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의 레스토랑에서 나온 모르텐은 초조함을 느끼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니엘이 건넨 의미심장한 말이 불안의 씨앗이 되어 호흡을 가쁘게 만들고 있었다.
‘놈은 이쪽과 대화를 나눌 의지가 전혀 없었다. 협력?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다니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다니엘은 수도원의 식당에서 모종의 협박을 가하여 모르텐이 스스로 자신을 찾아오게끔 만들었다.
다니엘은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짓을 한 걸까.
머릿속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추측을 이어가던 모르텐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진다.
‘처음부터 협력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맞다. 그렇다면 혹여…….’
느려지던 발걸음이 완전히 멈춘다.
‘……나를 새벽의 여명 본부에서 빼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야트막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이건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전에 해당 조직의 우두머리를 부재 상태로 만드는 수법이었다.
‘당했다……!’
불안이 확신으로 변한 모르텐이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전원을 켰다.
주파수를 맞춘 모르텐이 송신 버튼을 누르고 급히 입을 열었다.
“본부! 들리나!? 들리면 아무나 대답해라! 상황이 시급하다!”
그러나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뭔가 이상했던 모르텐이 주파수를 확인하고는 다시금 송신 버튼을 눌렀다.
“본부! 대답해라! 지금 당장 철수를 서둘러야…….”
모르텐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송신 버튼에서 손을 떼자 곧 ‘삐빅’하는 비프음이 울린다.
직후 무전기를 통해 스산한 웃음소리들이 흘러나온다.
모르텐이 굳어 있는 사이 무전기 너머의 웃음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 듣고 있나. 모르텐 블랙모어.
처음 듣는 목소리다.
그건 곧 새벽의 여명 본부가 적들에게 점령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 지하에서 꽤나 재미있는 짓을 일삼고 있었더군. 안타깝게도 이제 더는 재미를 보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무전기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빠진다.
본부 사람들이 모두 당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전기에서는 계속해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모르텐 블랙모어.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경고다.
짧은 침묵 끝에, 싸늘하면서도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 감히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대적하려 들지 마라.
마지막 말을 끝으로 통신이 끊긴다.
멍하니 무전기를 내려다보던 모르텐이 불현듯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심장이 제멋대로 박동하면서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가슴을 꽉 붙잡으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던 모르텐은 근처 벽면에 손을 짚고는 고개를 숙였다.
“허, 허억…….”
모르텐은 거칠어진 호흡을 토해내듯 내뱉으며 눈동자를 가늘게 떨었다.
‘황자 전하의…… 나의 백년대계가…….’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아, 아……!”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던 모르텐이 별안간 낮게 흐느낀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다니엘 슈타이너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
식사를 마친 다니엘은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수도원으로 향했다.
모르텐이 보인 무례가 다니엘을 여러 의미로 불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 도착한 다니엘은 곧장 수도원장을 찾았다.
회랑식 중정의 복도에서, 촛대를 들고 걸어가던 수도원장을 발견한 다니엘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수도원장님!”
수도원장인 히에로니는 흠칫 놀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다니엘을 발견한 히에로니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 잭의 레스토랑에 간 게 아니었나?”
“가긴 갔습니다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딘가 화가 난 것 같은 다니엘의 모습에 히에로니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식당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왜 그리도 화가 난 기색이야.”
“있었습니다. 시의회 사람을 만났으니까요.”
“시의회 사람?”
“예! 참으로 무례한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시의회에서 수도원장님과 아이들에게도 그리 막무가내로 굴었습니까?”
권력이란 대부분 돈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또한 권력에 취한 인간이 얼마나 후안무치한 성정을 가질 수 있는지 다니엘은 잘 알았다.
만약 기부금 예산 책정 명목으로 시의회에서 수도원을 수시로 괴롭혔다면 다니엘로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도원장에게 사건의 전말을 듣기 위해 온 것이었다.
다만 시의회 사람들이 무례하게 구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히에로니는 의아할 뿐이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구나. 시의회 사람들은 다들 정중하고 예의바른 분들이었다. 거기다 이번에는 시의회 사정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기부금 예산을 삭감하지 않겠다더구나.”
