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s

Chapter 76 - Chapter 76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에드리아.

백작 칼레드라의 집무실.

“흐음…….”

집무 책상 앞에 앉은 칼레드라가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미간을 찌푸린다.

칼레드라 앞에는 중앙정보부 부국장 베크가 긴장감 속에서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읽은 칼레드라가 무슨 행태를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벽걸이 시계에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고요함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려온다.

보고서를 면밀하게 검토하던 칼레드라는 눈을 감으며 말문을 열었다.

“부국장.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모두 사실인가.”

서늘한 목소리가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심호흡을 한 베크는 최대한 평이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실 확인이 끝난 문서입니다. 거짓은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베크의 말에 칼레드라는 이를 꾹 깨물더니 침음을 흘렸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다니엘 슈타이너의 총력전 연설 이후 제국의 변화’에 관해 서술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군수 산업을 포함한 제국의 모든 수치가 긍정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다니엘이 행한 총력전 연설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수치화된 자료를 목격하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놈을 얕보고 있었군…….’

노르디아 침공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고, 협상 자리에서 엘드레시아 왕국의 외무대신을 굴복시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제국에 발군의 참모가 나타난 걸로 치부하였다.

하지만 물밑에서 일어나는 황위 계승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이번에 총력전 연설까지 성공시키는 다니엘의 모습에서 칼레드라는 모종의 공포를 느꼈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제국을 좌지우지할 생각이다.’

칼레드라의 입장에서는 다니엘은 제국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입맛대로 주무르기 위해 사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 생각하니 동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칼레드라가 에드리아를 손에 넣기 위해서 자행했던 행보와 결이 비슷하였으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칼레드라와 달리 자금과 배경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혈혈단신으로 승승장구하여 지금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의지와 통찰력이 아니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위험하군.’

다니엘이 지금 이상으로 몸집이 커지는 걸 묵과할 수 없었다.

‘놈이 제국에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순간…….’

황제보다 더 까다로운 적수가 될 것이 명확하였다.

모든 판단을 마친 칼레드라가 스르르 눈을 뜬다.

“부국장. 지금부터 다니엘 슈타이너의 위험도를 지도부 핵심 인원에서 한 단계 격상시켜라.”

“지도부 핵심 인원에서 격상하라는 건…… 정부 수반급 위험 인물로 지정하시겠다는 겁니까?”

“이의가 있나.”

베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다니엘이 수많은 공훈을 쌓고 이번 총력전 연설로 제국에 정치적 파급을 일으키기는 하였지만, 중령에 불과한 인물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는 것이 저로서는…….”

베크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칼레드라가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과 같았다.

그제야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자각한 베크가 고개를 급히 숙였다.

“중앙정보부는 물론이고 정부 각 부처에 백작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눈을 좁힌 채 베크를 바라보던 칼레드라가 화를 참아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또한 다니엘 슈타이너의 부관으로 잠입해 있는 루시에게 전해라.”

식은땀을 흘리던 베크가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무엇을 말이십니까?”

바로 말하지 않고 뜸을 들이던 칼레드라가 책상 위에 양팔을 올린다.

그물에 걸려 올라가는 것처럼, 느릿하게 손을 든 칼레드라는 깍지를 끼며 말문을 열었다.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고 말이다.”

*

늦은 저녁.

퇴근 시간이 되어 참모 본부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였다.

사람을 마주치기 싫어서 종일 집무실 안에 있었던 터라, 밖에 나오니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시원하군.”

다니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옆으로 따라붙은 루시가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입술 너머로 뻗어나온 숨결이 옅은 한기가 되어 아지랑이처럼 번지다가 사라진다.

“……시원하다기보단 조금 춥지 않습니까?”

“부관의 말을 들으니 추운 것 같기는 하군. 아무래도 겨울이 오고 있으니까 말이야.”

“겨울…….”

붉은 눈동자를 굴려 참모 본부의 나무들을 살펴본 루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낙엽들이 거의 다 떨어져서 나무들은 이제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중령님의 말씀대로 겨울이 오고 있군요.”

분명 봄이 지나기 전에 다니엘 슈타이너의 부관으로 들어온 것 같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두 개의 계절을 함께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을 찰나에 다니엘이 지나가듯 말했다.

“겨울에는 또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디저트가 있는 법이지. 그러고 보니 황금 장미 제과점에서 크리스마스 한정으로 슈톨렌을 판다고 하던데.”

