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리무진에 뒷좌석에 앉은 채 심호흡을 하였다.
고급스러운 벨벳 커버로 덮혀 있는 가죽 좌석에서 부드러움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군용 차량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촉이었지만 나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바로 옆좌석에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는 인물 중 한 명인 황녀가 타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황제 폐하의 호출이라고 해도 황녀가 직접 나올 필요가 있나?’
의아함이 증폭되는 와중에 셀비아가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돌아본다.
맑은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진중하게 좁혀지는 것을 보니 뭔가 할 말이 있어보였다.
“다니엘 소령.”
목소리를 낮춘 셀비아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전장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이런 소리를 하기는 싫지만,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전하도록 할게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무언가 안 좋은 분위기를 직감했을 무렵에 셀비아가 말을 이었다.
“지금 제도에서는 저에 대한 공격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지지기반에 대한 공격이겠지요. 언론을 이용한 공격이라면 신경도 안 쓸 테지만…….”
셀비아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점점 도가 지나치다 싶더니 최근에는 저를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목숨까지 위협하기 시작했어요. 누가 봐도 오라버니의 짓이에요.”
내가 가만히 듣고 있으니 셀비아가 이를 꾹 깨물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에요. 필시 어딘가에 그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수뇌부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도 내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네. 제도를 벗어난 안전한 곳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을 거예요. 놈들이 오라버니의 편에 서서 언론을 조작하고 제 지지기반을 흔들려고 하고 있겠죠. 역겨운 개자식들…….”
셀비아가 분하다는 것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보니 이건 이른바 황제가 되기 위한 후계자 싸움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알지 못하는 수면 밑에서부터 치열하게 공방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 정치로 따지면 선거 캠프끼리의 알력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이 시대는 현대가 아니라 근대라는 점이다.
시대상을 바탕으로 볼 때 과격한 선동은 물론이고 폭력까지 서슴치 않을 것이 분명하다.
절대 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셀비아가 돌아가는 상황을 내게 전해줬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나를 영입하려고 하는 거겠지…….’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인물을 포섭한다면 지지기반을 굳건하게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황제가 되기 위한 정당성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
셀비아의 노림수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나는 절대 수락할 수 없었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황자까지 적으로 두라고?’
내가 황녀의 제안을 수락하면 암살 두 배 이벤트가 일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절하면 차기 황제인 셀비아의 미움을 살 텐데…….’
머릿속 주판을 굴리고 있을 무렵에 화를 갈무리한 셀비아가 나를 올려다본다.
일종의 기대감이 담긴 눈빛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다니엘 소령?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안 된다……! 셀비아의 입에서 손을 잡자는 말이 나오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한시가 급했던 내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뇌까렸다.
“황녀 전하. 그보다 못 보던 사이에 훨씬 예뻐지셨군요.”
뜬금없이 외모 칭찬을 들은 셀비아가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아. 응?”
이해가 되지 않아 굳어 있는 지금이 화제를 돌릴 적기였다.
남몰래 식은땀을 흘린 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셀비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제가 전장에 제법 오래 있기는 한 모양입니다. 전하께서 이리도 아름다워지신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셀비아의 입이 살며시 벌어진다.
거듭해서 들은 외모 칭찬이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미약하게 볼이 상기되기도 하였다.
바로 이거라고 생각한 내가 조금 더 밀어붙였다.
“전하. 종군 기자로 변장했던 황녀 전하와 제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저와 전하만의 추억이 퇴색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때의 전하가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무척이나 고상한 숙녀가 다 되셨군요.”
미소까지 지어가며 말을 건네자 셀비아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린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가 다시금 뜬 셀비아는 나를 한 번 흘겨보았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아요. 제가 예전에도 말했지만 당신은 거리감이 너무 가까워요.”
“제가 무례를 저질렀다면 부디 용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셀비아가 헛기침을 내뱉고는 중얼거렸다.
“……무례하다고는 안 했어요.”
셀비아의 퉁명스러운 말소리에 낮게 웃음을 흘린 내가 몸을 물렸다.
이후로 나와 셀비아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어색한 침묵이 나에게는 참으로 다행으로 느껴졌다.
대화가 더는 이어지지 않았으니까.
‘살았다…….’
하마터면 후계자 싸움에 휘말릴 뻔 했는데 안심이었다.
