞은 부탁 덕분에 에른스트가 왜 이곳에서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참모 본부에서 부장급 직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실무는 물론이고 정치에서도 나름대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라는 소리다.
그러니 ‘황녀 전하가 참모 본부에 직접 찾아왔다’는 소식에 대해 정보적 우위를 점하고 싶은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에른스트는 기본적으로 믿을만한 사람이니 거절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건 사방에 떠들고 다닐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직 결정이 난 사안이 아닌 만큼 대외비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외비라…… 알겠네. 그런데 혹시 괜찮으면 사인을 하나 해줄 수 있겠나? 우리 딸아이가 자네 팬이라서 말이야.”
사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가만히 있자 에른스트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종이 두 장과 만년필이었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내 부하라고 자랑이란 자랑은 다 해놨는데 사인 하나 못 가져가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야. 가장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좀 도와주게.”
설마 이게 진짜 목적이었나.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린 내가 에른스트가 건네는 종이와 만년필을 건네받았다.
상관의 부탁인데 하지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왜 두 장입니까?”
괜히 루시의 눈치를 살피던 에른스트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사실 내 아내도 자네 팬이라서. 어제 식사 자리에서 쓸데없는 우표 모을 시간이 있으면 다니엘 중령님 사인이라도 받아오라고 타박을 하는데…… 진짜 망할 여편네가.”
한숨을 푹 내쉰 에른스트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자네는 절대 결혼은 하지 말게. 연애를 할 때는 천사나 다름없던 사람이 결혼을 하고 나니 악마로 변해버렸어. 솔직히 말해 하루하루가 고달플 지경이야. 자식이 예쁘고 귀여워서 사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확 도망가버렸을지도 몰라.”
어딘가 모르게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에른스트의 말에 맞장구를 친 다니엘이 종이 두 장에 모두 사인을 해서 돌려주었다.
사인을 받은 에른스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다가 문득 생각난 건지 손을 들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자네에게 전해주려던 편지가 있었는데.”
에른스트가 품에 손을 넣고 뒤적거리더니 편지 봉투 한 장을 꺼낸다.
“작전 참모실로 온 편지인데 수신인이 자네로 되어 있더군. 사관학교에서 온 편지던데 누구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사관학교라면…….”
설마 프리엔인가.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기분을 느낀 내가 편지를 받았다.
“일단 읽어보겠습니다.”
입구의 봉인을 열고 편지를 꺼내 펼치자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문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친애하는 다니엘 중령님께.
제가 존경하고 선망하는 다니엘 중령님.
공사다망하신 와중에 편지를 읽게 만들어 참으로 죄송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사관학교의 조기 졸업을 목전에 두고 있기에 보고차 편지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어요.
학장님께서 우수한 학업 성적과 더불어 북부에서의 공적을 인정해주신 덕분이에요.
정말 잘 된 일이지요?
앞으로 조금만 더 지나면 다니엘 중령님의 지휘 아래에서 연합국과 연합국의 손을 잡으려는 짐승들을 모두 살처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마 다니엘 중령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겠지요.
지난 총력전 연설에서 연합국의 짐승들에 대한 진심을 가감 없이 보여주셨으니 말이에요.
총력전 연설을 듣고 감동한 나머지 제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다니엘 중령님은 모르실 거예요.
덕분에 제 신앙과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 더 커졌답니다.
아. 전해드리고 싶은 말은 많지만 곧 소등 시간이라 그만 써야 할 것 같아요.
다니엘 중령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며 이만 편지를 마치도록 할게요.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프리엔 레밀리아트가.』
편지를 다 읽은 내가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며 에른스트를 돌아보았다.
“……부장님. 설마 프리엔이 참모 본부로 배속됩니까.”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엔이 참모 본부 직할 부대에 지원하기도 하였고, 참모총장님과 참모차장님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으니 아마 본부 소속이 될 걸세.”
덕분에 절로 한숨이 나왔지만 오늘만큼은 참을 수 있었다.
