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슈타이너에 의해 일순간에 자신의 지지기반을 모두 잃어버린 황자는 반강제적으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황자가 후계자 싸움을 포기한 덕분에 셀비아는 아무런 문제 없이 제도와 황궁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멀리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황제 베르트함은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 생각하여 후계자 선정을 명분으로 제국의 중요 인사들을 황궁의 대전에 불러들였다.
당연하게도 ‘제국의 중요 인사’에는 다니엘 슈타이너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의 중대사가 결정될 때 황궁에 초대를 받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었지만, 정작 다니엘은 이 자리가 불편하기만 하였다.
‘숙소로 돌아가서 커피 한잔하며 책이라도 읽고 싶은데…….’
황금 같은 주말에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를 일이다.
남몰래 한숨을 내쉰 다니엘은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건축 양식이 돋보이는 황궁의 대전에 공작 벨바르를 포함한 궁정 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게 보인다.
그 외에도 군부의 핵심 인물들이라 할 수 있는 장성급 장교들과 국가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장관들이 줄지어 도열해있었다.
그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여 있는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이 자리가 가시방석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쪽을 흘겨보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고…….’
다들 말을 건네지 않았을 뿐이지 다니엘을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이제 겨우 소령에 불과한 군인이 황궁의 대전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높으신 분들의 눈총을 받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라면 당연한 것이었다.
괜히 시선을 마주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은 올곧게 정면만 응시하였다.
그곳에는 황제 베르트함이 황족을 상징하는 백색 제복을 입은 채 황좌에 앉아 있었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맞는 모양인지, 침실에서 보았던 허약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라. 내 아이들아.”
베르트함의 근엄한 목소리에, 붉은 융단 위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있던 셀비아와 아르노가 고개를 들었다.
셀비아와 아르노 또한 황족을 상징하는 백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제국을 이끄는 수많은 걸출(傑出)들 앞에서 너희 둘을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을 거라 본다.”
베르트함의 말에 셀비아와 아르노가 침을 꿀꺽 삼킨다.
똑같은 행동이었지만 셀비아는 희열감을 만끽하고 있었고 아르노는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짐의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탓에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음을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허례허식은 집어치우고 말하지. 오늘 이곳에서 내 뒤를 이을 후계자가 탄생할 것이다.”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놀라는 기색 없이 침묵할 뿐이었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드는 것인지 낮게 웃음을 흘린 베르트함이 자신의 자식들을 내려다본다.
“너희 둘은 나의 결정에 승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승복하겠습니다.”
셀비아의 즉답이었다.
그러나 아르노는 조금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승복하겠습니다…….”
자식들의 동의를 받아낸 베르트함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후계자를 정하도록 하겠다. 셀비아 폰 암베르그!”
호명을 당한 셀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걸 본 베르트함이 이어서 말했다.
“짐은 너의 능력을 높이 사 장차 황제가 될 재목임을 엿보았다. 나의 선지안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겠나?”
“예. 황제 폐하. 기필코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부터 내 유지를 이어받아 황실과 제국을 위해 일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백성을 존중하여 올바른 치세를 열어야 할 것임을 명심토록 하여라.”
셀비아를 향해 말을 전한 베르트함이 주변을 둘러본다.
“또한 모두는 들었는가! 앞으로 내 뒤를 이을 사람은 황녀 셀비아 폰 암베르그라는 것을 말이다!”
후계자가 정해졌으니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차기 황제인 셀비아에게 모든 힘을 실어주라는 말이었다.
황제의 말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 예! 황제 폐하!
합치된 목소리가 대전 안을 웅장하게 울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한 번 둘러보던 베르트함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후계자가 정해졌으니 더 늦기 전에 국무를 가르쳐야 하겠지. 짐은 셀비아에게 대리청정을 맡길 셈인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대리청정이라는 말에 장내에 일순간 술렁임이 일었다.
다들 섣불리 대답하고 있지 못하고 있을 찰나에 벨바르 공작이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숙인다.
“폐하. 대리청정은 아직 황녀 전하에게 이르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황제 폐하께서 조금 더 국정을 돌보시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벨바르 공작. 참으로 너무한 말이오. 정신이 온전한 날보다 온전하지 못한 날이 더 많은 짐에게 국정을 더 돌보라니. 짐을 혹사시켜 죽일 생각이오?”
눈치를 보던 벨바르 공작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인다.
“실언을 했사옵니다. 황제 폐하. 부디 신의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벨바르가 한 발 물러나자 다른 이들 또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 고요함을 한차례 즐기던 베르트함이 말했다.
“반대하는 이들이 더는 없는 것 같으니 대리청정을 시행토록 하겠소. 아흐레 뒤부터 셀비아가 나와 함께 국정을 보도록 할테니 경들은 그리 알도록 하시오.”
대전 안의 사람들이 또다시 일제히 고개를 숙인다.
─ 예! 황제 폐하!
일사천리로 동의를 받아낸 베르트함은 할 말이 끝났다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그럼 이제 다들 퇴청하도록 하시오.”
