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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9 - Chapter 49

군단 사령부 예하 군사 보안 부서.

사령부 지하 일층, 임시 기록 보관실.

“다니엘 슈타이너 소령님이 기록 보관실 안에 들어가신지 벌써 10시간째입니다. 슬슬 걱정되는데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의 말에 보안 부서 소속 중사 살로담이 고개를 저었다.

“소령님이 말씀하셨잖아. 기록 보관실을 혼자 둘러봐야겠으니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말이야. 혹시나 명령을 어길 생각은 하지 마라. 너 때문에 나까지 죽긴 싫으니까.”

“주, 죽는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새끼 아무것도 모르네. 다니엘 소령님이 보안 부서를 맘대로 활보할 수 있는 이유가 군단장님이 직접 권한을 쥐어주셨기 때문인 거야.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요컨대 지금 이곳에서 다니엘 슈타이너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군단장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과 같은 취급이라는 소리였다.

덕분에 얼굴이 새파래진 병사가 식은땀을 흘리더니 불현듯 차렷 자세를 취한다.

그게 웃겼던 살로담 중사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 이거 겁먹은 것 좀 보게. 너 이렇게 쫄보새끼면서 왕국군이랑 싸울 수는 있겠어? 물론 우리가 전장에 나설 일은 거의 없겠지만…….”

“주, 주주, 중사님!”

눈동자를 파르르 떤 병사가 살로담을 향해 곁눈질을 보낸다.

대체 뭔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돌린 살로담은 병사처럼 얼굴이 새파래지고 말았다.

군단장 보좌관 중령 칼프렌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로담은 거의 반사적으로 경례를 올렸다.

“보, 보좌관님! 이곳에는 어쩐 일로……!”

칼프렌은 뒷짐을 진 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불시 순찰 겸 다니엘 소령이 일을 잘 해내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왔다네. 이 늙은이가 귀관들의 즐거운 사담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구먼.”

칼프렌의 말과 대사는 온화하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직역하자면 이렇다.

기록 보관실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놈들이 사람 한 명이 멀쩡히 걸어오는데도 눈치를 못 챈 채로 잡담이나 나누고 있나?

병사는 칼프렌이 독려를 해주러 온 줄 알고 경계를 풀었지만, 칼프렌의 의중을 읽은 살로담은 경례를 내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굳어버렸다.

“뭐어. 자네들을 괴롭히려고 온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보다 다니엘 소령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살로담이 떠듬떠듬 말했다.

“아. 그게…… 기록 보관실을 혼자 둘러본다고 들어간지 벌써 10시간째입니다.”

“오늘도? 어제도 기록 보관실에 살다시피 하지 않았나?”

“예. 협상 준비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나흘밖에 없으니 촉박하다고…….”

살로담의 말을 들은 칼프렌은 내심 감탄하였다.

군단장님의 요구를 일종의 ‘책임 떠넘기기’로 알아듣고 거절하거나 수락하더라도 하는 시늉만 할 줄 알았는데 이리도 열심히 준비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

유능한 인재가 노력까지 한다면 그 잠재력은 무한할 것이다.

칼프렌이 다니엘 슈타이너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살로담과 병사가 지키고 있던 철문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나가고 싶다는 신호였다. 안에서는 문을 열 수 없게 설계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순서인 셈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병사가 철문을 붙잡고 열어주자 그 안에서 다니엘 슈타이너가 모습을 드러낸다.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늑대를 닮은 눈동자는 정면을 올곧이 응시하고 있었다.

소령으로 막 진급한 애송이 아니라 노련한 참모 같은 눈빛에 어깨가 움찔 떨릴 정도다.

한동안 칼프렌을 바라보고 있던 다니엘이 정중하게 경례를 올린다.

“보좌관님.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단호한 말투였지만 상관에 대한 예우는 전해지고 있었다.

경례를 받아준 칼프렌이 모종의 긴장 속에서 대답했다.

“……군단장님의 명령에 의거 자네가 일을 진행함에 있어 필요한 건 없는지 물어보기 위해 온 걸세. 그런데 괜찮은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길을 비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제 협상 계획을 짜야 할 시간이라.”

그제야 자신이 길을 막고 있다는 걸 깨달은 칼프렌이 옆으로 한 발 물러나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다니엘은 칼프렌을 지나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런 다니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칼프렌은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독종이군. 어떻게든 협상을 성공시키겠다는 기개가 보일 정도야…….’

하지만 황제 폐하의 독단으로 인해 협상 체결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다.

‘설마 그걸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을 혹사시키는 다니엘의 모습에서 칼프렌은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어쩌면, 그가 협상을 체결시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

복도를 걸어가던 다니엘은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들키는 줄 알았네.’

