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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3 - Chapter 53

날이 밝자마자 다니엘은 제도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술을 꽤 마시긴 했지만, 다음날 지장이 갈 정도로는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다크서클이 조금 더 짙어졌다는 정도였다.

어찌 되었든 군단장 보좌관 중령 칼프렌의 배려 덕분에 다니엘의 본부 직할 중대는 모두 상태 좋은 군용 차량에 탑승할 수 있었다.

그리 군단 사령부에서 출발한 다니엘은 약 열흘에 걸친 주행 끝에 제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니엘을 태운 군용 지프 차량이 제도에 들어서자마자 시민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손수 준비한 꽃잎들을 흩뿌렸다.

다니엘이 왕국과의 협상을 체결시켰다는 소식이 이미 제도에도 파다하게 퍼진 덕분이었다.

그게 마뜩잖았던 다니엘은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반응하지 않았다.

물론 다니엘이 반응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시민들의 환영이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었다.

참모 본부 입구에서도 진을 치고 기다리던 시민들이 온갖 찬사 문구가 적힌 팻말을 들고 흔드는 통에 다니엘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래도 민간인 진입 금지 구역인 참모 본부 안으로 들어가자 시민들이 더는 따라오지 않았기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어? 저기 서 있는 분 황녀 전하 아닌가요?”

프리엔의 말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감고 있던 눈을 떠서 창밖을 바라본 다니엘은 낮게 침음하였다.

프리엔의 말대로 참모 본부 정문 앞에서 황녀 셀비아가 친위대 수석 경호를 맡고 있는 중령 하르트만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왜 왔는지 대충 예상은 간다만…….’

황녀가 직접 마중을 나올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다니엘이 의아해하는 찰나에 선두를 달리던 지프 차량이 천천히 정차한다.

다니엘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하르트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셀비아가 고개를 돌린다.

셀비아는 제국 장교의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감의 재질이 다른 것은 물론이고 검은색이 아닌 새하얀 백색이었다.

또한 계급장이 있어야 할 곳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대신하고 있었다.

여러 화려한 치장품까지 포함하면 저건 오직 황족만이 입을 수 있는 정복인 셈이었다.

품격은 옷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황족을 상징하는 제복을 입은 셀비아가 다가오자 프리엔은 물론이고 루시 또한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다니엘 또한 긴장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오랜 주행으로 인한 피곤함이 약소하게 앞섰기에 크게 떨리지는 않았다.

“황녀 전하.”

다니엘이 경례를 올리자 셀비아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왜 이제 왔어요? 제가 얼마나 당신을 기다렸는…….”

셀비아는 말하다 말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체통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니엘 소령? 전장에서 군공을 쌓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관련해서 아버지께서 다니엘 소령을 보고자 하는 것은 알고 계시겠죠?”

“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아버지께서 다니엘 소령을 보고자하니 황궁으로 가도록 하죠.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금방 갈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당황스러웠던 다니엘이 짧은 침묵 끝에 말했다.

“전하. 지금 당장 말씀이십니까?”

다니엘의 물음에 셀비아는 미안하다는 기색으로 낮게 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이게 경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말이에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현재 위독하세요. 한 달에 정신이 맑은 날이 며칠 없을 정도로 말이에요.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정신이 온전한 지금 다니엘 소령을 보고자 하시는 거예요.”

황제의 병환이 깊어졌다는 건 다니엘도 알고 있기는 하였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하를 따라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그쪽과 긴히 나눌 이야기가…… 아니, 이건 가면서 말하면 되겠네요. 따라와요.”

셀비아가 참모 본부 한 편에 자리를 잡고 있는 리무진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정장을 입은 운전 기사가 뒷문을 연 채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었다.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황녀의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셀비아를 따라 걸음을 옮긴 다니엘은 리무진에 탑승하였고, 뒷좌석의 문을 닫은 운전 기사는 운전석에 탑승하여 부드럽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천천히 움직이던 리무진이 참모 본부를 빠져나가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프리엔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군공을 축하할 겸 소령님과 파티라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참모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황녀 전하께 빼앗겨버리고 말았네요.”

프리엔의 옆에 있던 루시는 긍정도 부정도 없이 리무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기발한 생각이 들었는지 프리엔을 돌아본다.

“프리엔 생도. 혹시 남자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을까.”

“음. 없지는 않았어요. 몇 번 고백을 받은 적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사귀지는 않았지만요.”

“그럼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떤 점이 인기의 원인이라고 생각해?”

“글쎄요. 유약하게 보였던 게 아닐까요? 교회에서 살던 시절의 저는 겁이 꽤 많은 편이었거든요. 지켜주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아니면…….”

