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여기가 그 남자가 말한 곳입니다.”
경찰들을 대동한 다니엘은 한 상가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제 예배실에서 자신을 모르텐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황자를 도와 제도에서 내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며 고백하였기에 조사차 들린 것이다.
솔직히 말해 정신병자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한 다니엘이었지만, 내란에 관련된 신고가 들어온 이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이 밝자마자 관할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상가처럼 보입니다만…….”
형사과장 바레티 경감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동감하는 다니엘이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 남자가 정말 비밀 조직의 수장이었다면 의심을 사지 않게 건물과 신분을 위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수법이니까요. 미치광이의 증언이 아닐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바레티 경감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다니엘이 상가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상가의 문은 열려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상품 진열대에 핏자국이 튀어 있을 뿐이었다.
핏자국을 확인한 다니엘이 반사적으로 권총집에서 리볼버를 꺼내들었다.
“망할. 아무래도 그 남자의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다들 무장하십시오!”
다니엘의 외침을 들은 바레티 경감 및 조사반 경찰들이 다들 권총을 꺼내든다.
그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다니엘이 몸을 숙이며 주변을 한 번 살펴보았다.
‘발자국…….’
군화를 신은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어느 한 곳으로 쭉 이어진다.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지하로 향하는 철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인다.
카펫과 가구 몇 개가 주변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것을 보아, 평소에는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끔 숨겼을 것이다.
“다니엘 소령님? 뭔가 발견하신 것이…….”
경감이 경찰들을 데리고 다가오자 다니엘이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한 번 더 주변을 면밀하게 살펴본 다니엘이 숙였던 몸을 일으킨다.
“아무래도 일종의 무장 집단이 지하실 안으로 침입한 것 같습니다. 한동안 지하실 안을 지키다가 비교적 최근에 밖으로 나온 모양이군요.”
“예? 그걸 다니엘 소령님이 어떻게 아십니까?”
“발자국입니다. 안으로 들어간 군화 발자국은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인지 먼지가 내려앉아 있지만, 밖으로 나온 발자국은 방금 찍힌 것인지 선명합니다.”
다니엘의 말을 조언 삼아 주변을 살펴본 바레티는 내심 감탄하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렇다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긴장감 속에서 고개를 끄덕인 경감이 무전기를 들었다.
“바레티 경감이다. 추가 지원이 필요하다. 피안마리 마을 인근 13번 구역 강가 옆의 붉은 지붕 상가로 지금 즉시 지원 바란다.”
무전기 너머에서 알겠다는 답변이 들려온다.
지원 요청이 받아들여졌다는 걸 들은 다니엘은 지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바레티 경감 또한 다니엘을 따라 지하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투박한 계단을 얼마간 내려가자 꽤나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여긴…….”
손전등을 켠 바레티 경감은 수많은 책상들과 텔렉스를 발견하였다.
거기에 불타다 만 서류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던 곳인가 싶었던 와중에 다니엘이 근처에 널브러진 서류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걸 본 다니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아무래도 모르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의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서류에는 정치인 및 언론인들을 협박하고 시민들을 선동하라는 작전의 개요가 적혀 있었다.
내란죄가 확실해진 순간에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움직임이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칸막이로 막혀 있는 방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바레티 경감과 경찰들에게 수신호를 전한 다니엘이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리볼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채로 방문을 열어젖힌 다니엘은 당황하고 말았다.
“읍, 그븝!?”
“으으읍…….”
팔다리가 포박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 재갈을 문 채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몇은 다니엘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애벌레처럼 뒤로 기었다.
뒤늦게 방 안의 풍경을 확인한 바레티 경감의 얼굴이 아연해진다.
“이게 대체 뭡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재갈을 풀어주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들어봐야 하겠으니 말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바레티 경감이 권총을 뒷주머니에 넣고는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입에서 재갈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남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남자의 과민반응이 다니엘은 당황스러웠다.
‘왜 나한테 살려달라고 하는 거지?’
당황스러운 것은 바레티 경감 또한 마찬가지였다.
혹시 패닉에 빠진 남자가 횡설수설하는 건가 싶었던 바레티 경감이 다른 사람의 재갈도 풀어보았다.
그러자.
“다니엘 소령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에게는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습니다! 흐으흑……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다른 이도 겁에 질린 채 다니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걸 본 바레티 경감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바레티 경감의 시선을 의식한 다니엘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경감님?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알겠습니다만, 하느님께 맹세하건대 제가 이렇게 만든 거 아닙니다.”
그러나 바레티 경감의 의심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경찰들도 다니엘에게 모종의 두려움을 느끼고 슬금슬금 뒷걸음을 칠 정도였다.
“……여러분? 정말 제가 한 거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억울했던 다니엘이 진심을 담아 호소하였지만 경찰들에게 닿지는 않았다.
이후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바레티 경감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일단 조서에 다니엘 소령님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적기는 하겠습니다.”
