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침묵하던 벨바르는 치열이 뒤틀릴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다니엘의 손을 붙잡는 순간 벨바르는 황자를 배반하게 된다.
바하트란테 가문이 대대로 지켜온 황실의 정통성을 스스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선조들이 지켜온 신념을 위해서라면 그깟 목숨 따위 언제라도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은? 가족들에게 대체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벨바르에게 있어 신념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혈연이었다.
당연한 것이다.
그는 가문의 주인이기 이전에 아버지였으니까.
장성한 아들들이 어떤 꿈을 가지고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빛나는 미래를 신념을 지키겠다는 이유로 파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떻게 해야…….’
거듭되는 고뇌에 두통을 느낀 벨바르의 시야가 한차례 떨린다.
벨바르는 안다. 이건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눈앞에 있는 이 악마는 협상이 결렬나는 순간 필시 학살을 자행할 것이었다.
무감한 눈빛과 인간성이 느껴지지 않는 미소에서 다니엘 슈타이너의 냉혹함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벨바르는 지금 이 순간 선택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그러나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다.
식도를 타고 올라오던 말소리들이 입 밖에 내어지기 전에 흩어지고 있었다.
신념과 가족.
둘 모두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니엘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공작님. 혹시 아직도 이걸 동등한 거래이자 협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다니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낮게 웃음을 흘린다.
“이건 어디까지나 황녀 전하와 제가 바하트란테 가문에게 베푸는 은혜이자 호의입니다.”
벨바르의 머릿속에서는 저 말이 ‘그런데도 주제를 모르고 고민을 하고 있구나’ 정도로 해석되고 있었다.
벨바르가 몸을 떠는 와중에 안타깝다는 것처럼 혀를 찬 다니엘이 고개를 저었다.
“과거로 돌아오셨는데도 똑같은 과오를 범하겠다니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위대하신 바하트란테 가문의 벨바르 공작님, 앞으로 다가올 파멸을 즐겁게 기다리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 말한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한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몸을 숙인 벨바르가 다니엘의 손을 덥썩 붙잡는다.
다니엘이 이곳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어질 거라는 공포감이 엄습한 것이다.
“…….”
“…….”
둘 사이에 서늘한 침묵이 흐른다.
다니엘은 자신을 붙잡은 벨바르의 손을 뿌리치지도 붙잡지도 않은 채 방치하였다.
네 입으로 진심을 말하라는 뜻이었다.
“협력…….”
붉게 충혈된 벨바르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힌다.
패배감을 느끼며 눈을 감은 벨바르가 낮게 흐느끼며 말했다.
“시키는 대로 협력하겠소…….”
확답을 들은 다니엘이 그제야 벨바르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그러며 다른 손으로는 벨바르의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역시. 공작님은 현명한 선택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으니 이제 바하트란테 가문은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겁니다.”
벨바르의 어깨를 붙잡은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간다.
“또한 공작님은 황자 전하의 편에 선 적이 없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말입니다. 제 말을 이해하셨습니까.”
이를 꾹 깨물고 흐느끼는 통에 벨바르는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하였다.
그런 벨바르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다니엘이 어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미증유의 감정에 사로잡힌 벨바르는 거의 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다니엘이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악수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좋습니다. 공작님의 의사는 황녀 전하께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옷매무새를 한 번 다듬은 다니엘은 근처에 서 있던 하르트만을 돌아보았다.
“하르트만 중령님. 일이 끝났으니 저희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지요. 계속 이곳에 있는 것으로 공작님께 민폐를 끼치면 안 되니까 말입니다.”
뒤에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하르트만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제야 다니엘은 발걸음을 옮겨 응접실을 나섰다.
하르트만 또한 다니엘을 따라 응접실을 나오고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복도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하르트만이 다니엘의 옆모습을 살펴보았다.
피곤에 찌든 안색을 보니 방금 전의 악마 같은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다니엘은 긴장이 풀렸는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벨바르 공작이 제안을 거절하면 힘든 싸움이 될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덕분에 이질감이 느껴진다.
하르트만은 잠시 멋쩍게 있다가 입을 열었다.
“놀랍군.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벨바르 공작이 제안에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네.”
“저 또한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연기가 잘 통한 것이 다행이겠지요.”
다니엘의 말을 듣고 있던 하르트만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연기라고?’
그걸 과연 연기라고 볼 수가 있을까.
