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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5 - Chapter 55

다음날.

참모 본부로 출근한 다니엘은 작전 지원에 대한 보고를 하기 위해 참모실로 들어가 참모부장인 에른스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식적인 보고를 끝마치자, 에른스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에게 앞으로는 개인 집무실에서 업무를 봐도 된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가 굳이 참모실의 인원들과 부대끼며 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니엘은 극구 거절했으나 이미 위에서 결정이 난 사안인지 에른스트는 ‘명령’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완강하게 나섰다.

덕분에 일과가 오후로 접어들었는데도 다니엘은 개인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루시가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것은 덤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일에 열중하고 있는 루시를 지켜보던 다니엘은 피곤함을 느끼며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제도로 돌아오긴 했는데…….’

애석하게도 다니엘이 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군공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쌓아서 돌아온 덕분에 황자와 황녀간의 후계자 싸움에 휘말릴 위험이 커지고 만 것이다.

지금 당장은 임시방편으로 틀어막기는 했지만, 그들의 마수가 언제 이곳까지 뻗칠지는 모를 일이었다.

‘거기다 황제 폐하께서도 나를 신뢰하지 않는 모양이고…….’

다니엘이 보기에 어제 황제의 태도는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과정에서 어떤 판단을 도출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 좋은 방향은 아니었을 거다.

‘심지어 참모 본부 사람들도 은근히 날 피하는 느낌이야.’

오늘 보고를 위해 참모실로 들어간 다니엘은 어색한 침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잘 돌아왔다며 환영을 해줄 줄 알았는데, 참모실 인원들은 어딘가 모르게 기가 죽은 느낌으로 다니엘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몇몇 인원들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네주기는 하였지만 그마저도 어딘가 경직되어 있었다.

─ 다, 다니엘 소령님! 무사 복귀하여 참으로 다행입니다!

─ 시키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 황금 십자 훈장……! 화, 황제 폐하께서 직접 수여하셨다면서요?

그들의 말소리며 표정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두려움이 아직도 선명하였다.

‘소문이 퍼진 건가. 내가 적국의 외무대신을 무자비하게 협박하여 협상을 성사시켰다고…….’

명백한 오해인데, 오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 난감하기만 하였다.

꼬인 매듭 하나를 풀려고 발악하다가 역으로 매듭 여러 개를 더 만든 꼴이었다.

남몰래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루시를 바라보았다.

“부관. 네가 보기에도 내가 무섭게 느껴지나.”

고개를 든 루시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소령님은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넌 좀 나를 무서워해주면 안 될까? 속마음을 애써 숨긴 다니엘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업무를 보는 척 하였다.

그러자 루시 또한 시선을 돌려 서류 검토를 이어나간다.

루시의 눈치를 보던 다니엘은 서류 몇 개를 뒤적거리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오늘은 도저히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퇴근하면 오랜만에 장교 클럽이라도 가야겠군…….”

다니엘의 혼잣말에 루시의 귀가 쫑긋거린다.

‘……장교 클럽?’

루시가 알기로 제국 참모 본부에 마련된 장교 클럽은 음료와 칵테일을 파는 바 형태의 사교 모임으로 알고 있었다.

이건 기회라고 생각한 루시가 다니엘을 힐끔 바라보며 천천히 계획을 세웠다.

*

퇴근 후 다니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장교 클럽으로 향했다.

그걸 목격한 루시는 인근에서 한 시간 정도 서성거리다가 장교 클럽에 입장하였다.

한 시간의 텀을 둔 것은 우연하게 마주쳤다는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다.

‘좋아. 시작하자.’

장교 클럽으로 들어온 루시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본다.

고급스러운 조명이 은은하게 내부를 밝히는 가운데 목재 패널이나 벨벳 소파 같은 것들이 클래식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위관급 장교들과 영관급 장교들이 한데 어울려서 술잔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사교의 장이라 불릴만하였다.

‘그런데 다니엘 슈타이너는…….’

목표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리던 루시는 바 테이블 앞에 홀로 앉아 있는 다니엘을 발견하였다.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긴장감을 죽인 루시가 다니엘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령님? 이곳에 계셨군요.”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지만 다니엘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슬쩍 바라보자 다니엘은 한 손으로 테이블 위의 잔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이마를 짚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래도 생각에 잠겨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방해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루시가 바텐더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응? 아. 숙녀분. 어떤 걸로 드릴까요?”

바텐더의 상냥한 목소리에 루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다니엘 소령님과 같은 걸로 주셨으면 합니다.”

“스카치 위스키를 좋아하시는군요? 그중에서도 조니 워커라. 가볍게 즐길 수 있으면서도 고급스러운 맛이죠.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깨끗한 잔을 꺼낸 바텐더가 커다란 얼음을 하나 넣고는 조니 워커를 따라준다.

