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후.
중령으로 진급한 다니엘이었지만 하는 일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취급할 수 있는 기밀의 수가 평소보다 많아졌다는 걸 제외하면 작전 참모로서의 역할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으니까.
혹여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다행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는 것에 내심 안도한 다니엘은 생각했다.
당분간은 최대한 쥐 죽은 듯 살자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다니엘의 결심이 무색하게도 황실에서 연락이 오고 말았다.
정확히는 차기 황제인 셀비아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황궁에 방문하도록 하세요.』
퇴근 시간이 되었을 때 내명부의 시녀가 친히 찾아와서 건네준 편지지에 적힌 글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만나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 것으로 보였기에, 다니엘은 지금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는 시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참모 본부 밖으로 나온 다니엘은 고급 세단 차량이 주차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다니엘이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던 셀비아가 보낸 황실의 차량이었다.
헛웃음을 흘린 다니엘은 세단에 탑승하였고, 다니엘을 태운 세단은 황궁으로 향했다.
황궁에 도착하여 세단에서 내린 다니엘은 시녀를 따라 별궁에 입장하였는데, 본궁만큼이나 큰 건물인지라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 복도를 몇 번이나 돌아서 도착한 곳은 거대한 실내 정원이었다.
따스한 공기가 흐르는 실내 정원에는 관엽식물과 화초들이 총천연색의 빛깔을 뽐내며 흐드러지고, 라벤더와 로즈마리 같은 허브들이 은은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력과 돈을 갈아 넣어서 만든 지상낙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새삼 황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안쪽으로 이동하던 다니엘은 멈칫하였다.
정원의 공터에서 무릎을 꿇은 채 강아지와 놀아주고 있는 셀비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옳지. 잘했어.”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셀비아가 가볍게 쓰다듬는다.
강아지의 정체는 윤기나는 검은 털과 단단한 체구가 인상적인 도베르만이었다.
셀비아가 개를 키웠었나?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가자 도베르만이 고개를 돌린다.
으르릉─
그러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다니엘을 경계하였다.
덕분에 옆으로 시선을 흘긴 셀비아는 다니엘을 발견하였다.
가느다란 미소를 지은 셀비아가 도베르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경계하지 마렴. 내 친구란다.”
그러자 도베르만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으르렁거림을 멈추었다.
그게 내심 신기했던 다니엘이 말문을 열었다.
“말을 굉장히 잘 듣는군요?”
“충성심이 높은 견종이니까요. 거기다 다른 개들에 비해 지능도 높은데다 날렵하고 잘생긴 외모라 요즘 인기가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한 마리 데려왔답니다.”
낮게 웃음을 흘린 셀비아가 도베르만의 볼을 가볍게 꼬집는다.
“이 아이도 황실에 팔려 온 걸 싫어하지는 않을 거예요. 먹을 거리가 풍족한 건 물론이고 매일 수많은 시녀들에게 떠받들어지고 있으니까요. 거기다 자신의 주인이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라니 복에 겨웠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도베르만의 볼을 놓은 셀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돌린다.
덕분에 다니엘은 볼 수 있었다.
셀비아가 왼쪽 어깨에 두르고 있는 붉은 망토를 말이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원단을 사용한 것 같은 붉은 망토에는 황금실을 이용하여 자수를 놓은 독수리 문양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저 어깨 망토는 차기 황제가 될 사람에게 내려지는 일종의 예복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다.
다니엘의 시선을 의식한 셀비아가 두 눈을 부드럽게 좁혔다.
“다니엘 중령의 생각은 어떤가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이 도베르만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지에 대해서 묻고 있어요.”
셀비아의 질문에서 다니엘은 어딘가 모르게 자신을 떠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부전여전이라 이건가…….’
황제가 보여줬던 태도와 비슷함을 느낀 다니엘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건 도베르만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성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미심장한 대답에 셀비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근처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값비싼 과자와 함께 뜨거운 커피 두 잔이 마련되어 있었다.
“강아지 이야기는 이쯤하도록 하고 커피나 한 잔 할까요?”
“호의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는 것으로 감사함을 표현한 다니엘이 셀비아와 함께 테이블로 걸어간다.
셀비아가 먼저 의자에 앉은 후에 다니엘이 반대편에 착석하였다.
괜히 옷매무새를 한 번 다듬은 다니엘은 셀비아의 얼굴을 한 번 살펴보았다.