“……슈톨렌?”

무슨 디저트인가 궁금했던 루시가 가만히 눈을 깜빡인다.

그걸 본 다니엘이 루시의 디저트 지식에 신지평을 열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거드름을 피웠다.

“겉이 설탕으로 덮여 있는 달콤하고 맛있는 빵이지. 설탕에 뒤덮인 빵의 모습은 마치 눈밭을 연상하게 만들어서 여러모로 풍미가…….”

유창하게 말하던 다니엘은 별안간 말꼬리를 흐렸다.

디저트 이야기를 들은 루시의 눈동자에 호기심과 기대감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고민하던 다니엘이 헛기침을 한 번 내뱉고는 말했다.

“크리스마스에 시간이 난다면 같이 가도 된다.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중령님이 권하신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루시의 무덤덤한 대답에 다니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슈톨렌을 먹고 싶어서 빤히 바라봐놓고는…….’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괜히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참기로 하였다.

‘최근에 특별 진급으로 심기를 건드렸으니까.’

다니엘은 작전참모차장인 세드릭에게 루시의 유능함을 설파하여 특별 진급 심사를 하게끔 유도한 전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화가 났을 텐데 이번에도 또 놀리면 암살 스택이 쌓일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괜히 눈치를 보던 다니엘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한 번 확인하고는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시간이 늦었는데 먼저 가도록 해라.”

“……중령님은 안 가십니까?”

“나는 알다시피 인기인이라서 말이다.”

다니엘이 참모 본부 입구를 가리켰다.

시간이 꽤나 지났는데도 ‘전쟁 영웅 다니엘 슈타이너!’라고 적힌 피켓을 든 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몇 사람들이 보인다.

다니엘은 루시가 저들에게 같이 휘말릴까 싶어 편의를 봐준 것이다.

그걸 모르지 않았던 루시는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에게 인사를 전한 루시가 서류 가방을 든 채 걸음을 옮긴다.

그대로 참모 본부의 입구를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루시에게 눈길을 줄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다니엘에 비하면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가 가까이 다가가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월하게 참모 본부를 빠져나온 루시는 근처 빵집으로 향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크루아상이나 바게트 빵을 살 셈이었다.

‘아니면…….’

오늘은 새로운 걸 먹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대로에 들어선 루시는 호객 행위를 하는 광대를 볼 수 있었다.

“오늘 오후 열시에 바란팔트 극장에서 신세계를 경험하실 신사 숙녀 여러분들을 모십니다! 내적 성찰을 원하시나요? 혹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판타지를 원하시나요? 무엇을 상상하시던 그 이상을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광대 분장을 한 남자는 미소를 지은 채 목청을 높이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관심을 가진 몇몇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본 루시가 고개를 저었다.

저런 요란한 호객 행위를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다.

무시하며 지나가려던 순간 광대가 루시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전단지를 나눠준다.

“이봐요! 예쁜 장교 아가씨! 우리 극장에 오셔서 관중석을 빛내주시지 않으시겠어요? 군인 할인 혜택이 있어서 싼 값에 오실 수 있다구요!”

“호의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광대의 제안을 거절하려던 루시는 무의식적으로 전단지를 내려봤다가 멈칫하였다.

전단지의 오른쪽 위에 미묘하게 돌출된 부분이 보였던 것이다.

‘암호화 점자…….’

이건 연합국이 적국에 잠입한 스파이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방식중 하나였다.

“에이. 오시면 분명 만족하실 거라니까요?”

광대가 목소리를 낮추며 전단지를 더욱 가까이 들이민다.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전단지를 받자 광대는 아하하 웃으며 다른 곳으로 떠났다.

광대가 주변의 시선을 잡아끄는 걸 확인한 루시는 전단지의 점자에 손을 올렸다.

그러며 연합국의 명령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다니엘 슈타이너의 등급을 정부 수반급 위험인물로 격상한다. 그러니 지금 이상으로 연합국에 위해를 끼치기 전에…….’

명령을 모두 읽은 루시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남몰래 침을 삼킨 루시는 떨리는 손끝을 이용하여 다시 한 번 명령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자리에 선 채 굳어 있던 루시는 짧은 침묵 끝에 명령서의 마지막 구절을 읽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를 즉시 제거하라.’

몇 번을 다시 봐도, 명령서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More Chap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