“여기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루시가 바텐더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었다.

노을을 닮은 위스키의 색감이 은은한 조명에 어울리며 제법 분위기를 살린다.

루시는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술잔을 가볍게 흔들어보았다.

‘술…….’

첩보 활동을 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여태 기피하던 기호품이었다.

그러나 다니엘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최종적으로 ‘유혹’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거쳐가야 하는 기호품이기도 하였다.

잔을 들어 올린 루시가 눈을 꾹 감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동시에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윽…….’

목을 타고 불덩이가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더해 입 안에는 알코올 향이 감도는 것이 불쾌하기만 하다.

다니엘은 대체 왜 이런 걸 마시는 거지? 이해가 안 되었던 루시가 옆을 돌아보았고, 자세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다니엘 덕분에 당황하고 말았다.

‘설마…….’

지금 자고 있는 건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루시가 바텐더를 돌아보았다.

“죄송하지만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질문 말씀이신지요?”

“소령님이 술을 많이 마셨습니까?”

루시의 질문에 다니엘을 한 번 바라본 바텐더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 오늘 힘든 일이 있으셨던 건지 일곱 잔을 연속으로 마시더군요. 뭐였더라?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던가? 철학적인 말을 중얼거리시고 눈을 감으시더니 줄곧 이 상태입니다.”

덕분에 루시는 어이가 없어졌다.

“…….”

술에 취한 척을 해서 다니엘을 유혹하려고 했었는데, 정작 다니엘이 먼저 만취한 채 곯아떨어져 있었으니까.

낮게 한숨을 내쉰 루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텐더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소령님이 귀하께 끼친 민폐를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아아. 아닙니다. 다니엘 소령님 정도의 주사는 엄청 예의바른 편입니다. 오히려 이런 손님만 있었으면 할 정도로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다니엘 소령님은…….”

다니엘을 내려다본 루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숙소까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졸지에 예정에도 없는 상사 뒷바라지를 하게 생겼다.

*

숙소에 도착한 루시는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서 다니엘을 침대에 눕혔다.

침대에 누운 다니엘은 몸을 뒤척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물…….”

다니엘을 숙소까지 끌고 오느라 힘이 들었던 루시의 이마에 격자로 힘줄이 돋아난다.

‘죽일까.’

지금 상황에서 암살 임무가 내려졌다면 망설임 없이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뜩잖게 다니엘을 내려다보던 루시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컵에 물을 따랐다.

물 한 컵 정도는 주지 못할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컵을 들고 돌아와서 침대에 무릎을 꿇고 올라간 루시가 다니엘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든다.

“소령님. 물 가져왔습니다.”

누워서 물을 마시면 기도가 막힐 위험이 있으니 일어나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미 만취한 상태의 다니엘은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게 불만이었던 루시가 조금 더 강하게 어깨를 흔든 순간이었다.

다니엘이 불현듯 루시의 팔을 붙잡더니, 그대로 잡아당긴다.

“……!?”

반항할 새도 없이 끌려간 루시는 물컵을 떨어트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떠보자 시야에 다니엘의 가슴팍이 보인다.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던 루시는 지금 자신이 다니엘의 품에 안겼다는 것을 자각하였다.

“……!”

놀란 고양이처럼 두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어쩔 줄 몰라하던 와중에 다니엘이 루시의 뒷머리를 붙잡고 살며시 끌어안았다.

“가지 말지…….”

중후한 목소리가 귓전을 간지럽힌다.

그때, 루시는 프리엔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 남자는 기본적으로 늑대니까요.

그래. 아무리 냉혈한인 다니엘 슈타이너라고 해도 한창때의 남자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니엘의 품에 안기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떨쳐내고 싶었지만 임무에 얽매인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잔뜩 긴장하고 있을 찰나에 다니엘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그쪽은 진흙밭이다…… 원장 선생님에게 혼날 거야…….”

원장 선생님?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루시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꼬대였나.’

내막을 알아차린 루시가 내심 안도하며 다니엘의 팔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잠에 빠져든 채로 누워 있는 다니엘을 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루시는 정신을 차리며 침대에서 벗어나 도망치듯 숙소를 나섰다.

쿵.

서둘러 숙소의 문을 닫은 루시가 힘이 빠진 것처럼 숨을 토해낸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한 루시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주먹을 꾹 쥐었다.

‘위험했어…….’

위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루시는 무엇이 어떻게 위험했는지 제대로 정의할 수가 없었다.

괜히 죄없는 제복의 치맛자락을 움켜쥐던 루시가 얼굴을 붉힌다.

이내 두 눈을 반개하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의 두근거림이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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