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가량이 지났을 무렵에 상부는 다니엘이 신청한 휴가를 수리해주었다.
전쟁 중인 국가라 휴가 수리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하다는 걸 감안하면 비교적 빠르게 허가가 나온 것이다.
휴가증을 받은 다니엘은 기차역을 통해 고급 열차인 ‘로열 익스프레스’의 일등석에 탑승하였다.
본래 장교라고 해도 고급 열차의 일등석 탑승권을 내어주지는 않지만, 그간 수많은 군공을 쌓은 다니엘을 위해 참모 본부에서 배려를 해준 것이다.
‘어디 보자. 내가 묵을 객실이…….’
붉은 융단이 깔린 복도를 걸어가던 다니엘이 CA8이라 적힌 객실 앞에서 멈춰 선다.
탑승권에 적힌 객실과 일치하다는 걸 확인한 확인한 다니엘이 문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큰 창문이 밖의 풍경을 환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내심 감탄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객실 양옆에 비치되어 있는 푹신한 침대가 보인다.
중앙에는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값비싼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기에 이름값을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근처 벽면에 들고 온 짐을 내려놓은 다니엘은 테이블로 다가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이후 제복모를 벗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열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옷매무새를 한 번 다듬은 다니엘은 의자의 등받이에 편안하게 몸을 기댄 채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였다.
열차가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들이었지만, 나무의 잎과 들판에 서린 광채는 열차가 어디를 달려도 변함이 없었다.
그야말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풍경의 연속이었다.
다니엘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 난 이런 걸 원했어.’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할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삶.
삶의 풍요로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적당히 많은 돈.
더해 남에게 무시받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권력.
소시민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인생의 삼위일체를 위해 마도 사관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인생이 실시간으로 꼬이고 말았다.
지금 다니엘의 인생을 요약하라면 이렇다.
암살을 당할 걱정을 가진 채 전장에서 죽지 않기 위해 고민해야 하는 불안정한 삶.
군공을 연달아 쌓은 덕분에 여러 포상금을 받아 부담스럽게 많아진 돈.
남에게 무시받지 않는 걸 넘어서 두려움을 안겨주게 된 권력.
다니엘이 지향하는 가늘고 긴 인생과는 거리가 멀어져도 너무 멀어지고 말았다.
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었다.
‘휴가니까.’
지금부터 한 달간은 연합국의 스파이인 부관과 숨 막히는 일과를 보지 않아도 된다.
황녀와 황자의 후계자 싸움에 휘말릴 걱정도 없었고, 참모 본부에서 또 무슨 작전 지원을 보낼까 싶어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었다.
‘곤란하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낮게 웃음을 흘린 다니엘이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만끽하였다.
‘그러고 보니 고향에는 거의 2년만에 돌아가는 건가.’
마도 사관학교 생도 시절에 정기 휴가를 사용해서 고향에 방문한 이후로 남부에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수도원장님은 잘 있을까. 갑작스럽게 방문하면 놀라실까 싶어 편지를 쓰긴 했는데…….’
워낙 폐쇄적인 곳인지라 편지가 제대로 도착했을지 걱정이 되긴 하였다.
다니엘이 여러 생각들을 이어가며 고향에서 보낸 추억들을 떠올리던 찰나였다.
드르륵─
객실의 미닫이문이 열리며 흑인 한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다니엘을 발견하고는 머리에 쓰고 있던 페도라를 벗어서 가슴에 올렸다.
“이런. 선객이 계셨군요. 노크라도 할 걸 그랬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니엘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괜찮습니다. 같이 쓰는 객실인데 제 눈치를 보실 필요는 없으니까요. 다니엘 슈타이너라고 합니다.”
“아!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이시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함탈이라고 합니다. 노르디아 출신이지요.”
흑인의 정체는 비밀결사 흑조의 수장인 함탈이었다.
물론 다니엘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노르디아 출신이라. 이거 기막힌 우연이군요. 제가 그곳에서 주둔지 사령관 노릇을 했었는데 말입니다.”
“덕분에 노르디아가 한층 살기 좋아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보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떠십니까?”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자리에 앉았다.
함탈 또한 맞은편에 앉은 후 넥타이의 위치를 조정하였다.
직후 마침 생각났다는 듯 태연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다니엘 소령님. 들어보니 노르디아에서 급진적인 도시 계획을 실시하였다고 하던데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혹시 몰라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떠보는 것이었다.
다니엘이 ‘제국을 위해’ 노르디아를 보다 이롭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보다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르디아를 도운 것인지 알고 싶었으니까.
함탈의 질문에 짧게 침묵하던 다니엘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실은 참모 본부와 노르디아 시민들에게 욕을 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시행한 겁니다. 그런데 결과가 본의 아니게 좋게 나왔을 뿐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함탈은 내심 감탄하였다.
‘제국과 시민 모두의 반발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 속에서도 강행했다고?’
이는 진정한 의미의 선지자나 마찬가지였다.
“혹시 저희 흑인들을 비롯한 유색 인종을 위해 목소리를 내주신 것도…….”
