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과를 끝낸 후 호텔의 숙소로 돌아온 다니엘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국에서의 위험천만한 생활을 청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여러모로 기분이 좋았으니까.
‘이제 내 목숨을 노리는 루시를 안 봐도 되는 건 물론이고 전범 재판에서 사형수가 될 걱정도 할 필요가 없구나.’
덧붙여 전장에서 눈먼 총알에 객사할 위험도 사라질 테니 일석삼조였다.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다니엘이 부엌의 냉장고를 열어 로크포르 치즈와 얼음을 꺼냈다.
일명 블루 치즈라고도 불리는 로크포르에서 특유의 강렬한 향이 흘러나온다.
‘좋아. 숙성이 잘 됐구나.’
이건 노르디아를 떠날 때 시민들이 돈을 모아 구매하여 다니엘에게 선물해줬던 치즈였다.
비싼값을 자랑하는 치즈인지라 아껴먹으려고 했는데, 어차피 곧 제국을 떠날 몸이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치즈를 식탁 위에 올려놓은 다니엘은 이번엔 선반에서 보급용 위스키와 잔을 꺼낸다.
마찬가지로 잔을 식탁 위에 올린 다니엘이 얼음을 소량 담아내고는 위스키를 가볍게 따라내었다.
석양을 닮은 위스키의 빛깔이 잔을 절반 정도 채운다.
이 비싼 치즈를 보급용 위스키와 함께 먹어야 하는 게 조금 아깝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전장에서 이정도면 특급 사치나 마찬가지였으니 불만은 없었다.
위스키 병을 옆으로 치우고 잔을 들어 올린 다니엘이 창가로 걸음을 옮긴다.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 모금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명에 성공하면 뭐부터 할까. 그림이나 그릴까? 예전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지…….’
곰곰이 생각하던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일류가 되지 않는 이상 그림은 돈이 안 돼. 그렇다면 제빵? 고향에서 원장님을 도와 빵을 몇 번 만든 적이 있었지. 그때 재능이 있다며 꽤 칭찬을 받았었으니…….’
인생 설계를 하며 걸음을 옮기던 다니엘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장에는 평소처럼 수많은 군인들이 왕래하고 있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오늘은 왜인지 가로등의 빛을 받으며 움직이는 군인들의 모습에 활기가 넘쳐 보인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의아해서 계속 지켜보고 있으니 말단 병사로 보이는 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병사의 말을 들은 간부 및 고참병들은 무어라 말을 몇 번 주고받더니 곧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다 몇몇 병사들이 다니엘이 묵고 있는 호텔의 7층을 가리키고는 대뜸 경례를 올린다.
한두 명이 올린 경례는 마치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을 향해 경례를 올렸고, 몇몇 하급 간부들 또한 병사들의 행동을 따라 하였다.
졸지에 광장에 모인 수백 명의 군인들에게 경례를 받게 된 다니엘은 식은땀을 흘렸다.
‘뭐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잠재우고자 위스키가 담긴 잔을 들어서 가볍게 목을 축였다.
‘설마. 아니겠지…….’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애써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찰나였다.
똑똑─
정중한 노크소리와 함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 안에 있나? 군단장님 보좌관일세!”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질 않는 걸까.
손을 들어 안면을 한 번 쓸어내린 다니엘이 위스키가 담긴 잔을 근처 식탁 위에 내려놓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자 칼프렌 중령이 서 있었다.
“……칼프렌 중령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다니엘의 물음에 칼프렌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소식을 알려주고자 왔네. 왕국측에서 자네 제안을 받아들였어!”
“예? 제 제안이라고 하면…….”
“제국의 기존 협상안에 모두 응하겠다고 한 것은 물론이고 노르디아에 더해 베겐하임까지 할양하겠다고 나섰네! 정말이지 엄청난 쾌거가 아닐 수 없어!”
칼프렌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지만 다니엘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왜?’
게임에서는 세 번의 협상을 모두 결렬시키고 결사항전에 나선 놈들이 왜 이제 와서 겁먹은 개처럼 백기를 들었단 말인가?
‘심지어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끔 2급 기밀을 모두 알려줬는데도 백기를 들었다고?’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머리를 굴리던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설마 정보의 격차가 발생했었나?’
