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벨바르의 숨이 불안정해지기 시작한다.
더해 마주친 시선에서 두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덕분에 다니엘은 확신할 수 있었다.
‘동요하고 있다.’
벨바르가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은 두려움을 애써 숨기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다행이다.’
여기서 벨바르가 코웃음을 치고 넘어갔다면 곤란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다니엘이었다.
‘벨바르가 나를 그저 그런 참모 나부랭이로 알고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되었겠지.’
하지만 벨바르는 진심으로 다니엘을 경계하고 있었다.
벨바르가 자신을 고평가하고 있을 거라는 다니엘의 추측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벨바르가 상상하고 있는 ‘최악의 다니엘 슈타이너’를 계속해서 연기하며 지금의 이 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 다니엘에게 있어 최선의 수였다.
‘협상에 실패하면 역으로 내가 죽는다.’
마음을 다잡은 다니엘이 태연함을 가장하며 품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그걸 본 벨바르가 침을 꿀꺽 삼킨다.
“그건…….”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황자 전하의 사조직인 새벽의 여명을 검거한 후 수집한 문서의 복사본입니다. 공작님이시라면 이 문서가 뭘 의미하는 건지 잘 아실 겁니다.”
확인해보라는 의미로 다니엘이 문서를 건넨다.
문서를 받아든 벨바르는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작전의 일시와 개요가 면밀하게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조작한 증거가 아니었다.
덕분에 벨바르의 손이 가늘게 떨려간다.
“공작님.”
그런 벨바르를 향해 다니엘이 천천히 말을 흘렸다.
“해당 문서가 세상에 공개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황자 전하께서 황태자가 되는 길은 요원해지고 제국의 만백성이 내란범을 죽여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일 것입니다.”
벨바르가 이를 꾹 깨문다.
다니엘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저희는 제도의 시민들에게 알릴 겁니다. 내란범을 처벌하기 전에 수사를 해봤더니 그들과 연관되어 있는 가문이 있더라. 그 가문이 바로…….”
다니엘은 벨바르가 들고 있는 서류의 윗부분을 붙잡았다.
그걸 살며시 아래로 누르며, 다니엘이 벨바르에게 들릴 정도로만 낮게 속삭였다.
“공작님이 이끌고 있는 바하트란테 가문이라고 말입니다.”
눈을 치켜뜬 벨바르가 서류를 사이에 두고 다니엘을 노려본다.
감히 고아에 불과한 부랑아가 제국의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면에 분노를 드러내던 벨바르가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팽개쳤다.
“쓰레기 같은 놈……! 들리는 소문에 거짓이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구나. 너처럼 천박하고 간악한 것이 어찌 황녀 전하의 곁에 서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벨바르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다니엘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공작님께서 저를 어떻게 평가하셔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만 지금 이 자리는 선택을 하는 곳이지 저를 비난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선택? 지금 나보고 대체 무슨 선택을 하라는 소린가!”
“현명하신 벨바르 공작님이라면 이미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벨바르는 무어라 소리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니엘이 늘어놓은 말에서 추측하건대 협상의 조건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마…….”
“예. 그 설마입니다. 공작님께서 후계자 싸움에서 물러나신다면 저희는 철저하게 비밀을 보장하겠습니다. 그럼 바하트란테 가문은 해당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되는 거지요.”
벨바르가 낮게 침음하였다.
돌려 말하고 있었지만 저건 황자를 배반하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쉽게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달콤한 제안이었다.
“공작님.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냥 고개만 한 번 끄덕여주시면 공작님과 바하트란테 가문은 지금처럼 제도에서 명예롭게 군림할 수 있을 겁니다. 대체 왜 거절하시려는 겁니까?”
불리한 상황에 처한 벨바르의 입장에서 ‘우리가 정권을 잡아도 네가 지은 죄를 묻지 않겠다’는 말은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다니엘의 말대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하면 가문은 아무런 탈 없이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황자 전하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한 이상…….’
저 간악한 혓놀림에 놀아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내 충심을 시험하지 마라. 네놈과 손을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벨바르가 결연함을 담아 말했으나 다니엘은 무감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러다 피식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손을 잡지 않겠다라. 존중하겠습니다만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제가 앞서 드린 말씀을 잊으신 걸까요.”
여상하게 걸음을 옮긴 다니엘이 벨바르를 지나친다.
