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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4 - Chapter 64

참모 본부에서 나온 다니엘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황녀인 셀비아에게 미리 사전 허가를 받아놓았기에, 간단한 신분 확인만 거친 후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내명부 시녀의 도움을 받아 황녀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다니엘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입니다!”

큰 소리로 외치자 안쪽에서 문이 열린다.

친위대의 수석 경호를 맡고 있는 하르트만 중령이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다니엘 소령. 기다리고 있었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다니엘이 집무실의 중앙으로 걸어가 경례를 올렸다.

덕분에 집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셀비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니엘 소령! 언제 오나 싶었……!”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던 셀비아가 멈칫하더니 헛기침을 내뱉었다.

만남이 기쁘다고 해도 황녀의 신분인 이상 체통을 지켜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찾아오셨나요?”

제법 평이해진 목소리가 집무실 내부에 잔잔하게 내리깔린다.

덕분에 다니엘은 손을 내리고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다니엘이 말하는 와중에 하르트만이 집무실의 문을 닫고 셀비아의 옆으로 가 선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다니엘이 말했다.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말씀드리건대, 황자 전하의 사조직인 새벽의 여명을 공격해서 무력화시킨 건 제가 아닙니다. 이건 바로잡고 가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다니엘의 말에 셀비아와 하르트만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외부에서 관련 질문이 들어오면 일단 그런 식으로 둘러대도록 할게요.”

“나 또한 입단속을 하도록 하겠네. 자네가 곤란해지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 말이야.”

두 사람의 반응을 보건대 진심이 조금도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정말 아니라고 읍소라도 하고 싶은 다니엘이었지만, 그런다고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고 지금은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러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전하. 그럼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참모 본부에 보안국 경찰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시는지요.”

일순간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셀비아가 두 눈을 날카롭게 좁히며 말했다.

“벨바르 공작의 짓이군요. 그 늙은이는 보안국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참모 본부에 보안국 경찰들을 풀었다는 소리는…….”

이해가 빨라서 좋았다.

추측하신 게 옳다는 의미로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바르 공작은 제게 스파이와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울 생각입니다.”

“……어째서인가요?”

“여론의 역전을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란을 획책하고 있는 황자의 사조직을 발견한 것은 바로 저 다니엘 슈타이너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슈타이너가 사실은 스파이와 내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르트만이 침음을 흘렸다.

“모든 건 황녀파에 속한 다니엘 슈타이너의 자작극이라고 몰아갈 수 있겠군. 내란범은 다름 아닌 다니엘 소령이라며 규탄해도 할 말이 없겠어.”

늙은 여우의 계책에 내심 감탄한 하르트만이 다니엘을 바라본다.

“자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잘 알겠네. 보안국은 없는 증거도 만들어내는 놈들이니 말이야. 자칫 잘못하다가는 무고한 자네가 피해를 입게 생겼어.”

실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부관이 스파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침묵하고 있는 다니엘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진실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는 시간문제입니다. 만약 보안국에서 내부 보안 감시 허가 영장을 내어주기라도 하는 순간 저는 놈들에게 붙잡히고 말 겁니다.”

다니엘의 말에 셀비아가 발끈하며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건 안 돼요! 그런 폭거는 제가 어떻게든 막아설 겁니다!”

그런 셀비아의 모습에 다니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은 최악의 상황이 닥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입니다.”

“선수를 친다?”

하르트만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상황을 파훼할 방법이 있는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현재 벨바르 공작은 보안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저를 잡아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짧은 침묵 끝에 셀비아가 답했다.

“그 늙은 여우는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군요. 만약 다니엘 당신에게 스파이와 내통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하면 역풍를 맞을 텐데도 강행한 걸 보면 말이에요.”

“정답입니다. 그러니 저는 벨바르 공작이 제게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더해 현재 우리만 알고 있는 정보로 일종의 거래를 제안할 겁니다.”

“다니엘 소령. 이해가 잘 안 되어 그런데, 벨바르 공작의 두려움을 이용한다는 것이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마지막은 하르트만의 질문이었다.

다니엘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연기를 할 겁니다.”

하르트만을 바라보는 다니엘의 눈빛에 결연함이 서린다.

“벨바르 공작이 상상하고 있는 ‘최악의 다니엘 슈타이너’를 말입니다.”

*

작전의 골자를 설명한 다니엘은 셀비아에게 벨바르 공작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다니엘의 요청을 받아들인 셀비아는 곧장 벨바르에게 연락하였고, 벨바르는 큰 고민 없이 수락하였기에 만남이 성사되었다.

그래서 지금.

‘젠장…….’