베르트함의 말에 고개를 숙인 대신들과 장관들이 천천히 대전을 빠져나간다.
그 뒤로 장성들과 기업인들이 줄지어 걸음을 옮겼는데, 그들 중 가장 계급이 낮았던 다니엘은 퇴청의 순서를 기다리며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황좌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르트함의 두 눈이 수심에 잠긴다.
‘오늘 이곳에 모인 대부분의 인원들은 모르고 있겠지.’
정치에 눈이 밝지 않은 이들은 다니엘 슈타이너가 그저 황녀의 최측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성능 좋은 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여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관조한 베르트함은 알고 있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황녀의 뜻에 따라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정한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오늘 이곳에서 황녀를 황제의 후계자로 만든 것은 셀비아 본인이 아니었다.
황제인 베르트함 또한 아니다.
오직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던 놈이 말이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던 베르트함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내명부장이 가까이 다가온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래. 저기 저곳에 있는 남자가 보이나? 소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사내 말일세.”
“예. 잘 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어때 보이는가.”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내명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외관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풍채가 조금 빈약하나 잘생긴 사내로 보입니다. 또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평소 업무가 많아 보이는군요.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한다고? 듣던 중 웃긴 소리에 베르트함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웃음이 이해가 안 되었던 내명부장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베르트함이 웃음을 갈무리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내명부장은 항상 나를 웃겨주는군. 아무튼 저 남자에게 가서 전하게. 사격장에서 이야기를 좀 나누자고 말이야.”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내명부장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
잠시 후.
퇴청하려던 다니엘은 내명부장에게 붙잡혀 황궁의 한 편에 마련된 사격장에 도착하였다.
사격장의 사격대에는 황제인 베르트함이 더블 배럴 샷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대체 이런 곳에 나를 왜 부른 거지?’
의아함 속에서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경계심을 가지며 베르트함에게 다가간 다니엘이 경례를 올렸다.
“황제 폐하.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응? 아.”
다니엘을 발견한 베르트함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받아주고는 샷건의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시선은 정면의 잔디밭 위 푸른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불러서 미안하군. 자네, 트랩 사격은 해봤나?”
“생도 시절에 트랩 사격을 즐기는 친구가 있어 듣기만 해봤습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내게 배우면 되겠군. 잘 보도록 하게.”
베르트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휘슬 소리가 들리더니 원반 두 개가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원반을 발견한 즉시 베르트함이 샷건을 들어서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탕! 타앙!
날아간 산탄이 원반 두 개를 가볍게 박살낸다.
목표를 맞췄다는 것에 만족한 베르트함이 샷건을 내렸다.
“이런 스포츠네. 사격 솜씨로 따지면 자네가 나보다 더 좋을 테니 어렵지는 않을 거야.”
“……폐하? 사격을 즐기자고 저를 이곳에 부르신 것으로 여기면 되겠습니까.”
“그럴 리가. 이건 그저 자네와 친목을 다지고자 하는 놀이에 불과하네.”
베르트함이 샷건 총열을 잡고 내리자 탄피 두 개가 튀어올라 바닥에 떨어진다.
그걸 본 시종이 베르트함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새로운 탄환을 전해주었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일차적인 목적은 포상을 내리기 위함이야.”
“……포상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이번에 내 딸아이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나? 나는 내심 셀비아가 황제가 되었으면 했던 사람이라서 자네의 노고가 무척이나 고맙더군.”
시종에게서 탄환을 받은 베르트함이 느릿한 손놀림으로 탄을 장전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자네는 물론이고 자네를 도운 이들에게도 포상을 내릴 생각이네. 물론 자네가 괜찮다면 말이야. 그러니 그들이 누구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겠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베르트함이 총열을 들어 잠그는 것으로 장전을 마친다.
이어 베르트함이 손을 들어 신호하자 시종이 뒤로 물러난다.
곧 원반이 나올 차례인지 베르트함의 시선은 다시금 잔디 위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니엘이 난처한 듯 말했다.
“폐하? 저를 도운 이들이라니요? 혹여 황자 전하의 사조직을 검거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순전히 운이 좋았다는 것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허공에 원반이 날아온다.
본능적으로 샷건을 든 베르트함이 방아쇠를 연달아 당겼다.
총구가 번쩍임과 동시에 이번에도 원반 두 개가 산산조각나서 흩어진다.
원반을 맞춘 것을 확인한 후 샷건을 거둔 베르트함이 총열을 내린다.
탄피 두 개가 튀어오른다.
“다니엘 소령.”
탄피가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베르트함이 다니엘을 돌아보았다.
“나는 지금 자네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야. 이를테면 명령에 가깝네. 그러니 다시 한 번 묻지.”
멀리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짧은 침묵 끝에 베르트함이 말을 이었다.
“자네를 도운 세력이 대체 어디서 뭐하는 놈들인지 말하게.”
베르트함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미묘한 표정의 변화에 다니엘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포상을 위해 묻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