“거절한다면 분명 목숨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을 텐데. 오. 위스키 진열장을 응접실에 만들어두셨군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니엘이 감탄을 내지르며 위스키 진열장의 문을 연다.
그곳에서 조니 워커를 꺼낸 다니엘이 병을 내려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혹여 제 설명이 부족했을 수도 있으니 다시 한 번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공작님이 겪으실 미래에 관해서 말입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벨바르가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 다니엘이 자연스럽게 근처에 있는 시종을 부른다.
시종이 다가오자 다니엘은 얼음을 준비해달라고 말하였다.
잔뜩 굳어 있던 시종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시종이 나간 것을 확인한 다니엘이 근처의 선반에서 잔을 하나 꺼낸다.
“어디 보자. 공작님의 장남이 라이드샤프 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제국의 자동차 산업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건실한 기업이지요. 자동화된 조립 라인을 처음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군요.”
잔을 꺼낸 다니엘이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낸다.
“덕분에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수많은 제국인들이 싼 값에 차를 구매할 수 있었지요. 정말이지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손수건을 편하게 잡은 다니엘이 잔을 가볍게 닦아내었다.
“손가락으로 치면 엄지 정도가 아닐까 싶군요. 사람은 최고를 표현할 때 항상 엄지를 쓰곤 하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벨바르는 대꾸를 하지 않으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저 또한 자동차 업계에서 공작님의 장남이 최고라는 것에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실지 의문이군요.”
잔을 다 닦아낸 다니엘이 걱정스럽다는 어투로 말했다.
“만약 황녀 전하께서 황제가 되신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라이드샤프 컴퍼니를 전수조사하시라고 조언을 드릴 겁니다. 그는 내란범 벨바르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벨바르의 숨이 거칠어진다.
그걸 의식한 다니엘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전수조사 과정에서 만약 공작님의 장남이 내란범들에게 자금을 조달했다는 정황이 포착된다면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겠습니다. 상상만 해도 정말 끔찍하겠군요.”
다니엘이 혀를 차고 있을 무렵에 얼음을 가지러 주방으로 갔던 시종이 돌아온다.
다니엘이 손짓하자 시종이 가까이 다가가서 잔에 얼음을 넣어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한 다니엘은 조니 워커의 입구를 열어서 잔에 술을 부었다.
다니엘이 술을 따라낸 잔을 들었을 무렵에 벨바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내 장남은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정말이다.”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신 다니엘이 어깨를 한 번 으쓱인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모함하지 마라! 다니엘 슈타이너……!”
“아아. 잘못 말했습니다. 관련이 있을 것 같은 게 아니라…….”
벨바르의 뒤편으로 다가간 다니엘이 그 어깨를 가볍게 붙잡았다.
“관련이 있게 만들 겁니다.”
그 서늘한 말소리에 벨바르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창백해지는 벨바르의 안색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다니엘이 원래 앉았던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보안국의 도움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보안국도 새로운 황제 폐하의 명령에 충실할 것이니까요.”
소파에 앉은 다니엘이 테이블 위에 잔을 올려놓는다.
“또한 공작님의 장남만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전기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공작님의 차남과 석유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삼남까지도 모두 엮어버릴 거니까요.”
“그, 그런…….”
과호흡이 온 건지 벨바르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공포에 떠는 늙은 여우를 바라보며 다니엘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공작님은 순식간에 손가락 세 개가 잘려나가겠군요. 손가락 세 개가 잘려나간 상태에서 다른 이들과 손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다들 공작님을 기피할 겁니다.”
숨을 헐떡이던 벨바르가 별안간 눈을 질끈 감고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흘린다.
“고, 공작님!”
그걸 본 시종이 서둘러 다가와서 약과 물을 챙겨준다.
공작은 서둘러 약을 입에 털어놓고는 물을 마셔 삼켰다.
그제야 벨바르의 과호흡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러나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다.
그런 벨바르를 가만히 지켜보던 다니엘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둔탁한 소리에 놀란 벨바르는 눈을 떴고,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는 다니엘을 볼 수 있었다.
벨바르가 보기에 다니엘이 짓고 있는 미소에서는 일말의 인간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하고 계십니까.”
다니엘이 악수를 청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과거로 돌아오셨으니, 이번에는 옳은 선택을 하셔야지요.”
더 늦기 전에 내 손을 붙잡아라.
다니엘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