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한나절 내내 신나게 놀아준 다니엘은 저녁이 되어 수도원을 나가기로 하였다.
그 과정에서 수도원장인 히에로니와 아이들이 자고 가라며 붙잡았으나 다니엘은 한사코 거절하였다.
숙소를 따로 잡은 것은 물론이고 오늘은 들릴 곳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어디를 가려는 건지 대충 예상이 되었던 히에로니는 다니엘을 더는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수도원을 떠난 다니엘이 도착한 곳은 ‘잭의 레스토랑’이었다.
동네의 중심가에 위치한 잭의 레스토랑은 겉보기에 허름한 외관이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이기도 하였다.
‘추억의 장소군. 고향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날 정도야.’
어렸을 적 다니엘은 잭의 레스토랑에 신세를 몇 번 졌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 수도원의 답답한 생활이 싫어 가출했을 때, 레스토랑의 주인인 잭이 항상 웃는 얼굴로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추억에 잠겨, 허름하다 못해 조잡하기까지 한 나무 간판을 한동안 올려다보던 다니엘이 걸음을 옮겼다.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분주하게 음식 서빙을 하고 있는 종업원들이 보인다.
“예! 금방 갑니다!”
“소시지와 프레첼이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기 튀긴 감자랑 맥주 하나요!”
오랜만에 왔는데도 여전히 활기가 넘치는 곳이다.
종업원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음을 옮긴 다니엘이 빈 테이블에 착석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던 제복모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 종업원 한 명이 주문 패드를 들고 다가온다.
“안녕하세요! 잭의 레스토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장교님께서 저희 가게에 방문하신 건 오랜만인…….”
평소처럼 접대를 하던 종업원은 다니엘의 얼굴을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종업원이 별안간 목청을 높인다.
“오빠! 오빠 맞아!? 세상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주근깨가 특징인 이 종업원의 이름은 네메림이었다.
수도원에서 꽤나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동생이기도 하였다.
네메림의 호들갑에 다니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이구나. 수도원을 나와서 독립했다기에 방문했는데, 아무래도 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군. 2년 사이에 몰라보게 성숙해졌으니까 말이야.”
반가웠던 네메림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오빠도 마찬가지야. 인상이 조금 더 날카로워지고 퇴폐적으로 변했달까? 아! 물론 좋은 의미로! 아무튼 다시 봐서 너무 좋다. 잭 아저씨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안 계시나?”
“응. 퇴근하셨어. 요즘 금슬이 좋으신지 일찍 퇴근하시더라고. 넷째를 가질 거라나 뭐라나.”
“넷째를? 그 나이에?”
어이가 없었던 다니엘이 반문하자 네메림이 입가를 가린 채 키득거렸다.
“사랑에는 나이가 필요없다잖아. 내가 보기에는 조금 로맨틱하기도 한 걸?”
“뭐, 확실히 반박은 못하겠다만…….”
“그치? 그리고 또…… 아고 내 정신 좀 봐. 시장할 텐데 배부터 채워야지? 주문은 뭘로 할래? 아니다. 내가 한 번 맞춰볼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네메림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소시지에 맥주! 맞지? 오빠 옛날에 잭 아저씨 몰래 소시지 훔쳐먹다가 걸렸었잖아. 어른들이 맥주 마시는 거 보더니 호기심에 한 모금만 달라고 한 적도 있었고.”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언급하고 그러나.”
“아하하! 쑥스러워하는 걸 보면 내가 알던 오빠가 맞네. 그래서 소시지에 맥주 가져다주면 될까?”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네메림이 잠깐만 기다리라는 말을 전하고는 주방으로 걸어간다.
언제 봐도 활기가 넘치는 아이라 생각한 다니엘이 남몰래 웃음을 흘렸을 무렵이었다.
‘……응?’
암갈색 코트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빈 테이블을 찾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남자는 다니엘을 응시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으니까.
이윽고 남자가 다니엘의 맞은편에 착석하였다.
덕분에 다니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합석 의사를 묻지도 않고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 대한 의아함이 증폭된다.
무슨 짓인가 싶었던 찰나에 남자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문을 열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 이 자리가 불편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오늘 수도원에서 무슨 의도로 우리에게 그런 말을 전한 건가.”
남자의 정체는 황자 휘하 비밀 조직 ‘새벽의 여명’의 수장인 모르텐 블랙모어였다.
당연히 다니엘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오늘 수도원? 수도원에서 말을 나눈 사람이라면…….’
수도원장인 히에로니와 아이들을 제외하면 시의회에서 나온 의원 한 명이 전부였다.
‘시의회 사람인가? 수도원을 잘 부탁한다는 소리를 불쾌하게 들은 건가.’
히에로니가 쩔쩔매던 걸 생각하면 분명 기부금에 관련된 예산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내가 시의회를 압박한다고 생각한 모양이군.’
어처구니없는 오해였기에 다니엘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저는 그저 협력을 바랄뿐이었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협력이라는 말에 모르텐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말이 협력이지 저건 ‘황자를 배반하고 내 밑에 들어와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할 거라 보나.”