다만, 장차 황제가 될 사람에게 괜한 추파를 던진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되기는 하였다.
*
이후 황궁에 도착한 다니엘은 간단한 몸수색 끝에 황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셀비아는 다음 일정이 있는 모양인지 동행하지 않았기에, 황제의 직속 수행원이 대신 안내를 맡았다.
그리 수행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알현실이 아닌 황제의 침실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옷을 갖춰 입고 알현실까지 나갈 기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폐하.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이 도착하였습니다.”
수행원이 노크를 하며 말하자 대답은 잠시 후에 들려왔다.
“들어와라.”
대답을 들은 수행원이 문을 열어준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인 황제의 침실은 생각보다 단출하였다.
가구나 침대가 고급스럽고 방이 상상 이상으로 넓은 걸 제외하면 사치품이 그렇게 많지 않았으니까.
황제는 방의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아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반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계급을 본 다니엘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깨의 계급장에 별 4개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양옆으로 뻗어나가 있는 콧수염이 인상적인 그는 최고위 장성이자 제국 황실의 친위대장인 요하네스 쿤츠였다.
현 황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요하네스의 얼굴을 확인한 다니엘은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뼈에 붙어 있는 살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척한 몰골이었으나 그 기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베르트함 폰 암베르그.
명실상부 제국의 주인이자 지금의 제국을 있게 만든 선진 군주이기도 하였다.
두 거물을 앞두고 있으니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간다.
다니엘은 긴장한 채로 발걸음을 옮겨서 경례를 올렸다.
“황제 폐하! 부름에 응해 이곳에 도착-”
“됐으니까 이리 좀 와보게.”
말이 끊긴 다니엘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베르트함의 지근거리로 걸어갔다.
베르트함은 체스판을 내려다보며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네 체스를 좀 하나?”
“……어깨 너머로 배운 적은 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많이 불리한 것 같은데.”
체스판을 한 번 훑어본 다니엘이 눈치를 보며 대답하였다.
“폐하. 소인의 얕은 생각으로는 불리한 것은 폐하가 아니라 친위대장이 아닐까 합니다.”
“응? 내가 기물이 훨씬 적은데 친위대장이 불리하다고?”
“그렇습니다.”
베르트함이 친위대장인 요하네스를 장난스럽게 노려보았다.
“그렇다는데?”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요하네스가 웃어넘기자 베르트함이 다니엘을 돌아본다.
“좋아. 우리 다니엘 소령. 그럼 내가 왜 유리한 건지 설명을 해보게.”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황제 폐하의 룩이 왼쪽에 있는 폰을 잡는 걸로 가겠습니다. 그럼 체크가 되겠지요. 대각선에 황제 폐하의 퀸이 있으니 친위대장의 킹은 반드시 g8로 피해야 합니다.”
“음음. 그렇지.”
“이때 룩이 다시 돌아오면 체크가 됩니다. 킹이 룩을 잡는 순간 퀸에게 공격을 당할 테니까요. 다시 킹은 h8로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반복하면…….”
설명을 듣고 있던 요하네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이런, 제 패배군요. 기물을 모두 잡아먹힐 게 뻔합니다. 황제 폐하의 승리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니엘 소령의 승리지. 기가 막힌 전술이야. 감탄이 다 나오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체스 선수를 했어도 대성했겠습니다.”
어깨를 한 번 으쓱인 요하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걸 본 다니엘이 두 발 뒤로 물러난 다음 한 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체스가 끝났으니 본론으로 들어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요하네스가 체스판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몸을 돌린 베르트함이 다니엘을 내려다본다.
“다니엘 소령. 노르디아를 함락시킨 것에 모자라 왕국과의 종전 협상을 체결시켰다지. 그대의 노고에 제국을 대표해서 짐이 감사를 표하마.”
“황송할 따름입니다.”
“아직 황송하기는 이르네. 자네한테 줄 게 있으니까. 요하네스?”
베르트함의 말에, 체스판을 정리한 요하네스가 테이블 옆에 놔두었던 상자를 들어 올린다.
상자를 열자 훈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제국의 1등급 수교훈장인 황금 십자 훈장이었다.
세운 공이 명확하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일어나게.”
요하네스의 말을 들은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요하네스는 다니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주고는 그 가슴팍에 훈장을 달아주었다.