‘화장을 했군…….’
티가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옅은 화장이었지만 다니엘에게는 그 차이점이 보이고 있었다.
‘하긴 대리청정이 시작된 탓에 대외적으로 활동해야 할 테니…….’
과하지 않은 기초화장 정도는 하고 다니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이었다.
허나 다니엘의 예상과는 달리 셀비아가 화장을 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커피의 향을 음미하는 척 하면서 다니엘의 얼굴을 살피던 셀비아는 내심 불만이었다.
‘오늘 나름대로 치장을 해봤는데…….’
시녀장에게 부탁해서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화장을 해달라고 하고, 너무 과하지는 않은 정도에서 돋보일 수 있게끔 귀걸이까지 했는데도 다니엘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뭐…….’
오늘 만남을 가지려 한 것은 다니엘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사기 위함이 아니었으니 크게 상관은 없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셀비아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니엘 중령. 국제정세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요?”
마찬가지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니엘이 잔을 내려놓았다.
“제 직업 특성상 늘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공화국과 연방국이 연합국에 동조하여 제국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도 아시겠군요.”
“예. 안타깝게도 말입니다.”
보름 전 칼레드라 백작이 제국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로 국제 사회는 서서히 제국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세상 어느 국가라도 자신들을 월등히 뛰어넘는 패권국의 탄생을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패권국이 될 가능성이 있는 제국이 심지어 전쟁 중이다? 연합국이 무너지면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이 낳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열강국들은 제국의 덩치가 더 커지기 전에 억누르려고 무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제국은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금쯤 제국의 군부는 물론이고 황실의 대신들과 각 분야의 장관들까지 세계의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건 비단 상류층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도의 시민들 또한 뉴스를 통해 제국이 천천히 고립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까.
다들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해야 된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차기 황제가 될 셀비아는 이 모든 흐름속에서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니엘 덕분에 세계대전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셀비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다니엘을 바라본다.
“지금부터 세계대전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공화국과 연방국이 참전하고 난 이후에 준비하면 너무 늦으니까요.”
“뾰족한 수라도 있으십니까.”
“뾰족한 수는 없어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일단은 세율을 올려서 예산을 확충해야 하는데…… 과도하게 올릴 수는 없어요.”
안 그래도 전쟁이 장기화가 되면서 시민들이 느끼는 피로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판국이다.
이 시점에서 세율을 과도하게 높여버리면 국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폭동이 일어나거나 내전이 발발할 수 있으니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세율에는 한계가 있으니 전쟁 채권을 발행할 생각입니다. 문제는 이 전쟁 채권을 민간에서 구매하게 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점이에요.”
“전쟁이 지금 이상으로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는 시민들이 많으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지금 생각하는 건 채권 발행과 동시에 시민들에게 전쟁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연설가를 세우는 거예요. 다니엘 중령의 생각은 어떤가요?”
다니엘이 별다른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입니다. 공공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채권 발행과 연설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럼 연설가 선정이 중요하겠군요.”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어떤 이를 연단에 세우는 게 좋을까요?”
“감히 조언을 드리자면 비교적 최근에 군사적 혹은 정치적인 업적을 세운 인물을 물색하십시오. 이름을 언급했을 때 시민들이 떠올리기 쉬운 인물이여야 할 겁니다.”
셀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요?”
“용모가 수려한 인물이 좋겠습니다. 잘생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인상이여야 합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서 외모가 정갈한 사람의 말을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말보다 신뢰하니까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셀비아가 테이블 위에 손을 얹는다.
“흐응. 다른 조건은요?”
“권위와 카리스마를 활용하기 위해서 군에 속한 인물을 내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겁니다. 실제로 전장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으면 더 좋겠군요. 채권을 팔기 위해 다소 거짓을 섞더라도 시민들은 그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말하다 말고 이상함을 느낀 다니엘이 입을 다물었다.
정론을 늘어놓고 보니 지금 연설가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셀비아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한 것인가.
어딘가 모르게 셀비아의 시선이 집요해짐을 느낀 다니엘이 식은땀을 흘렸을 무렵이었다.
“다니엘 중령.”
끈적한 목소리가 귀를 의심스럽게 만든다.
두 눈을 반개한 셀비아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보기에는 당신이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것 같은데요.”
덕분에, 다니엘은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