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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2 - Chapter 72

셀비아의 시선이 이리도 부담스럽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던 다니엘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전하? 전쟁 채권 발행과 관련된 연설은 국가의 중대사입니다. 그러니 저보다는 연설 경험이 풍부하고 언변이 좋은 자를 물색하심이 옳을 것으로 압니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다니엘의 속은 실시간으로 타들어가고 있었다.

전쟁 채권과 관련된 연설이니만큼 셀비아는 수많은 시민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단순히 시민들만 오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외신 기자들과 국회의사당의 정치인들까지 앞다투어 자리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였다.

그뿐인가? 제국 전역에서 연설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끔 라디오 방송까지 병행할 터였다.

그건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을 제국 전역에 각인시킴과 동시에 먼 외국까지 이름을 퍼트리는 것과 같았다.

지금 이상으로 유명하지는 것은 원치 않았던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셀비아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

마른침을 삼킨 다니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또한 저는 제국의 참모 본부에 속해 있는 작전 참모입니다. 전하께서도 알다시피 참모 본부에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무척이나 많습니다.”

“흐응. 그래서요?”

“제가 연설을 준비한다고 빠지게 되면 참모실의 인원들이 그 과중한 업무를 나눠 받아야만 합니다. 양심상 그런 민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상체를 뒤로 물린 셀비아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참모실의 인원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 없다? 다니엘 중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네요.”

“……어떤 점이 이해가 안 되십니까.”

“그냥 간단한 의문이에요. 어째서 다니엘 중령은 장차 제국의 주인이 될 나의 부탁보다 참모실의 인원들을 우선할 수 있는 걸까.”

나긋한 어조였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협박처럼 들려왔다.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려야만 제 뜻에 동조하실 건가요?”

협박처럼 들린 게 아니라 협박이 맞았다.

과연 지배자의 피를 타고난 것인가.

장난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특유의 압박감이 다니엘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더는 거절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실언을 범했습니다. 참모실 인원들의 고생 따위는 장고 끝에 국정을 행하시는 황녀 전하의 고생에 비할 바가 없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정중하게 사과를 전하는 다니엘의 모습에 셀비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제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자세한 일정이나 연설 방식에 대해서는 국가 선전부에서 나온 공보 담당자가 설명할 거니 새겨듣도록 하세요.”

“…….”

“아. 참모 본부에는 제가 직접 말을 전해 둘 테니 업무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당분간은 연설 준비에만 매진해 주시면 돼요.”

미리 준비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늘어놓는 셀비아 덕분에 다니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나를 연설가로 세울 생각이었군.’

실내 정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모든 게 결정됐다고 봐도 무방하였다.

당했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남몰래 웃음을 흘리고는 셀비아를 바라보았다.

“황녀 전하. 혹여 실례가 안 된다면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본래는 질문 같은 걸 안 받는 주의지만, 다니엘 중령이라면 특별히 허락하도록 할게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그냥…… 어째서 저를 호출하신 것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사람을 시켜 명령을 내리신다면 저는 거절할 수 없었을 텐데요.”

날카로운 지적이다.

제아무리 전쟁 영웅이라고 해도 일개 중령이 황태녀의 명령을 거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왜 굳이 직접 대면해서 말을 전한 것인지를 다니엘은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 질문이 셀비아의 입장에서는 조금 마뜩잖게 다가왔다.

‘눈치가 없는 걸까. 눈치가 없는 척을 하는 걸까.’

셀비아는 다니엘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았다.

첫 번째는 사실 그리 위험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다니엘이 목숨을 걸고 자신을 살려주려고 했다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거기다 이번에는 다니엘이 직접 나서서 황자의 사조직을 검거하였다.

그 과정에서 셀비아는 당연하게도 다니엘에게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니엘이란 남자는 어떤가? 시종일관 상급자를 대하는 것처럼 딱딱하게 굴고 있었다.

‘……설마 다니엘은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니엘을 빤히 바라보던 셀비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가 무엇일지는 본인이 천천히 생각해보도록 하세요.”

그리 말한 셀비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셀비아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다니엘 중령? 연설이 잘 끝난다면…… 앞으로도 종종 만남을 가졌으면 해요.”

옅은 미소를 지어준 셀비아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망연히 지켜보던 다니엘이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들어 턱을 쓰다듬었다.

‘저게 대체 무슨 뜻이지? 나를 자신의 대변인으로서 부려먹겠다는 소린가?’

동상이몽이 따로 없었다.

*

대리청정을 수행하고 있는 황녀의 부탁은 크게 보면 황제의 명령과 다를 게 없었다.