철문이 열리자 군단장 보좌관이 서 있기에 다니엘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기록 보관실에 들고 간 수첩에 기밀 사항들을 몰래 적고 나온 것을 들킨 줄 알았던 것이다.

‘만약 기밀을 반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좌관이 눈치챘다면 일이 꽤나 힘들게 흘러갔겠지.’

최악의 경우 배반자로 낙인이 찍혀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상황과는 달리 보좌관은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다니엘은 기밀 사항을 빼곡하게 적은 수첩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제 이걸 문서화해서…….’

내일 있을 종전 협상에서 왕국의 외무대신에게 건네주며 망명을 신청하면 그만이었다.

제아무리 다니엘이 제국의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2급 군사 기밀들을 빼돌려 준다면 그쪽도 다니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이 망할 제국에서 탈출하는구나.’

장밋빛 인생이 펼쳐질 거라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볍다.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걸음을 옮기던 다니엘은 어느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반대편에서 루시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와의 거리가 가까워질 때마다 진한 향수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왜 향수를 뿌린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무렵에 지근거리에 도달한 루시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소령님. 이곳에 계셨군요.”

“……날 찾고 있었나? 군단장님이 부르시던가.”

“그건 아닙니다. 그냥…….”

루시가 머뭇거렸다.

다니엘을 유혹하기 위해 향수를 뿌린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대화를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어가야 한다는 말인가?

애초에 ‘유혹’이란 대체 뭐지?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는 것에 있어 루시의 지식은 백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부랴부랴 연애 관련 책을 읽기는 했었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루시가 다니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오늘 일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부터 협상 계획을 짜야한다. 대충 윤곽이 잡혔기에 오늘은 일찍 퇴근할 생각이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지?”

“아. 그게…….”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부끄럽지만 이건 임무였다.

“저녁에 시간이 괜찮으시면 저와 함께…….”

뒷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책에서 배운 낯부끄러운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까, 단 둘이서…….”

루시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다니엘은 생각했다.

불안정한 시선 처리, 조금이지만 가빠진 호흡, 단 둘이서 만나자는 의미심장한 요청.

머릿속의 주판을 굴린 다니엘은 하나의 예측에 도달하였다.

‘……설마, 암살인가?’

연합국에서 암살 명령이 내려온 건가?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시기가 너무 빠르다.

‘그래. 시기가 너무 빨라.’

착각인가 싶었을 무렵에 루시가 마음을 다잡은 듯 다니엘을 바라본다.

‘책에서 봤어.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은은한 미소를 지어주라고…….’

하지만 은은한 미소가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은은한 미소는커녕 일반적인 미소조차 제대로 지은 적 없는 루시에게 있어서는 다소 난감한 조언이었다.

하지만 ‘다니엘 슈타이너를 유혹하라’는 연합국의 명령이 내려온 이상 첩보 요원인 루시는 이행해야만 한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갈등을 겪은 루시는 결국 다니엘을 향해 어렵사리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를 본 다니엘은 헛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두 눈을 날카롭게 좁힌 채 입꼬리를 가느다랗게 올리는 것이 말 그대로 ‘살인 미소’였던 것이다.

마치 곧 죽을 사냥감을 지켜보는 사냥꾼을 보는 것 같았다.

덕분에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건 백퍼센트 암살이다……!’

루시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다니엘이 헛기침을 내뱉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루시와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관? 아무래도 오늘은 야근을 해야 할 것 같네.”

“……네? 하지만 방금 일찍 퇴근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말이지. 그럼 이만…….”

그대로 지나치려던 다니엘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향수를 너무 과하게 뿌린 게 아닌가? 보통 향수는 자신의 체취를 감추기 위해서 쓰는 것인데 부관은 왜 사용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 저는…….”

“부관의 피부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아. 오히려 향기로울 정도지. 그러니 향수 같은 사치품에 의존하지 말게.”

다니엘은 루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좋아. 평범하게 대화를 나눴으니 암살 명령을 알아차렸다고 생각하지 못하겠지.’

위험을 넘긴 다니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찰나,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루시의 귀가 붉게 물들어갔다.

다니엘의 칭찬이 알게 모르게 루시를 부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종류의 부끄러움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미증유의 감정을 느끼던 루시는 창가에 몸을 기대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아…….’

이상한 명령을 내린 상부도 그걸 따르고 있는 자신도 모두 바보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래도 명령이 내려온 이상 언젠가는 다니엘을 유혹해야만 했다.

그것이 버거운 과제처럼 느껴진다.

괜히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던 루시가 애써 수치심을 지워내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은 숙소에 돌아가서 향수 냄새부터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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