왕국군이 제국의 군단이 가진 병력과 전력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기밀을 알려준 것이 모종의 협박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보의 격차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왕국측의 정보부를 의도적으로 마비시키는 것에 모자라 거짓 정보를 퍼트려 연막을 꾀해야 한다.
적어도 제국에서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
왕국의 통신망을 장악하는 것에 성공하기는 했다지만, 거짓 정보를 퍼트리지는 않았으니까.
애초에 왕국이 겁을 먹고 종전 협상을 수락하기를 바란 것이 제국이다.
굳이 거짓 정보를 퍼트려서 왕국이 협상을 결렬시킬 건덕지를 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왕국을 뒤에서 조종한 것은 연합국이라는 소리가 된다.
단순히 왕국의 패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제국의 공격을 최대한 버텨내며 어떻게든 출혈을 일으키고 죽게 만들기 위해서 손을 쓴 것이다.
‘망할.’
연합국이 이리도 체계적으로 왕국을 조종하고 있었을 줄이야.
계획이 뒤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다니엘의 두 눈이 수심에 잠긴다.
그 모습을 본 칼프렌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공을 세웠다는 것을 말해줬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군.’
다니엘의 모습에서 칼프렌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다.
‘하긴 왕국을 굴복시켰다고 해도 제국은 여전히 연합국과 전쟁 중이야. 병사들을 이끌어야 하는 장교가 실없이 기뻐해서야 군의 모범이 되지 않겠지…….’
과연 제국의 영웅이라 불리는 다니엘 슈타이너였다.
헛기침을 한 번 내뱉은 칼프렌이 꽤나 진중해진 태도로 입을 열었다.
“훌륭한 임무 수행이었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 임무를 끝마쳤으니 제도로 돌아갈 수 있게끔 준비를 해두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우리가 전해야겠지. 아, 그리고 하나 더 말해주자면 황제 폐하께서 자네를 보고자 하시더군.”
다니엘이 당황하며 칼프렌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말씀이십니까?”
“그래. 잘못하면 장기전으로 흐를 수 있는 왕국과의 전쟁을 자네 덕분에 초기에 끝내버렸지 않은가. 폐하께서도 많이 기뻐하고 계실 걸세.”
칼프렌은 출세길이 열렸으니 축하한다는 의미로 말한 거지만 다니엘은 곤란할 뿐이었다.
황제의 눈에 들면 곧 일어날 후계자 싸움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기에 다니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정말 영광이겠습니다.”
“웃으니 보기 좋구만. 그래. 그간 힘들었을 텐데 오늘은 푹 쉬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칼프렌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칼프렌이 호텔의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본 다니엘이 문을 닫았다.
문고리를 잡은 채 한동안 가만히 있던 다니엘은 불현듯 소리를 질렀다.
“왜에!”
몸을 돌린 다니엘이 식탁으로 걸어가며 외친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왜 나는 행복할 수가 없는 거냐고!”
향할 곳 없는 분노를 표출하던 다니엘이 위스키 병을 붙잡았다.
그대로 던져버리려던 다니엘은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며 병을 내려놓았다.
‘술은 마셔야지.’
아까운 술한테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다니엘이 의자에 앉아서 위스키 잔에 남은 술을 입에 들이부었다.
술이 쓰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었는데…….’
화가와 제빵사의 꿈을 반 강제적으로 마음속에 묻어버린 다니엘이 위스키 병을 들어 술을 한 잔 더 따라낸다.
오늘은 아무래도 많이 마셔야 할 것만 같았다.
*
같은 시각, 국제연합 상임이사국 에드리아.
“칼레드라 백작! 지금 무슨 짓인가!?”
궁전의 알현실 안에 칼레드라가 사병들과 함께 들이닥친다.
칼레드라 본인 또한 허리춤에 권총을 패용하고 있었다.
알현실에서는 무기를 소지하면 안 된다는 법령을 정면에서 어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레드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옥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 걸어갔다.
칼레드라가 지팡이를 바닥에 짚으며 걸어올 때마다 둔탁한 소음이 들려온다.
옥좌의 팔걸이를 꽉 붙잡은 채 침음을 흘리는 왕을 향해, 칼레드라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국왕 전하. 소인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한시가 시급하여 기본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레드라! 그게 지금 전하의 앞에서 할 소리인가!?”
