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이 끝나자마자 사령부로 복귀한 다니엘은 원칙대로 군단장에게 보고하였다.
그 과정에서 군단장은 다니엘에게 협상이 잘 되었는지를 물었고, 다니엘은 최선을 다하였으나 결과를 예상하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이후 군단에서 내어준 호텔에서 하루를 보낸 다니엘은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의 식당으로 향했다.
조식을 먹기 위해 들린 것이었는데, 호텔 음식의 퀄리티가 나쁘지 않은 모양인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들을 살펴보니 대부분 영관급 장교들이다.
부사관이나 위관급 장교들도 몇 명 있기는 하였으나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호텔 투숙은 간부들 중에서도 군단의 중요 인사들에게만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 음식이 맛있다는 칭찬이 간간히 들려온다.
‘하긴 야전 음식에 비하면 아무리 급 낮은 호텔 음식이라도 천상의 맛이겠지…….’
새삼스럽지만 전장에서 호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건 꽤나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밖에서 고생하고 있을 병사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 다니엘은 뷔페 접시에 음식 몇 개를 담아서 빈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러자 먼저 식사를 하고 있던 글렌디 중사와 멕캘 중위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다.
다니엘을 발견하고는 둘 모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니엘 소령님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두 사람의 외침에 다니엘이 흠칫 놀라며 돌아본다.
둘 모두 선망의 눈길을 보내오고 있어서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떨떠름했던 다니엘은 일부러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 접시를 올려놓았다.
“……좋은 아침이군. 그보다 왜 그리도 신난 기색인가?”
다니엘이 방한 코트를 벗으며 물어보자 글렌디 중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야 본래 군단의 하급 부대로 배정되었을 저희가 전장에서 호텔 식사를 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부 다니엘 소령님 덕분입니다.”
“중사의 말에 동의합니다. 소령님 덕분에 실적도 쌓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제국에 헌신할 수 있게 되어 영광스러운 기분입니다.”
들뜬 표정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는 두 사람 덕분에 다니엘은 조금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영광스럽지 않을 걸? 너희들 아마 군사 재판을 받을 거니까…….’
다니엘은 왕국의 도움을 받아서 제국을 탈출하려는 생각이 만연하였다.
만약 중대의 지휘관인 다니엘이 적국으로 망명한다면, 그 휘하에 있는 간부들은 배심을 의심받으면서 온갖 조사를 받은 끝에 재판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행복한 미소가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는 입장인 다니엘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다니엘이 착석하자 글렌디 중사와 멕캘 중위 또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다니엘 또한 식사를 하며 머릿속으로는 제국 탈출 계획을 세웠다.
‘조만간 어떤 식으로라도 왕국은 내게 접촉하려고 할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본인들의 첩보 요원을 활용하는 것이겠지만, 사령부의 경계가 삼엄하다고 생각하여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3군단의 전면 공격 시기까지 기다려야겠어.’
군단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면 전선의 경계는 일정 부분 허물어진다.
사령부 내부의 가용 가능 인원들은 모두 전면 공격에 투입될 테니까.
더해 포탄이 날아오고 전차가 수시로 지면을 긁는 와중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아수라장에서 사람 한 명 빼돌리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었다.
‘그때가 되면…….’
전쟁에 참여하는 척 선봉에 나섰다가 왕국 요원과 접촉하여 망명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왕국 내부로 들어가는 것에 성공하면 그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왕국은 어디까지나 최종 망명을 위한 가교 역할이다.’
아직 밝히지 않은 기밀들이 더 있다는 것을 미끼로, 왕국 내부에 있을 연합국 측 사람과 거래를 하여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이번 계획의 목표였다.
‘안전한 경로를 통해 연합국에 도착하면 그쪽의 높으신 분들과 만나서…….’
제국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을 토대로 거래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다니엘이 원하는 것은 영주권, 새로운 신분, 신변 보호, 약간의 돈이 전부였으니 거래가 결렬될 걱정도 없었다.
‘어디 보자. 내가 영주권을 취득할 나라는 에드리아로 할까?’
