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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0 - Chapter 50

협상 당일.

제국 군단 사령부와 왕국 수도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평야.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군막 안에 안경을 쓴 노년의 남성이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이반 알렉세이.

왕국의 외무대신이자 이번 협상의 책임자로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이다.

옷매무새를 다듬은 이반은 주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군막 중앙에 협상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곳에는 그 흔한 병사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 둘이서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상대편 협상 책임자의 요청에 응한 덕분이었다.

이반이 협상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군막의 반대편 입구가 열리며 젊은 남성이 들어온다. 손에는 서류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반은 남자의 외모를 한 번 훑어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마른 체구이기는 했지만 장신의 키가 특유의 왜소함을 가려준다.

더해 늑대를 닮은 날카로운 눈동자에는 상대방을 위축시키는 힘이 담겨 있었다.

이반은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다니엘 슈타이너.’

노르디아 침공의 일등 공신이자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는 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소령에 불과한 자를 협상 책임자 자리에 올리다니…….’

벌써부터 왕국을 패전국으로 보고 압박 외교를 하겠다는 건가.

이반이 불쾌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무렵에 다니엘이 여상한 손길로 방한 코트를 벗었다.

코트에 묻은 눈송이들을 툭툭 털어낸 다니엘이 헛웃음을 흘린다.

“북부는 살기 좋은 곳이라고는 볼 수 없겠군요. 한여름에 눈이 다 내리다니…….”

혀를 차며 눈을 마저 털어낸 다니엘이 협상 테이블 쪽으로 다가온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다니엘이 이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소령 다니엘 슈타이너입니다. 특사로서 이번 협상의 책임자 자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왕국의 외무대신 이반 알렉사이일세.”

손을 붙잡은 둘은 악수를 한 번 하고는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다니엘은 제복모와 방한 코트를 테이블의 가장자리에 올리며 말했다.

“협상이 두 번이나 결렬이 났다고 들었습니다.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러 왔다기보다는 그저 대화를 나누러 온 것 같은 친근한 태도다.

이전에 협상을 하러 나왔던 이들의 딱딱한 태도와는 궤를 달라하였다.

쉽지 않은 상대라고 생각한 이반이 경계를 풀지 않으며 대답했다.

“제국의 요구가 터무니없기 때문일세.”

제국은 전략적 요충지인 노르디아를 할양하라고 한 것에 모자라 화폐 단위를 제국의 원화로 바꾸고 군비 제한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끝났다면 이반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은 전쟁 배상금을 과도하게 책정한 것은 물론이고,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물어 주전파 대신들과 군 수뇌부의 대대적인 처벌을 논하였다.

장관들과 군 수뇌부의 직위가 대대적으로 해제된다면, 그 빈 자리는 제국에 친화적인 이들이 석권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실상 왕국을 제국의 속국이자 괴뢰 국가로 만들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반은 제국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다니엘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깊게 들어가서 따지지는 않았다.

다만 들고 온 서류 가방을 열어 문서를 찾을 뿐이었다.

“그렇군요. 외무대신께서 겪고 있을 고충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고충을 덜어주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외무대신님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

문서를 꺼낸 다니엘이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제국의 영웅 취급을 받는 놈이 무슨 소리인가 싶으시겠지요. 하지만 그건 오해입니다. 저는 제국에 그리 헌신적이지 않습니다.”

“…….”

“오히려 왕국을 걱정하고 그쪽의 편에 서서 생각하는 날이 더 많을 정도지요. 괜찮으시다면 저를 명예 왕국민이라고 생각하셔도 좋을 겁니다.”

실없는 농담에 이반은 침묵하였다.

다니엘이 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반을 지긋이 바라보던 다니엘이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건넸다.

“제 진심을 먼저 보여드리는 편이 좋겠군요. 한 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렵게 구한 거라.”

뭔가 싶었던 이반은 다니엘이 건네는 문서를 건네받았다.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문서를 읽어내려가던 이반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이건…….”

“제국 제 3군단의 2급 기밀입니다.”

다니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문서에는 제국의 병력 현황과 작전 사항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가짜라고 의심할 수도 없었다.

문서에 적힌 몇몇 작전들은 이미 연합국 정보부를 통해 들었기에 외무대신인 이반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걸 보니 연합국 정보부가 알아낸 정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심지어 병력 현황도 연합국에서 파악하여 전달해 준 것의 두 배에 달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알아도 막을 수 없다……!’

이 작전들이 시행되는 순간 왕국은 파멸을 면치 못 할 것이다.