알현실에 있던 대신 한 명이 칼레드라를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짜증난다는 듯 심호흡을 한 칼레드라가 대신을 돌아보았다.
뱀과 같은 날카로운 눈동자가 살의를 담아 번뜩인다.
“분명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한시가 급하다고.”
끼어들지 마라.
그리 말하는 칼레드라 때문에 대신은 손을 오므린 채 침을 꿀꺽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을 침묵시킨 칼레드라가 다시금 왕을 올려다본다.
“전하. 소인이 중앙정보부의 도움으로 역모를 꾀하려던 파렴치한 자들을 수색하여 몰살하였나이다. 그들의 역겨운 얼굴을 전하께서도 보셔야 할 것 같군요.”
칼레드라가 눈치를 주자 옆에 있던 사병이 왕을 향해 한 발 가까이 다가간 후 손에 들고 있던 상자의 입구를 열었다.
“……!”
동시에 왕은 물론이고 대신들 또한 놀란 기색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자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의 머리였다.
그것도 칼레드라를 종일 비판하고 왕권을 강화해야한다고 주장하던 대신의 머리였다.
그는 왕의 밀명을 받아 칼레드라를 암살할 준비를 하고 있던 대신이기도 하였다.
상자 속 머리를 향해 시선을 돌린 칼레드라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애도를 표했다.
“가엾고도 멍청한 사람 같으니. 이 자가 역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전하 몰래 병사들을 양성하고 있더군요.”
이곳에 있는 모두가 칼레드라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칼레드라의 말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 무거운 침묵을 한차례 즐긴 칼레드라가 왕을 돌아본다.
칼레드라는 곧 미소를 거두고는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도 이런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는 자가 있다면!”
호통치듯 소리를 내지른 칼레드라가 지팡이로 바닥을 쾅 내리친다.
모두가 두려움에 잠식되어 떨고 있을 무렵에 칼레드라가 스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국왕 전하.”
칼레드라의 말에 옥좌에 앉아 있던 왕이 오한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본 칼레드라가 한 쪽 발을 뒤로 빼고 고개를 숙인다.
지팡이를 잡지 않은 손은 옆으로 고상하게 뻗는 것이 왕실의 궁중 예법이었다.
그러나 칼레드라의 눈동자만은 국왕을 서슬 퍼렇게 노려보고 있었다.
인사를 끝마친 칼레드라는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나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에 묻은 진흙이 알현실 내부에 찍혀나간다.
그대로 알현실을 벗어난 칼레드라는 궁전을 나섰다.
수많은 사병들이 따라붙는 가운데 궁전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앙정보부의 부국장이 칼레드라를 향해 다가왔다.
칼레드라가 시선을 던지자 부국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말했다.
“각하. 첩보에 따르면 엘드레시아 왕국이 제국의 협상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시종일관 차가웠던 칼레드라의 안면에 균열이 일어난다.
“……왜지.”
부국장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엘드레시아 왕국의 외무대신이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과 회담을 가진 이후 변심했다고 합니다. 회담에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칼레드라의 눈치를 보던 부국장이 말을 이었다.
“외무대신이 말하길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이 ‘엘드레시아 왕국을 굴복시킨 사실을 연합국에 알려라’고 했다고 합니다.”
지팡이의 손잡이를 붙잡은 칼레드라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오만하군…….’
그러나 지닌 능력에 걸맞은 오만함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다니엘에게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떠오르는 칼레드라였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내 생각보다 더한 거물이었나…….’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칼레드라가 걸음을 옮겼다.
“루시에게 작전에 박차를 가하라고 알려라. 놈은 두뇌회전이 빠르고 용의주도한 인물이다. 신뢰를 쌓지 못하면 제아무리 루시라고 해도 발각될 위험이 있으니까.”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대답한 부국장이 뒤로 물러난다.
이후 칼레드라는 미리 대기시켜놓았던 세단의 뒷좌석에 탑승하고는 숨을 돌렸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뺨에 묻은 피를 한 번 닦아낸 칼레드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니엘 슈타이너라…….”
어쩌면, 놈이 제국의 황제보다 더 껄끄러운 상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