“황금 십자 훈장은 내가 알기로 자네 같은 젊은이들에게 수여된 적이 없네. 그만큼 자네가 큰일을 해내었다는 소리야.”
덕담과 함께 다니엘의 어깨를 다시금 두드려준 요하네스가 뒤로 물러난다.
요하네스가 물러나자 다니엘은 다시금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황제인 베르트함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운 공에 대한 칭찬이야 이미 사방에서 들려오고 있을 테니 굳이 반복해서 말하지는 않겠네. 그보다 작금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지.”
“중요한 문제라고 하시면?”
“그대는 내 딸아이와 아들 중에 누가 황제로서 적격하다고 보는가. 내가 보기에는 둘 모두 미덥지 않아서 말이지.”
식은땀이 흐른다.
황녀를 겨우 떨쳐냈더니 이제는 황제가 직접 물어보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 머리를 굴리던 다니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는 감히 의견을 표명할 수 없습니다.”
“뭐라? 지금 내 질문을 무시하겠다는 건가.”
베르트함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하자 다니엘이 다급히 외쳤다.
“폐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국의 군인입니다. 군인은 정치적 중립을 지킬 것이 제국의 볍률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의견을 말하는 순간 황제 폐하는 물론이고 제국의 지엄한 법률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다니엘이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러니 제 대답을 들으시려거든 군인의 신분을 내려놓게 하심이 옳은 것으로 압니다. 그리해주신다면 제 소신껏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다니엘의 대답을 들은 베르트함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용의주도한 놈 같으니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에 제국의 법률을 들먹여서, 제아무리 황제라도 재차 대답하라는 명령을 가한다면 제국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 협박하고 있었다.
주장이 확실한데다 이치에 옳으니 황제라고 해도 저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군복을 벗으라고 명할 수도 없으니 베르트함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사면초가였다.
결국 백기를 든 베르트함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어떤놈이지 알 것 같구나. 피곤할 텐데 이만 물러가도록 해라.”
“……예. 황제 폐하.”
황제의 말이 의심스러웠지만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다니엘은 경례를 한 번 올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베르트함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으며 말했다.
“보이는가. 놈의 내면이 말이다.”
“어느 정도는 말입니다.”
처음 체스에 대한 조언을 물었을 때, 다니엘은 짐짓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곧 베르트함에게 직언을 해주었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해답을 안다고 해도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을 겁니다. 기력이 쇠한 황제 폐하를 돕는 것으로 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 줄타기를 하려고 드는 게 보통이야. 그런데 다니엘은 그러지 않았다.”
“눈치를 보지 않고 제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좋은 태도입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에 관한 질문에서는 침묵을 고수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인 베르트함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자신이 인정한 자에게만 고개를 숙인다는 거겠지. 나는 명실상부 제국의 주인이지만 내 자식들은 그게 아니니까. 아마 놈은 심사숙고하고 있을 걸세. 누구에게 힘을 실어줄지에 대해서 말이야.”
테이블에 놓인 물컵을 들어 목을 한 번 축인 베르트함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놈은 늑대다. 오직 강자에게만 충성하는 놈이지. 하지만 늑대란 본래 우두머리가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하면 물어뜯는 법이다.”
요하네스가 침을 꿀꺽 삼킨다.
“그 말씀은…….”
“그래. 놈은 유능하지만 다루기 힘든 양날의 검이다. 내 자식들 중 누가 저 놈을 쥐게 될 줄은 모르겠지만,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물어뜯기고 말 것이야.”
베르트함이 보기에 다니엘의 서늘한 눈빛은 과거 황위를 찬탈한 조부님과 닮아 있었다.
컵을 내려놓은 베르트함이 요하네스를 돌아본다.
“그러니 그대가 저 늑대가 송곳니를 드러내지 않게끔 내 자식들을 잘 보호하게. 제국이 저 자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말일세.”
고개를 끄덕인 요하네스가 다니엘이 나간 자리를 바라본다.
‘제국을 집어삼킬 늑대라…….’
황제의 괜한 걱정인가 싶다가도, 다니엘의 눈빛을 떠올리면 괜히 오한이 서렸다.
저도 모르게 허리춤에 패용한 검집을 꽉 붙잡은 요하네스는 생각했다.
이 모든 예상은 단순히 폐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