“경감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예. 당연히 다니엘 소령님이 하신 게 아니겠지요. 명심하겠습니다.”
경찰모를 벗은 바레티가 다니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절대 다니엘 소령님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제스처였다.
이런 일을 자행할 수 있는 거물에게 밉보여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처세인 법이다.
다만, 정말로 이 사건에 관여한 게 없는 다니엘로서는 억울할 뿐이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다니엘이 낮게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저 휴가를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휘말리게 된 것이 증오스러울 지경이었다.
*
늦은 밤, 황궁 내부 집무실.
‘놈들이 제도를 장악하고 있어…….’
황녀 셀비아는 집무 책상 위에 펼쳐진 제도의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도에는 붉은 펜으로 X 표시가 그어져 있었는데, 이는 황녀파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무장 집단들에게 협박을 받은 지점을 표기한 것이었다.
‘자료를 수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일관성이 없었다.
놈들의 본거지가 제도 내부에 위치해 있다면 분명 활동 범위가 겹치는 구간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황녀의 추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내곤 하였다.
‘무장 집단들이 점조직처럼 운영되고 있다면…….’
셀비아의 처음 예상대로 놈들의 본부는 제도가 아닌 다른 곳에 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찾지.’
제국은 넓다.
그 넓은 제국을 모두 둘러볼 수는 없는 형국이었다.
거기다 셀비아가 예상하기에 놈들은 꽤나 오래전부터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리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최소로 잡아도 3년 전에는 본부를 세우고 활동을 시작했을 테니 수색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덕분에 황녀파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의 활동 반경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놈들에게 협박을 당하거나 상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으니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찾아야 해.’
하지만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마에 손을 짚은 채 골머리를 앓던 셀비아의 두 눈이 반개한다.
‘이럴 때 그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면…….’
다니엘 슈타이너.
기발한 전술과 전략으로 노르디아를 손에 넣은 남자.
그 탐나는 인재가 곁에 있었다면 황자의 비밀 조직을 찾아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다니엘은 긴 휴가를 신청한 후 제도를 떠나버렸다.
마치 후계자들의 전쟁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셀비아는 다니엘을 불러들일 수 없었다.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황궁으로 향하던 리무진 안에서 호감을 표시하기에 드디어 내 사람이 되기로 한 것인가 싶었는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대뜸 휴가를 나가버리다니.
애타는 마음에 괜히 집무 책상만 툭툭 두드리고 있을 찰나에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자세를 바로잡은 셀비아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친위대 수석 경호인 중령 하르트만이 들어온다.
하르트만은 가볍게 경례를 올리고는 셀비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전하. 밤늦게까지 집무를 보고 계셨던 겁니까.”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요. 그보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죠?”
“긴히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서 무례인 걸 알면서도 찾아뵈었습니다.”
보고드릴 사항? 셀비아가 말해보라는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그간 계속해서 추적하고 있던 황자의 비밀 조직 수뇌부가 일제히 검거되었다고 합니다.”
셀비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가만히 있던 셀비아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러니까, 확실한 정보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제국 남부 베타르겐 남작령의 관할 경찰서에서 직접 보고받은 사항입니다. 그들이 보내온 문서를 보건대 거짓은 없습니다.”
놈들을 검거했다면 후계자 싸움에서 엄청난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갑작스럽게 굴러들어온 행운에 기뻐하던 셀비아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누구인가요? 대체 누가 이렇게나 큰 공훈을 올린 건가요?”
“그것이…….”
허리를 가볍게 숙인 하르트만이 셀비아를 향해 속삭였다.
“본인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정황상다니엘 슈타이너 소령으로 보입니다.”
덕분에 셀비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다니엘이라고요?”
다니엘은 휴가를 신청하고 고향에 내려간 게 아니었나?
아니, 역으로 생각하자면 제도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긴 휴가를 신청한 것이 말이 안 되기는 하였다.
‘다방면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 다니엘은 승진을 원하고 있으니까.’
승진에 굶주린 유능한 참모가 차기 황제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시기에 휴가를 나간다?
어불성설이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처음부터…….’
셀비아를 위해 ‘휴가인 척 임무를 수행’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다니엘은 내가 황제가 될 거라 말했었지.’
종군 기자로 위장하여 북부에 갔을 때 하르트만이 들려준 말을 기억한다.
다니엘은 황자의 암살자들에게 둘러싸인 와중에서도 ‘황제가 되는 것은 황자가 아닌 황녀’라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내게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휴가를 낸 것은…….’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까지 속이라는 병법에 충실한 것이라 보면 이해가 되었다.
이제야 다니엘의 모든 언행을 이해한 셀비아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걸린다.
‘일전에는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더니…….’
이번에는 셀비아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시키지도 않은 일까지 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다니엘을 애정하게 된 셀비아가 소담한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사람이군요. 다니엘 슈타이너는…….”
셀비아가 보기에, 다니엘은 유능한 참모임과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충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