‘좋은 소식이 있으면 나쁜 소식도 들려오기 마련이다.’
벨라노스에 외교대사로 파견되어 누릴 행복을 생각하면 프리엔이 참모 본부에 합류하는 불행 정도는 충분히 상쇄가 가능하였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미래의 불행을 염두하지 말고 현재의 행복을 만끽하도록 하자.
*
그날 저녁, 에드리아 왕궁의 연회장.
“다니엘 슈타이너가 벨라노스에 외교대사로 파견된다고?”
백작 칼레드라의 반문에 중앙정보부 부국장 베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첩보에 의하면 대리청정을 맡고 있는 황녀 셀비아가 외교부에 다니엘 슈타이너를 벨라노스의 외교대사로 임명하라 명했다고 합니다.”
타국의 중진들을 초대한 연회장은 말소리와 음악으로 인해 북적거렸지만, 백작 칼레드라의 주변은 고요하였다.
보고를 받기 위해 그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멀리한 것이었다.
“제국의 영웅이자 총력전 연설을 성공 시킨 다니엘을 한직인 벨라노스 외교대사로 보낸다라…….”
칼레드라가 생각에 잠기자 베크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보기에는 제국의 황실과 마찰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개인에게 국민들의 지지가 쏠리는 현상을 황실의 권위 하락으로 본 것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으로 공을 너무 많이 쌓은 전쟁 영웅들은 황실의 눈엣가시로 전락하기 마련이었다.
베크는 다니엘 또한 비슷한 전철을 밟는 것이라 생각하여 한 말이었지만, 칼레드라가 생각하기에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틀렸다. 놈은 우리가 ‘다니엘 슈타이너가 황실과 척을 졌다’라는 착각을 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아마 벨라노스의 외교대사로 임명된 것도 다니엘 슈타이너 본인의 의지였을 거다.”
평범한 전쟁 영웅이라면 황실과 척을 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다니엘 슈타이너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연일 연합국을 압박하던 천재 참모다.
그러니 이 또한 연합국을 속이기 위한 기만책이라고 보는 편이 합당하였다.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역겨운 수를 쓰는군. 부국장. 제국의 외교부에서 다니엘 슈타이너를 어떤 방식으로 벨라노스에 보낼 것인지는 알아냈나.”
칼레드라가 시선을 던지자 베크는 급히 서류를 들어서 살펴보았다.
“예. 외교 공관용 선박을 타고 이틀에 걸쳐 이동한다고 합니다. 짧은 거리이기도 하고 외교상 마찰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호위함은 두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좋다. 그럼 벨라노스 해상 방위부대의 12지구 사령관에게 연락해라. 연합국에서 잠수함을 하나 보낼 테니 제국의 공관용 선박이 뜨는 시간대에 영해를 개방하라고 말이다.”
칼레드라의 말을 들은 베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벨라노스 해상 방위부대 12지구 사령관이라면 연합국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아군으로 포섭한 인물이다.
그에게 영해를 개방하라고 말하는 것은 달리 말해, 잠수함을 이용하여 다니엘 슈타이너가 탑승한 선박을 파괴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백작 각하. 만약 계획이 성공한다고 해도 우리는 벨라노스에 심어 놓은 꼬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베크를 한 번 흘겨본 칼레드라가 즉답했다.
“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루시는 연합국의 명령을 듣고 있지 않았다.
원래라면 지금쯤 시체가 되어 있어야 할 놈이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이다.
그건 곧 루시의 암살을 어떤 식으로든 파훼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 다니엘이 벨라노스에서 임무를 마치고 제국에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지금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로운 적수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다니엘이 지금 이상으로 위험한 인물이 되기 전에 삭초제근을 해야 된다.
그 어떠한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말이다.
‘다니엘 슈타이너…….’
감히 이쪽을 속이려 든 것이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지팡이의 머리 부분을 꽉 붙잡은 칼레드라가 두 눈을 날카롭게 좁혔다.
‘네 잔꾀가 결국…….’
너를 죽음으로 몰아갈 것임을 명심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