“목소리를 내다니요? 그건 당연한 겁니다. 인종 차별이라니…… 지독한 선민의식 아닙니까? 저는 그저 정신 나간 인간들에게 정신 나간 짓을 하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다니엘의 진지한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 다니엘의 모습을 본 함탈은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작은 의심까지도 버릴 수 있었다.
‘역시, 다니엘 슈타이너는 우리의 충성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마음속으로 존경을 내비친 함탈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 화장실에 좀 갔다 오겠습니다.”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여주자 함탈은 페도라를 다시 머리에 쓰고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를 몇 발자국 걷던 함탈은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전원을 키고는 송신 버튼을 눌렀다.
“각 구역 이상 상황 없는지 보고하라.”
함탈이 말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전기에서 보고가 잇따라 들어온다.
─ 다이닝 칸 이상 없음. 계속 주시하도록 하겠다.
─ 차내 라운지도 이상 없습니다.
─ 각 구역 연결 통로 이상 무.
현재 로열 익스프레스 열차의 모든 곳에 흑조의 인원들이 들어가 있었다.
다니엘 슈타이너가 봉변을 당하기 가장 좋은 시기가 군대도 없이 혼자 휴가를 나온 지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흑조의 수장인 함탈은 비밀 결사의 인원들을 대거 데리고 와서 남몰래 다니엘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 귀빈실에서 거동수상자 발견했습니다. 손목시계형 무전기를 통해 누군가와 통신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때, 귀빈실에서 들려온 보고가 함탈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두 눈을 싸늘하게 좁힌 함탈이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계속 감시하라. 놈이 열차에서 내리면 뒤따라가서 소재지를 발견하길 바란다.”
반대편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오자 함탈은 무전기를 끄고 품 안에 집어넣었다.
‘만약 다니엘 슈타이너를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지난 십 년간 갈고닦은 기술을 총동원해서라도 초전박살을 낼 것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다니엘은 객실 안에서 유유자적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뿐이다.
*
한편, 성 미카엘 수도원.
“잡초가 이렇게나…… 잠깐만 기다려주려무나.”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중정식 회랑 안에 위치한 정원에서, 수도원장인 히에로니가 잡초를 뽑아 옆에 있는 바구니에 옮겨 담고 있었다.
그런 히에로니 곁으로 사제복을 정갈하게 입은 부원장 수도자가 다가온다.
“원장 선생님. 잠깐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히에로니는 잡초를 뽑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아. 부원장 수도자님. 무슨 일이실까요?”
“다름이 아니라…… 다니엘이 내일이면 도착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대견하게도 그 아이가 휴가를 받은 김에 고향을 방문한다고 편지를 보내주었으니까요. 그런데 부원장 수도자님의 표정이 왜…… 다니엘이 오는 게 기쁘지 않으십니까?”
부원장 수도자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다만 들려오는 소문이 조금 의아하여 그렇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이라 하시면?”
“원장 선생님께서도 다니엘 소령이라는 분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아. 물론입니다. 제국의 영웅이지요. 그래서요?”
“저는 그 다니엘이 우리 수도원 출신의 다니엘이 아닐까 싶어서…….”
수도원은 기본적으로 외부 물건의 반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신문은 물론이고 간단한 잡지조차도 반입을 금하는 곳이 바로 수도원이었다.
신께 봉사하는 곳이기에 세속과 연이 닿으면 안 된다는 규율이 엄중하게 지켜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수도원에서도 다니엘 소령이란 이름은 유명하였다.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기부를 하기 위해 오가는 부호들과 정치인들이 이따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부원장 수도자처럼 그 다니엘이 우리 수도원 출신의 다니엘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도원장인 히에로니는 그저 웃길 따름이었다.
“동명이인일 것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습니까. 우리 다니엘이 어떤 아이였는지 부원장 수도자님께서는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니엘은 확실히…… 자상한 성정을 가진 아이였지요.”
“예. 그렇습니다. 거기에 사색하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데다 우리를 도와 제빵을 할 정도로 성숙하고 책임감 있는 아이였습니다.”
히에로니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것도 있지요. 수도원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병에 걸려 죽었을 때 다니엘이 삼일 밤낮을 울었지 않습니까. 이후 손수 묘지를 만들어주고 매일 꽃 한 송이를 무덤가에 올려주었죠.”
듣다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긴 다니엘은 가끔 저희도 놀랄 정도로 냉철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착한 성정을 가진 하느님의 어여쁜 자식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런 다니엘이 노르디아 침공을 앞장 서서 주도하고 왕국을 굴복시켰다니 말이 안 됩니다.”
히에로니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다른 걸 다 제쳐두고서라도, 다니엘은 이제 임관한지 9개월차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소령이라니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부원장 수도자가 헛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다니엘이 오면 평소 좋아하던 빵이라도 만들어줘야겠군요.”
히에로니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자 부원장 수도자가 몸을 돌려 걸어나간다.
히에로니는 다시금 무릎을 꿇고 잡초를 뽑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우리 다니엘이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그 소령이라니…….’
부원장은 가끔 상상력이 너무 지나쳐서 탈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럴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