결사항전에 나서서 제국의 침공에 버틴다면, 왕국에게서 희망을 본 연합국이 적극적인 지원을 나설 거라 생각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이반은 야트막한 깨달음에 이를 빠득 갈았다.

‘연합국 이 개자식들 같으니라고……! 처음부터 우리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한 거였나!’

그들이 제국의 병력과 작전을 축소 보고하여 왕국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전쟁에 임하게끔 손을 쓴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다면 최대한 전선을 유지하면 지원을 보내겠다고 말한 것도 모두……!’

거짓말이었다.

연합국의 입장에서 왕국은 그저 제국에 출혈을 입히고 쓰러질 장기 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이반의 손이 부르르 떨린다.

그런 이반의 상태를 다니엘은 다르게 해석하였다.

‘희열을 느끼고 있나.’

게임에서 왕국은 세 번의 협상을 모두 결렬시키고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왕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제국의 2급 기밀을 손에 쥔 것이 기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월하게 손을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다니엘이 미소를 지었을 찰나, 이반이 고개를 들고는 거칠어진 숨을 내쉬었다.

‘다니엘 슈타이너는…… 혹시 왕국 내부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건가.’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왕국이 연합국을 통해 축소된 보고를 듣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2급 기밀을 가져와서 보라고 내어준 것이 분명하다.

‘정보의 격차를 매꾸는 것이 협상에 유리하다 판단했을 것이다…….’

다니엘의 판단은 탁월하였다.

제국의 병력을 절반으로 알고 있었을 때도 결사항전을 주장해야 했을 정도인데, 진실을 마주한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이건 전쟁이 아니다. 일방적인 학살이지…….’

제국군의 공격에 휩쓸려나갈 왕국군의 병사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들이 내지를 비명소리가 죄책감이 되어 다가온다.

하지만 이제 와서 제국의 손을 잡는다고 해도 왕국의 미래는 불투명하였다.

왕국민들을 제국의 지배 속에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지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여러 고민 속에서 침음을 흘리던 이반이 어렵사리 입술을 열었다.

“……다니엘 소령. 내 하나만 물어보지. 여기서 그대의 손을 붙잡지 않는다면 왕국은 과연 어떻게 되겠나?”

이반은 제국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반면 다니엘은 저 질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이 평행선상을 달리는 가운데 다니엘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반은 왜인지 모르게 그 스산한 웃음소리가 악마의 것처럼 들렸다.

“웃기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제 손을 붙잡지 않으면 왕국이 어떻게 될 건지 물으시다니. 외무대신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일순간 웃음을 갈무리한 다니엘이 이반을 빤히 바라본다.

그건 마치 늑대가 본심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제 손을 붙잡지 않는다면 왕국은…….”

살며시 상체를 기울인 다니엘이 이반에게 들릴 정도로만 낮게 속삭였다.

“지도에서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다니엘의 말을 들은 이반의 동공이 확장된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떨고 있자 다니엘이 몸을 물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다니엘이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던 이반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걸 본 다니엘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는 제복모와 코트를 챙겨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군막을 나서려던 다니엘은 ‘아’ 하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외무대신님.”

이반이 긴장 속에서 침묵하는 가운데 다니엘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연합국에도 제 이야기를 잘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 말한 다니엘이 군막을 나선다.

그제야 이반은 멈췄던 숨을 토해내며 이마를 짚었다.

과호흡이 오면서 시야가 흔들린다.

마치 사탄의 자식과 이야기를 하다가 겨우 풀려난 느낌이었다.

압박감에서 해방된 이반이 숨을 헐떡이고 있으니 그 뒤편의 입구에서 비서실장이 들어온다.

적국의 특사가 나왔는데 이반이 나오지 않고 있으니 의아하여 들어온 것이다.

군막 안에서 이반을 발견한 비서실장은 당황하며 급히 달려갔다.

“외무대신님!”

이반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비서실장은 의자 옆에서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외무대신을 올려다보았다.

“괘, 괜찮으십니까?”

비서실장의 물음에 이반은 고개를 저었다.

꾹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국왕 전하께서도 인정해야만 해. 이길 수 없네…….”

두려움에 잠식된 아이처럼, 이반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결단코 제국을 이길 수 없어…….”

덕분에 비서실장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외무대신이 협상에 들어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패배감에 젖어 있었으니까.

우물쭈물하던 비서실장은 망연히 협상 테이블의 반대편 의자를 바라보았다.

‘저 자리에 앉은 자가 대체 무슨 말을 건넸기에…….’

대화의 내용을 알 수 없었던 비서실장은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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