황녀의 국정 수행에 최종 승인을 내려주는 것이 황제인 베르트함이었으니까.

그래서 다니엘은 ‘연설을 준비하라’는 셀비아의 부탁 아닌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일주일 내내 국가 선전부에서 나온 공보 담당자인 한스랑 합을 맞췄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연설 당일인 오늘까지도 다니엘은 한스와 말을 나누고 있었다.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지만 반전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전쟁이 장기화가 되면서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어요.”

“……그 정도입니까?”

“예. 이게 가장 최신 자료입니다. 중령님께서 한 번 보십시오.”

연설 장소인 야외 공연장 무대 뒤편에서, 한스가 품에 안고 있는 여러 서류철 중 하나를 꺼내 다니엘에게 건네준다.

서류철을 건네받은 다니엘이 설문조사 통계를 읽어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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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찬반 여론 설문조사 통계》

표집단 : 제국 주요 도시 시민 1,000명

응답자 수 : 약 18,000명

질문 : 현재 제국이 진행중인 전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빈도 분석

1.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 – 8,208명(45.6%)

2. 전쟁을 멈춰야 한다 – 8,298명(46.1%)

3. 잘 모르겠다 / 무응답 – 1,494명(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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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의 말대로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쪽이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반전주의자들이 이번에 처음으로 전쟁 옹호자들을 이겼습니다. 물론 반전을 외치는 자들 중에 연합국의 간첩 세력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리도 높은 비율이 나왔다는 건 국민의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확실히 이 정도 비율이면 반전주의자가 간첩에게 선동당한 세력이라 주장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목 시계를 한 번 확인한 한스가 다른 서류를 건네준다.

이번 연설에서 말할 내용이 적힌 연설문이었다.

“그러니 저희는 반전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선에서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그들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한스와 마찬가지로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다니엘이 무대로 고개를 돌린다.

“슬슬 올라가서 연설을 해야 할 것 같군요.”

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국가 선전부는 다니엘 중령님만 믿도록 하겠습니다.”

한스의 말을 들은 다니엘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는 무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른 다니엘이 무대 위에 나타나자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환호가 일어난다.

귀가 아플 정도의 환호에 고개를 돌린 다니엘은 관중석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많군…….’

일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던 공연장의 좌석이 꽉 차 있었다.

국가 선전부에서 전쟁 영웅 다니엘 슈타이너의 중요한 연설이 있다며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홍보한 덕분이었다.

이런 자리가 부담스러웠지만 명령을 받은 이상 다니엘은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연단 앞으로 걸어간 다니엘이 미리 설치된 마이크를 툭툭 두드린다.

그 소리가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퍼져나가자 환호 소리는 금방 잠잠해졌다.

수많은 인파들 앞에서 한 번 미소를 지어준 다니엘은 한스가 전해준 서류를 펼쳤다.

이미 몇 번이나 봐서 익숙한 연설문을 흘겨본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참모 본부 소속 중령 다니엘 슈타이너입니다.”

앞자리에서 약소한 환호가 일었다.

그들이 진정할 때까지 잠시 기다린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본격적인 연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불필요한 혼란이 생기지 않도록 제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저 다니엘 슈타이너는 전쟁을…….”

뒷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다니엘이 연설문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전쟁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저 또한 반전주의자라면 반전주의자겠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 옹호자와 반전주의자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 중립의 시선으로 쓴 글이었다.

이대로 말한다면 채권 판매를 위한 연설은 미온적인 성공을 거두리라.

‘그렇게 되면 나는…….’

앞으로도 셀비아의 최측근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다 셀비아가 황제가 되면 다니엘의 명성은 지금보다 더 높아지게 된다.

그건 곧 전범 재판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암살로 요절할 가능성이 무럭무럭 자라난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하였다.

가늘고 길게 살고 싶은 다니엘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미래 중 하나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다니엘은 관중석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반전주의자들을 발견하였다.

전쟁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다.

‘반전주의자들을 자극해서 이번 연설을 대대적으로 망친다면…….’

셀비아는 물론이고 세계의 관심과도 멀어질 것이다.

연설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놈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판단을 마친 다니엘은 연설문이 들어가 있는 서류를 닫았다.

그러며 수많은 카메라가 섬광을 터트리는 정면을 당당히 바라보았다.

“저, 다니엘 슈타이너는 전쟁을…….”

두 눈을 날카롭게 좁힌 다니엘이 양손을 들어 연단의 가장자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전쟁광을 연기하며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역사에 다시는 없을 총력전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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