“이런. 너무 과민반응을 하시는군요. 불가능한 일이 아닐 텐데요.”
모르텐이 이를 꽉 깨물었다.
‘개자식이. 이쪽을 조롱하고 있군.’
적어도 대화 정도는 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은 생각 이상으로 오만하고 독선적인 인물이었다.
다니엘이 어떤 인간인지 깨달은 모르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시간 낭비였군. 전쟁을 각오하도록 해라. 제아무리 네가 상대라고 해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모르텐이 으르렁거리는 걸 본 다니엘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니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르텐의 말은 비약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니요? 이걸 전쟁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까.”
정치인들은 평범한 말도 과대 포장하는 버릇이 있다더니.
고작 예산에 관련된 문제를 놓고 ‘전쟁’이란 비유를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손사래를 치며 낮게 웃음을 흘린 다니엘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질 나쁜 농담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갑니다만…….”
덕분에 모르텐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말을 단순한 농담 취급하는 다니엘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흐르던 웃음을 갈무리한 다니엘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죄송하지만 이딴 건 전쟁이 아닙니다.”
모르텐을 올려다본 다니엘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저, 단순한 의견 조율이지요.”
모르텐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저 뱀과 같은 말소리가 모종의 협박이 되어 뇌리를 공격하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
모든 걸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저 검은 눈동자가 심연처럼 보이고 있었다.
이곳에 조금만 더 있다가는 잡아먹힐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느껴진다.
심호흡을 한 모르텐이 억지로 걸음을 옮겨 다니엘을 지나친 순간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제게 이런 무례를 행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등 뒤편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온다.
“부디 옳은 선택이기를 바라겠습니다.”
뒤를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을 애써 잠재우며, 이를 꽉 깨문 모르텐은 식당을 나서기 위해 억척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
같은 시각, 상가 지하에 위치한 새벽의 여명 수뇌부.
─ 거동수상자들이 대거 접근중이다! 젠장! 저 새끼들 대체 뭐야!?
주파수를 맞춰놓은 무전기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텔렉스를 다루고 있던 정보원들의 손이 멈춘다.
─ 다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식별이 어렵다. 잠깐만 저거…… 시발! 총이잖아! 무장 세력들이야! 이 개새끼들! 뒤를 잡히지 말라고 했잖아!
연이은 무전에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어서 얼떨떨하게 있었지만, 어제 부호로 변장해서 다니엘의 감시를 맡았던 마벨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니엘 슈타이너야……! 그가 보낸 놈들이라고! 우리를 몰살시키려고!”
마벨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정보원들은 다들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로를 돌아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탕─
지상에서 총소리가 울리자 정보원들은 각자 권총을 꺼내들고 서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시발! 들켰다! 서류 모두 소각해!”
“총 가져와! 입구를 지켜야 한다!”
훈련 받은 이들답게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지만, 마벨은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틀렸어. 이 멍청한 새끼들아…….”
그 다니엘 슈타이너가 부리는 무장 세력들이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대적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마벨이 덜덜 떠는 와중에 지상에서 총소리가 몇 번 더 울린다.
그러더니 지하로 통하는 철문이 쾅! 하고 열렸다.
굉음이 지나간 직후 모두는 숨죽인 채 입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긴장으로 점철된 무거운 분위기가 내려앉는다.
“최고 참모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거지?”
“지시를 내려줄 사람이…….”
다들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에 마벨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이 병신들아! 아직도 모르겠어!? 다니엘 슈타이너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고! 최고 참모님을 밖으로 빼내서 지휘계통을 무너트린 다음에 우리를 일격에 소탕하려는 거란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다니엘을 만나러 간 모르텐은 악어의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꼴이었다.
이제 모든 게 명확해진 마벨이 낮게 흐느꼈을 무렵에 수류탄 세 개가 연달아 지하실 안에 던져진다.
흠칫 놀란 정보원들이 책상 뒤편으로 몸을 숨겼지만 수류탄이 터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푸쉬이─
다만 연기가 새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하지만 소리만 들릴 뿐 연기가 퍼지는 게 보이지는 않았다.
멍하니 그 모습을 구경하던 정보원 중 한 명이 기침을 내뱉더니 곧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그걸 본 마벨이 중얼거렸다.
“무색에 아몬드 향…… 씨발! 수면 마비 가스야! 마시면 안…… 콜록!”
바닥에 손을 짚은 마벨이 다른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는 바닥을 기었다.
어떻게든 비상구를 통해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탁탁탁탁탁─
군홧발 소리가 연이어 들리기 시작하더니 입구를 통해 무장 세력이 들이닥친다.
얼굴에 방독면을 쓰고 있는 이들은 서둘러 주변을 점거하더니 의식이 남아 있는 자들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시하고 있던 흑인 남자가 조용히 명령을 내린다.
“모두 기절시킨 후 포박하라. 저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상관없다.”
시야가 점점 흐려진다.
침을 흘려가며 기침을 내뱉던 마벨은 곧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방독면 안의 음성이 보다 두껍게 울린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흑인 남자가 다가오고 있는 게 보인다.
그는 마벨을 향해 총의 개머리판을 들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를 위해.”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벨의 의식은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