“……기부금 예산을 삭감하지 않겠다고 했다고요?”
그렇다면 잭의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남자가 전쟁을 언급한 것은 대체 뭐였던 걸까.
이해가 안 되어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을 무렵에 발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부원장 수도자가 중정의 모퉁이를 돌아서 다가오고 있었다.
“부원장님.”
다니엘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자 부원장 수도자가 헛웃음을 흘렸다.
“다니엘. 갑자기 너를 찾는 손님이 있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돌아왔으면 돌아왔다고 말이라도 하지 그랬나.”
“죄송합니다. 수도원장님과 급히 나눌 말이 있었기에…… 그보다 저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부원장 수도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시간대에 수도원에 들어오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도 한사코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을 만나야겠다고 부탁을 하더구나. 뭔가 사정이 있어보여서 일단 안으로 들였다.”
“……저를 말입니까?”
대체 누구인가 싶었지만 여기까지 찾아왔다는데 매몰차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예배실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예배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몇 번 돌고 나서 예배실을 찾은 다니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예배실의 풍경은 적막하고 고요하였다.
천장과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달빛이 내려앉고 있는 게 보인다.
그런 예배실의 중앙에서 한 남자가 하느님의 동상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니엘이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는 인기척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다니엘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잭의 레스토랑에서 봤던 그 남자군.’
몇 시간 사이에 얼굴이 많이 초췌해진 걸 제외하면 동일 인물이 맞았다.
‘그런데 대체 여기에는 왜 온 거지? 설마 사과를 하러 왔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합석을 하더니 대뜸 협박조로 말을 내뱉던 것이 바로 저 남자였다.
아직도 그때 느낀 불쾌함을 잊지 않았던 다니엘이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을 텐데요.”
다니엘의 말에 모르텐의 어깨가 움찔 떨린다.
초조한 기색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던 모르텐은 다니엘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른침을 삼킨 모르텐은 다니엘의 지근거리에 도달하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하라는 건 아니었는데…….’
당황한 다니엘이 무어라 말을 못 하고 있자 모르텐이 입을 열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 완벽한 제 패배입니다.”
모르텐의 말에 당혹스러움이 배가 되었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을 찰나에 모르텐이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소령님이 이기셨습니다. 저는 모든 걸 잃었고 재기할 힘마저 없습니다. 소령님의 뜻대로 저를 처분하셔도 됩니다. 다만 제 가족만은…….”
모르텐의 눈동자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아래로 떨어진다.
“제발 제 가족만은 살려주십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이들입니다. 가족을 살려주신다면, 제가 황자 전하의 편에서 암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얌전히 시인하도록 하겠습니다.”
덕분에 다니엘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뭐라는 거지?’
대뜸 찾아와서는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골치가 아팠던 다니엘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군요.”
“예? 하지만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이…….”
재차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한 쪽 무릎을 꿇고 모르텐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모르텐을 응시하는 다니엘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진다.
“저는 그쪽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다니엘의 말을 들은 모르텐의 눈동자가 한차례 떨려간다.
다니엘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휘하에 무장 세력이 있다는 걸 숨기려고…….’
일개 군인이 개인적인 무력 집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진다.
모르텐이 보기에 다니엘은 외부의 간섭을 피하고자 ‘모르는 척’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책 잡힐 일을 조금이라도 만들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름이 돋는다.
실로 용의주도하면서도 냉철한 인물이었다.
‘대체 몇 수를 앞서 보고 있는 것인가…….’
황자 휘하의 비밀 조직인 새벽의 여명을 말살하는 것은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계획하고 있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일 뿐이었나.
절대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대적하지 말라던 놈들의 말이 피부로 와닿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 모르텐이 바닥에 손을 짚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은…….”
부복한 자세에서, 두려움에 잠식당한 모르텐이 굴종의 의미로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린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옅은 흐느낌 속에서 모르텐은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처음부터 이길 수 없었던 싸움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