하르트만이 보기에 숨겨놓은 본심이 흘러나왔다고 표현하는 게 보다 적합하였다.
다만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연기가 맞았다.
물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행한’이라는 수식어가 붙겠지만 말이다.
‘벨바르 공작을 굴복시키지 못했으면 내가 죽었을 테니까.’
일이 잘 풀린 것에 내심 안도하고 있으니 하르트만이 헛기침을 내뱉는다.
“아무튼 고생했네. 황녀 전하께 보고를 올리는 것은 내가 할 테니 자네는 먼저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나.”
의외라는 듯 하르트만을 돌아본 다니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색한 것은 하르트만 혼자였다.
앞서 걸어가는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오늘따라 두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저택 앞에서 다니엘과 헤어진 하르트만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셀비아의 집무실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하르트만이 경례를 올리자, 셀비아가 서류를 작성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라? 다니엘 소령은요?”
“피곤해보이기에 제가 먼저 들어가보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들어갔다고요?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보라고 했다고 정말 가버렸다고요?”
셀비아가 집요하게 질문하자 하르트만이 다소 의아해하며 손을 내렸다.
“전하? 혹여 다니엘 소령을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네? 그게…….”
속마음을 들켰는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던 셀비아가 별안간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저도 별로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보다 협상은 어떻게 됐나요?”
“성사되었습니다. 이쪽에서 바하트란테 가문의 죄를 묻지 않는 대가로 황자 전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하더군요.”
하르트만의 말을 들은 셀비아의 입이 멍하니 벌어진다.
그 고집불통인 늙은 여우가 협상 한 번에 백기를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인가요? 벨바르 공작이 제게 고개를 숙였다는 게?”
“그렇습니다. 다니엘 소령이 고생해준 덕분입니다.”
다니엘이 협상을 성사시켰다는 말에 셀비아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황자의 사조직을 검거한 것만 해도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인데, 이번에 벨바르 공작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후계자 싸움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낮게 웃음을 흘린 셀비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린다.
“졸지에 오라버니는 양팔을 잃은 신세가 되고 말았군요. 가여운 오라버니. 지금쯤 좌절감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있겠지요.”
승리를 확신한 셀비아가 옆에 있는 케이스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넣고 닫았다.
“그래서.”
셀비아의 날카로운 눈빛이 하르트만을 흘겨본다.
“중령이 보기에 다니엘 슈타이너는 어떤 사람으로 보이나요.”
다니엘이 협상을 진행하는 모습을 옆에서 봤을 테니 한 번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이는 셀비아가 다니엘에게 호위를 붙여준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였다.
다니엘을 최측근으로 두어도 괜찮을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은 황녀로서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다니엘 슈타이너는 제가 본 인물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셀비아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던 하르트만이 말했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르트만은 조력자의 자질을 평가할 때 전술, 전략, 정치를 중점으로 본다.
친위대 특성상 야전이 아닌 제도에서 활동하는 하르트만은 세 가지 능력 중 정치를 가장 우선으로 두고 있었다.
전술에 능한 자는 전략에 능한 자를 이기지 못하고, 전략에 능한 자는 정치에 능한 자를 이기지 못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정치에 능한 자는? 정적을 만나게 되면 힘을 쓰지 못하고 균형을 이루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니엘 슈타이너는 달랐다.
장차 자신의 정적이 될지도 모르는 벨바르 공작을 ‘황녀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철저하게 굴복시키지 않았나.
‘용납하지 못하는 거겠지. 벨바르 공작이 자신을 공격한 것을 말이야…….’
보안국을 시켜 자신에게 스파이와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우려고 한 벨바르 공작에게 강렬한 분노를 느낀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의 분노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 잔잔하게 흐르는 맹독과 같았다.
보기에 강력하지는 않으나 보이는 것보다 위험하고, 한 모금이라도 들이키는 순간 지독한 고통에 시달린다.
그 맹독을 들이킨 사람 앞에서 다니엘 슈타이너는 웃으며 말한다.
내게 해독제가 있으니 협상을 하자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르트만이 보는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벨바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다니엘을 떠올린 하르트만이 말했다.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을 절대 적으로 돌리시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르트만이 셀비아를 향해 충언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러며 모종의 두려움 속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만약.
정말 만약에 다니엘 슈타이너가 황녀 전하가 아니라 황자의 편에 섰다면.
‘오늘 다니엘의 맹독을 들이켰을 사람은…….’
벨바르가 아니라 하르트만 본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