프리엔이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잘해주면 한 번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남자는 기본적으로 늑대니까요. 그 왜, 술에 취한 척을 하면 남자들이 본능을 드러낸다고 하잖아요?”

“……왜?”

“응?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아요? 술에 취한 여자는 무방비 상태가 되잖아요. 남자 입장에서는 본능을 드러내기가 가장 쉬운…… 잠깐만.”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의아스럽게 루시를 바라보던 프리엔이 한 쪽 눈썹을 찌푸린다.

“루시 소위님. 설마 다니엘 소령님을 어떻게 해보려는 속셈은 아니시겠죠?”

프리엔의 질문에 루시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임무를 들킨 건가 싶었던 것이다.

우물쭈물하던 루시가 시선을 돌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 모습을 본 프리엔은 생각했다.

‘이 사람, 거짓말 한 번 더럽게 못하네.’

루시가 숨기고 있는 과거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첩보 요원은 절대 아닐 거라고 판단한 프리엔이었다.

*

다니엘 슈타이너에 의해 종전 협상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은 당연히 노르디아에도 닿았다.

소식을 들은 비밀 결사 흑조의 수장인 함탈은 즉시 평의회를 열었고, 각 지부의 대장들은 본부의 부름에 응해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각탁 위를 장식하고 있는 촛대 위에서 양초의 촛불들이 차분하게 타오른다.

엄중한 분위기 속에서 지부장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함탈이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소집임에도 불만을 표하지 않고 참석해주어 고맙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만 내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이번 종전 협상에 관련해서일세.”

지부장들은 침묵하는 것으로 긍정을 표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종전 협상이 성사되면서 노르디아는 왕국의 압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네. 시민들은 더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며 환호하더군.”

함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그뿐인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조세가 놀라울 정도로 줄어들었네. 그야말로 시민들을 위한 도시가 탄생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이 모든 건…….”

검은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는 남자의 말에 함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이 만들어낸 기적이지. 우리 모두는 그에게 은혜를 입었네. 그렇지 않은가?”

잠시 망설이던 지부장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우리들의 비원을 이루어주었네. 지난 십 년간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였던 염원을, 신이 아닌 다니엘 슈타이너가 들어주었다는 말일세.”

미소를 거둔 함탈이 진중하게 두 눈을 좁힌다.

“그러니 나는 지금부터 다니엘 슈타이너에게 받은 은혜를 갚으려고 하네. 그대들은 생각은 어떠한가? 타성에 젖은 짐승들처럼 받은 은혜를 그저 당연한 것처럼 여기겠는가?”

지부장들은 하나 둘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함탈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다면 흑조는 지금부터 다니엘 슈타이너의 그림자로서 활동해야만 하네. 그의 목숨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세상에게도 이로울 것이 분명하니까.”

함탈이 생각하기에 다니엘 슈타이너는 선지자였다.

남들은 알고 있어도 나섰다가는 피해를 볼까 싶어 쉬쉬했던 악습들을, 다니엘 슈타이너는 당연한 것처럼 나서서 없애주었으니까.

하지만 함탈은 안다.

대대로 선지자들은 세상의 박해를 받기 마련이라는 것을 말이다.

다니엘 슈타이너 또한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니 함탈은 비밀 결사 흑조의 힘을 이용하여 다니엘의 생존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모양이니 설명하지. 지금부터 비밀 결사 흑조는 각 지부를 제도로 옮긴다. 이후 다니엘 슈타이너를 음해하는 세력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음해 세력이 발견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력을 써서라도 제지한다.”

언뜻 과격하게 비춰질수도 있는 명령이었지만, 지부장들은 이해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들 중 몇몇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지난 십 년간 귀족들의 사병과 수시로 싸움을 벌인 지부장들에게 있어서 무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예외적인 항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탈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쓰고 있던 남자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그런데 지부를 제도로 옮기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저희는 어디까지나 왕국민…….”

남자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야트막한 깨달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왕국이 노르디아를 할양한 이상 우리들은 이제 제국민이겠습니다. 국적 변경을 희망하면 들어줄 테니까요.”

위험도가 사라졌으니 더는 함탈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남자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함탈이 지부장들을 둘러본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의결을 진행하지. 본 의제에 동의하는 자들은 잔을 들어라.”

함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부장들이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어 올린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던 남자 또한 잔을 들어 올리자, 지부장들은 입을 모아 비밀 결사 흑조가 창설된 목적을 말했다.

─ 세상에 만연한 혐오와 차별을 없애는 그 날을 위해.

지부장들의 만장일치를 본 함탈 또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또한, 다니엘 슈타이너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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