다니엘은 벨바르 공작의 저택에 마련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니엘이 앉아 있는 소파의 뒤편에는 하르트만이 팔짱을 낀 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혹시 모를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며 셀비아가 하르트만에게 다니엘의 호위를 부탁한 덕분이다.

벨바르가 도착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하르트만이 다니엘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런데 다니엘 소령. 굳이 이런 방법을 선택해야 하나? 불리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쪽인데 말이야.”

시간을 두어 천천히 공략하면 되는 것인데 왜 이리 조급하게 구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다니엘 또한 저 말에 동감하고 있었다.

보안국이 활개친다고 해도 책 잡힐 거리를 주지 않으며 최대한 버티기만 하면 벨바르는 알아서 자멸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 분명하였다.

‘무엇보다…….’

루시는 실제로 스파이다.

보안국에서 영장을 받은 카트만이 집요하게 수사에 나선다면, 그로 인해 루시가 스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라도 포착한다면 다니엘은 죽은 목숨이다.

스파이와 내통했다는 죄가 생긴다면 단순히 옷을 벗는 것으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다니엘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늘 이 자리에서 벨바르의 백기를 받아내야만 하였다.

그래야만 보안국의 수사가 멈출 것이었으니까.

하르트만이 보기에 이건 단순한 협상 자리였지만,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목숨을 건 줄타기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이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었기에 다니엘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오늘 협상으로 모든 게 정리된다면 서로가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보다 내가 도와줄 건 없나?”

“없습니다. 그저 뒤에서 묵묵히 제 장단에 맞춰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하르트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그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벨바르 공작이 시종과 함께 들어온다.

값비싼 정장을 입고 있는 벨바르는 외눈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굵은 눈썹과 꾹 다물어진 입에서 특유의 고집이 나타나고 있었다.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벨바르는 반응하지 않았다.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걸어와서는 반대편 소파에 앉을 뿐이었다.

다니엘 또한 다시금 소파에 앉자 벨바르가 말했다.

“그래. 네놈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낮잡아보는 어투였지만 다니엘은 동요하지 않으며 접대용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도 아실 테지만 황자 전하의 사조직인 새벽의 여명은 모두 검거되었습니다. 저는 관련해서 제안을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제안? 하! 무슨 제안인지 들을 필요도 없겠군! 황자 전하를 배신하라는 소리일 테니!”

벨바르가 손을 들어 다니엘을 향해 삿대질을 하였다.

“또한 네놈이 협상 자리에서 상대방을 겁박하여 원하는 바를 이뤄낸 것은 잘 알고 있다! 내가 다른 놈들과 마찬가지로 네놈의 흉계에 휘말릴 거라 생각하지 마라!”

벨바르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공작님. 오해가 있으십니다. 저는 그저 협상을 하러 이 자리에 온 것에 불과합니다. 제 제안을 들으신다면-”

“듣기 싫다!”

다니엘의 말을 끊은 벨바르가 노호를 내지른다.

“네놈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에 내가 현혹될 성 싶으냐!”

“그럼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협상 자리를 파토내시겠다는 소리십니까.”

“내가 협상에 응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녀 전하의 부탁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황자 전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내 목숨을 내어주더라도 말이다!”

예상대로 벨바르는 강경하게 나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제안 대신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공작님의 마음이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이 협상을 파토내시면 공작님께서 죽음으로 이끌 목숨은 하나가 아닐 겁니다.”

벨바르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무슨 의미인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십시오.”

다니엘이 미소를 유지한 채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다.

반면 벨바르는 손끝을 떨며 마른 침을 삼킬 뿐이었다.

다니엘의 모호한 발언을 곱씹던 벨바르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내 지인들과 가족들은 무고하다. 만약 내가 후계자 싸움에서 패배한다고 해도 네놈이 내 사람들을 건들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다.”

벨바르의 말을 들은 다니엘이 입가를 씰룩이더니 곧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낮고 저조한 웃음소리가 넓은 응접실에 메아리치며 울리고 있었다.

왜 웃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던 벨바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식은땀을 흘린다.

연기에 동조하겠다고 말한 하르트만 또한 다소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다니엘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 한동안 웃음을 흘리던 다니엘이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실례를 범했군요. 그런데…….”

돌연 웃음기를 지운 다니엘이 벨바르를 빤히 바라본다.

그 사나우면서도 정적인 눈동자는 사냥감을 눈앞에 둔 포식자처럼 번들거렸다.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벨바르 공작님. 제가 몰락으로 이끈 사람들 중에…….”

스산한 목소리가 벨바르의 시선을 잡아둔다.

짧은 침묵 속에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다니엘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무고한 사람이 과연 없었겠습니까?”

그 순간, 벨바르는 극도의 공포감이 몸을 뒤덮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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