에드리아는 국제 연합의 주축국이자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는 상임이사국이었다.
현재로서는 전쟁의 피해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라고 볼 수 있었다.
‘에드리아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는 칼레드라는 두뇌 회전이 빠르고 계산적인 인물이니까.’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루시 또한 에드리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배신자를 혐오하는 루시가 망명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역시 다른 국가가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다니엘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일단은 제국을 탈출하는 게 먼저였으니 이런 사소한 고민들은 나중에 차차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최악의 경우 왕국이 기밀만 받아먹고 시치미를 뗄 수도 있었으나 그런 걱정은 되지 않았다.
‘왕국 입장에서 보면 나는 수많은 기밀들을 조건 없이 넘겨준 귀빈이나 마찬가지니까. 향후에도 이용 가치가 상당하다고 생각하겠지.’
껍질을 벗겨낸 새우를 입에 넣은 다니엘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마 외무대신이라던 이반 그 사람, 지금쯤 나를 천사 취급하고 있지 않을까.’
이미지를 제쳐두고서라도 자국에게 호의적인 적국의 참모 본부 장교라면 데려가고 싶어서 눈독을 들이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이제 모든 건 시간 문제겠군.’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이어나갔다.
*
한편, 군단장 카를페터 크라우는 아침도 거른 채 집무를 보고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면 전면 공격에 나서야 할 테니 기존에 계획한 수많은 작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검토하고 있는 것이었다.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었지만 병사들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물론 종전 협상이 성사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카를페터는 협상이 성사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참모차장인 세드릭이 추천한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카를페터가 생각하기에도 제국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엘리트라 불리는 군사 고문들을 대동해도 성사시키지 못한 협상이 아니던가.
다니엘에게 희망을 걸기에는 그 가능성이 너무나 낮았다.
‘왕국의 결사항전 의지가 굳건한 이상 결국 무력 행사에 나서는 수밖에 없겠지.’
수많은 희생이 뒤따를 걸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카를페터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을 무렵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에 눈을 치켜뜬 카를페터가 말문을 열었다.
“들어오게.”
그러자 문이 열리며 보좌관 중령 칼프렌이 들어온다.
식사라도 가져온 것인가 싶었지만 칼프렌은 빈 손이었다.
“무슨 일인가? 바쁘니 용건만 말하고…….”
괜히 짜증스러운 마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던 카를페터는 입을 다물었다.
칼프렌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충격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보좌관?”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되었던 카를페터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국에서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는 전보를 보낸 모양이군. 어쩔 수 없지. 3차 권고까지 듣지 않으면 전면 공격을 행하라는 것이 황제 폐하의 명령인-”
“그게 아닙니다.”
카를페터의 한 쪽 눈썹이 꿈틀거린다.
칼프렌이 자신의 말을 끊은 게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니? 설마…….”
머릿속으로 추측을 이어가던 카를페터가 보기 드물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니엘이 협상을 성공시켰다는 건가?”
카를페터의 물음에 침을 꿀꺽 삼킨 칼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금일 오전 왕국측에서 보내온 전보에 따르면 제국의 모든 요구에 응하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노르디아 할양에 더해 베겐하임까지 할양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뭐라고? 카를페터의 입이 멍하니 벌어진다.
기존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에 인접한 도시인 베겐하임까지 추가로 넘겨주겠다고?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그 왕국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왕국이 순한 개가 되어 꼬리를 흔들고 있으니 카를페터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건 완전히 겁에 질려서 굴종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어안이 벙벙했던 카를페터가 겨우 정신을 되찾고는 칼프렌을 바라보았다.
“대체 협상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는 게 있나?”
“대화 내용은 아무도 듣지 못했기에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왕국의 외무대신인 이반이 협상 당시 대화를 회고하며 논하기를…….”
카를페터의 눈치를 보던 칼프렌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치 인간의 탈을 쓴 사탄의 자식과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고 합니다.”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돈다.
칼프렌의 말을 들은 카를페터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다니엘 소령…… 대체 그곳에서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아군의 성과가 이리도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